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인사이더] 암호화폐 업계 뛰어든 하버드 역사학도

조선비즈
  • 박원익 기자
    입력 2019.02.11 06:00

    2006년 봄 미국. 이준행 스트리미 대표는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하버드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저명한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교수가 강의하는 세계금융사가 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 그는 특히 유가증권과 주식시장의 출현에 매료됐다. 유대인이 만들고 퍼뜨린 이 발명품이 금융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8년 후. 이 대표는 비슷한 기분에 휩싸였다. 대학 졸업 후 사모펀드에서 일하던 중 비트코인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비트코인은 기존 화폐와 달리 고정된 발행자가 없고 누구나 생태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암호화폐로 불리는 이 새로운 자산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이준행 스트리미 대표.
    "2014년 비트코인을 처음 접하고 완전히 빠져들었죠. 금융자산으로서도 특이했고, 기술적으로도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암호화폐의 사회적 함의, 여파를 역사적 맥락에서 상상하게 되더군요. 인생을 걸고 도전해 볼만한 분야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대표는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2015년 스트리미를 설립했다. 설립 초기엔 블록체인을 활용한 해외 송금 서비스 개발에 집중하며 신한은행, 펜부시 캐피탈,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등으로부터 투자도 받았다. 2017년 11월 암호화폐 거래소 ‘고팍스(GOPAX)’를 선보였고, 2018년 말엔 암호화폐 예치 솔루션 서비스 ‘다스크’를 선보이기도 했다. 새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인 이 대표를 만났다.

    ◇ "블록체인·암호화폐는 스타트업이 도전하기 좋은 시장"

    -암호화폐 업계에 뛰어든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엔 호기심이었지만, 계속 공부하다 보니 빨려 들어갔다. 유대인들이 유가증권을 발명해 조폐권을 양분한 것처럼 암호화폐가 새로운 자산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가 쓰고 외국 콘퍼런스 같은데 다녔는데, 알면 알수록 이 분야에 베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기 힘들 지경이 됐다. 자연스럽게 사업을 준비하게 됐다."

    -좋은 직장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사모펀드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주주들은 단기간에 고수익을 얻기 원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역할 갈등이 있었다.

    투자한 회사를 관리하다 보니 직원들에게 마음이 많이 가더라. 주주 입장에 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주주와 회사 구성원의 이익이 상충할 때 구성원 편에 서게 되더라. 내 지식을 활용해 투자한 기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와서 내 사업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이 들어가야 기업이 크는 것 아닌가.

    "그 말은 맞지만, 자본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자본을 많이 투자해도 다른 요건이 부족해 잘 안되는 사례도 많이 봤다.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의 경우 큰 자본이 들어가면 대개 성과가 좋고, 대기업들도 좋은 결과를 낸다.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분야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잘될지 안 될지 불확실하지만 커질 가능성이 있는 시장은 오히려 스타트업이 도전하기 좋다. 블록체인·암호화폐 분야도 스타트업이 도전하기 좋은 시장이라고 봤다."

    스트리미에 투자한 기업들. /스트리미 제공
    2008년 나카모토 사토시가 발표한 논문에서 출발한 비트코인은 기존 화폐와 달리 정부, 중앙은행, 금융기관의 개입 없이 발행되며 누구나 거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데이터를 기록한 원장(ledger)을 체인처럼 연결해 관리하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며 보안을 위해 해시 함수를 활용하기 때문에 암호화폐로 불린다.

    -암호화폐를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한 것 같다.

    "금융사를 공부한 게 영향을 준 것 같다. 니얼 퍼거슨 교수 강의 들었던 때가 사토시 논문 발표되기 전인 2006년이었다. 재밌는 건 퍼거슨 교수도 지금 비트코인 예찬론자가 돼 있다는 사실이다."

    ◇ 거래 매칭 엔진 자체 개발…인도네시아 시장 진출

    거래량 기준 국내 4~5위권 암호화폐 거래소인 고팍스는 작년 7월 암호화폐 거래소 최초로 ISO/IEC 27001 국제표준 정보보호 인증을 획득했다. 국내 업계 최초로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받기도 했다.

    -고팍스만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인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다른 거래소와의 차별점이 될 것 같다. 보안, 기술 등 기본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거래 매칭 엔진을 자체 개발한 암호화폐 거래소는 고팍스밖에 없는 거로 안다. 클라우드 환경에서 초당 10만건 이상 거래를 매칭할 수 있는 오더 매칭 시스템(OMS)을 가지고 있다.

    선투자해서 보안 인증 획득한 것이나 초기에 상장 수수료 안 받고 수익 적게 가져가는 전략을 편 것도 장기적 관점에서 고객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스트리미가 선보인 암호화폐 예치 서비스 다스크(DASK). /스트리미 제공
    -최근 암호화폐 예치 서비스를 선보였다.

    "다스크라는 서비스다. 주식에 비유하면 예탁결제원, 은행으로 치면 금고 같은 서비스라고 보면 된다. 암호화폐를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내놓은 서비스다.

    주식시장의 경우 이해 상충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거래소와 예탁결제원을 분리해 운영한다. 암호화폐도 거래 조작 등 문제 발생을 막으려면 그렇게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치 서비스를 활용하면 거래소는 거래만 담당하고 고객의 암호화폐는 별도로 안전하게 보관·관리(custody)할 수 있다. 고팍스엔 이미 다스크를 적용했다. 다스크는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수익은 어떻게 내나.

    "다스크로 당장 수익을 내려는 건 아니다. 일단 보안 인프라가 제대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뢰를 얻게 되면 차차 민간 기업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해외 진출 계획은 없나.

    "최근 인도네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작년 말부터 현지 오퍼레이터와 협력해 베타 서비스에 들어갔고, 인도네시아 재계 15위권 회사의 공동 출자로 고팍스 인도네시아를 설립했다.

    암호화폐 거래소 솔루션을 잘 구축한 건 이런 확장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다. 확장과 협업에 용이한 구조를 가졌다는 점도 고팍스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 "세상에 이로운 암호화폐 금융·인프라 만들고파"

    -목표는 무엇인가.

    "단기적인 목표는 현재 추진 중인 사업 잘 진행해 생존하는 것이다. 벤처캐피털(VC)을 통한 추가 투자 유치도 생각하고 있다. 여러 투자자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전이 있다면.

    "블록체인이 잘 사용될 수 있는 암호화폐·금융 인프라를 만들고 싶다. 블록체인은 가치 중립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술이 세상에 이롭게 사용되려면 업계 리더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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