[김기천 칼럼] 지각·재탕·서면의 새해 업무보고

입력 2019.03.12 06:00

올해 정부 부처의 새해 업무보고는 지각·재탕·서면의 삼박자가 특징이다. 작년 12월 11일에 시작된 대통령 업무보고가 3개월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해외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6일 귀국한 뒤 국무총리가 마무리 총괄 보고를 할 예정이다.

업무보고가 이렇게 지체되다보니 올들어 정부가 이미 발표했거나 시행하고 있는 정책을 신년 계획으로 다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더욱이 작년에 7개 부처가 대면보고를 했고, 나머지 11개 부처는 뒤늦게 서면보고를 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지각 보고는 예전에도 있었다. 2001년엔 1월 15일 시작된 업무보고가 4월 18일에 끝났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과 김대중 대통령의 해외순방, 개각 등으로 늦춰진 탓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엔 3월3일에 업무보고가 시작돼 한달만에 끝났다. 출발 자체가 매우 늦었다.

재탕·삼탕 논란 역시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정부가 하는 일은 대부분 예산에 반영된다. 새해 예산을 보면 정부가 하려는 일을 다 알 수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부는 예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새해 업무계획은 각 부처가 예산 편성 과정에서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내용과 겹칠 수밖에 없다.

여기다 기획재정부는 연말에 새해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한다. 국회에서 통과된 새해 예산안의 주요 사업과 함께 법령 개정 등 정책 과제를 이슈별로 정리해서 내놓는다. 그리고 새해가 되면 다시 업무보고를 한다. 그 사이에 새로운 정책을 개발했다면 그게 더 비정상이다. 기본적으로 예산과 경제정책방향의 내용을 다시 우려먹을 수 밖에 없다.

역대 정부는 업무보고의 내용보다 형식을 바꿔 국민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김대중 정부는 정책 당국자와 민간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방식을 처음 시행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발한 논쟁이 이뤄질 수 있도록 TV 중계를 없애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는 각 부처가 업무보고 전에 주요 내용을 청와대에 서면 보고하도록 했다. 부처간 업무 혼선을 막기 위한 사전 조율이 목적이었다. 업무보고에 지난해 정책성과에 대한 평가와 올해 정책과제, 혁신과제, 성과측정지표 등을 제시하는 방안을 도입하기도 했다. 현실성 없는 정책을 걸러내기 위해 정책의 품질관리와 성과 관리를 특히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기능이 유사한 부처를 3~4개씩 묶어 민관합동 토론회로 진행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2009년과 2010년 업무보고를 전년 12월에 앞당기기도 했다. 새해 들어 곧바로 예산 집행에 나서기 위한 새로운 시도였다. 금융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민간 기업 스타일의 ‘속도전’을 편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기능이 아니라 이슈별 보고 방식을 도입했다. 2015년의 경우 경제혁신 3개년 계획, 통일준비, 국가혁신, 국민행복 등 4개 주제별로 관련 부처가 모두 참여해 합동보고를 했다. 중복보고 여지를 없애고, 국정과제 집행에 효과를 내자는 취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올해 처음 시행한 서면보고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새로운 형식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그냥 무성의·무관심의 산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12월 교육부, 국방부 등 7개 부처 대면보고를 받았다. 당시 청와대는 "새해 첫달을 업무 보고로 흘려보내지 않고 1월부터 곧바로 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취지"라고 했다.

청와대 설명대로라면 나머지 부처의 업무보고도 신속하게 이뤄져야 했다. 그런데 아무 설명 없이 마냥 늦추다 2월 중순쯤 "나머지 부처는 서면으로 업무보고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후 3월 6~7일 일부 부처가 서면보고 내용을 발표했다. 청와대는 총리가 이미 서면보고를 받았고, 이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일부에선 올들어 청와대가 온통 대북정책과 미·북 정상회담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하지만 중소·벤처기업, 대기업·중견기업, 혁신벤처기업, 자영업·소상공인 대표와의 만남 등 연초에 대통령의 경제행보가 활발했다는 점에서 그게 전부가 아닐 수 있다. 이벤트 성격이 짙은 행사에 치중하다 업무보고 시간을 잡지 못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새해 업무보고에 큰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과거 중앙정부가 경제사회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주도적으로 경제를 이끌어가던 시절에는 업무보고가 매우 중요한 지침이자 이정표였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토론 방식을 도입하는 등 변화를 꾀해도 재탕·삼탕, 짜집기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지 오래다.

정부 부처들이 격식을 차려 대통령에게 새해 업무보고를 하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선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수십년 관행이라고 해서 계속 보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대면보고가 아닌 서면보고로 대충 넘길 정도가 됐다면 아예 폐지하고 대안을 찾는 데 더 나을 것이다.

다만 경기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업무보고가 흐지부지된 사유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업무보고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경제현안에 더 집중하려다 그렇게 됐다면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김정은 답방 준비나 이벤트성 행사에 밀린 결과라면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커보인다. "경제와 민생이 뒷전"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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