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日에 협공 당하는 한국 반도체

조선일보
  • 강동철 기자
    입력 2019.02.18 03:06

    WSJ "중국, 미국과 무역협상서 미국산 수입규모 3배 확대 제안"
    한국 수출 위축 가능성… 일본은 "핵심 물질 수출금지" 으름장

    수출의 20%를 차지하면서 한국 경제의 유일한 성장 엔진 역할을 하고 있는 반도체 산업이 때아닌 외풍(外風)을 맞고 있다. 초호황이 끝나고 침체 국면으로 접어드는 상황에 미국과 중국, 일본이 각각 '한국 반도체 패권(覇權) 견제'에 나서는 3중고(三重苦)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4일(현지 시각) "미·중 무역 협상 과정에서 중국 측이 향후 6년간 2000억달러(약 225조원)어치의 반도체를 수입하겠다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규모의 3배를 넘는다. 이 영향으로 지난 15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각각 3.1%, 4.7% 하락했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은 2017년 2601억달러였고 작년엔 2990억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의 절반 이상이다. 중국이 인위적으로 수입 물량을 미국 기업에 배정하면, 그만큼 한국 반도체 수출은 위축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미국이 중국을 압박해 세계 반도체 시장 맹주 자리를 되찾으려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 미국 인텔은 세계 반도체 1위였고 미국 퀄컴은 3위, 텍사스인스트루먼츠는 4위였다. 하지만 당시 2위였던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을 등에 업고 2017년과 2018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도 작년 3위로 올라섰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 이후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에서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핵심 물질 중 하나인 불화수소(불산 플루오르화수소)의 한국 수출을 금지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용 불화수소 시장은 일본 업체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도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 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崛起·우뚝 섬)도 위협 요소다. 중국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는 40조원 이상을 투자하더니, 작년 하반기부터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므누신 만나는 시진핑 - 지난 1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2차 미·중 고위급 무역협상에 앞서 중국 시진핑(오른쪽에서 둘째) 국가주석이 미국 스티븐 므누신(왼쪽에서 둘째) 재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중국 류허 부총리, 왼쪽 끝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다.
    므누신 만나는 시진핑 - 지난 15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2차 미·중 고위급 무역협상에 앞서 중국 시진핑(오른쪽에서 둘째) 국가주석이 미국 스티븐 므누신(왼쪽에서 둘째) 재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중국 류허 부총리, 왼쪽 끝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다. /AP 연합뉴스

    미·중·일의 견제에다 업황 악화까지 겹치면서 작년 역대 최고(最高)의 실적을 냈던 '대한민국 반도체호(號)'에 급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지난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반도체 분야에서만 각각 44조5700억원과 20조84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대부분 수출에서 번 것이다. 작년 반도체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20.9%에 달하는 1267억달러를 차지했다. 이런 승승장구를 지켜본 미·중·일로서는 각자 다른 셈법으로 견제에 나서는 것이다.

    특히 지금은 반도체 경기가 침체기로 접어든 상황이다. 수요 감소로 인한 공급 과잉이 심해지면서 한국 기업의 주력 제품인 D램과 낸드 메모리 가격은 급락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재고량은 계속 늘어나면서 역대 최대 수준을 경신하고 있다.

    ①반도체 1위 복귀하려는 美

    미·중 무역 협상 결과에 따라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주요 경쟁자인 미국 마이크론·웨스턴디지털이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이 크다. 외신의 보도대로 중국이 6년간 2000억달러어치를 구매할 경우 대부분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이미 미국의 인텔·퀄컴 등이 장악했다. 추가로 수입할 여력이 없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는 중국이 한국에 수입의 50%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일부를 미국에 떼어주기 용이하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공급 과잉 상태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미국 마이크론이 중국에 대규모 판로를 확보하면 그만큼 우리 기업은 불리해진다.

    ②반도체 소재·부품으로 한국 흔드는 日

    일본은 D램 반도체 시장에서는 한국에 주도권을 뺏겼지만 소재·부품과 제조장비 시장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이 압박 카드로 이를 눈여겨보는 이유다. 자민당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측이 우리나라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따라 신일본제철의 압류 자산 매각에 착수하자 곧바로 반도체 장비 세정에 쓰이는 불화수소의 수출 금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과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 그래프

    반도체의 핵심 원자재인 웨이퍼(둥근 원판) 시장에서도 세계 1·2위는 일본 신에쓰와 섬코다. 국내 업체는 이런 웨이퍼를 사서 회로를 입힌 뒤 잘라서 반도체를 만든다. 웨이퍼 한 장에 수천 개의 반도체가 나온다. 반도체 핵심 장비인 노광장비(웨이퍼에 빛을 쏘는 방식으로 회로를 그리는 장비)도 일본 니콘·캐논이 유럽 ASML과 함께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③업황 악화에도 투자 멈추지 않는 中

    반도체 업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악화 중이다. 지난달 D램 가격(DDR4 8Gb 기준)은 17.24% 급락했다. 2010년 말 2차 반도체 치킨 게임 이후 최대 낙폭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반도체 굴기를 시도하는 중국 정부는 천문학적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 신생 반도체업체인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스)는 작년 하반기에 낸드플래시 양산에 돌입했다. 푸젠진화반도체와 이노트론도 D램 시장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민간과 함께 1조 위안(약 166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투자 펀드를 마련해 이런 신생 업체를 지원할 방침이다.

    여기에 중국 반독점 당국은 작년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을 대상으로 반도체 가격 담합 여부를 조사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기업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정치·외교 문제가 겹치면서 향후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메모리 반도체와 비(非)메모리 반도체

    메모리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부품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D램과 낸드플래시가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저장 역할을 하지 않는 다른 종류를 통칭한다. PC와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중앙처리장치)나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가 대표적이다. 미국 인텔, 퀄컴 등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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