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 파업사태엔 'L의 갈등' 있다

입력 2019.01.11 03:06

연봉 5300만원 'L제로' 창구직원들 "근무 경력까지 인정해달라" 요구
치열한 경쟁 뚫은 大卒공채보다 연봉 더 받는 '역전 현상' 가능성

8일 총파업한 국민은행 노조는 설연휴를 앞둔 이달 30일 2차 파업을 계획 중이다. 10일에도 노사 양측이 만났지만, 입장 차를 좁히지 못했다.

19년 만의 국민은행 총파업에서 노사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 중 하나는 'L0(엘 제로)', 즉 2014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대거 전환된 2700여명 근로자에 대한 처우 문제다. 주로 창구 업무 등을 하다 노조의 요구로 대거 정규직이 된 L0 직원들은 '무늬만 정규직'이라는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그간의 경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상위 직군 대비 연봉 격차가 심하다는 것이다.

정부는 2020년까지 공공부문에서만 총 20만5000여명의 상시·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이미 작년 9월 말 기준 10만명이 정규직이 됐다. 국민은행 파업 사태에서 보듯, 앞으로 이들도 기존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요구하고 나설 공산이 크다. 노동 전문가들은 국민은행 노조가 전체 노동계의 전위대로서 이 전선을 돌파하려고 하고 있고, 국민은행 측은 산업계 전반에 부담을 주는 '나쁜 선례'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고 본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낳은 문제

2014년 국민은행은 지점 창구 전담 직원인 '텔러' 등 4100여명의 무기계약직을 한꺼번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명예퇴직 기회를 잡아 많게는 3년 치 연봉을 받고 퇴사했고, 지금은 2670명이 남았다. 현재 평균 연봉은 5300만원, 평균 근속 연수는 10~15년가량이다. 이들의 연봉은 2017년 기준 신세계(5200만원)나 현대백화점(5500만원) 같은 유통 대기업 평균 연봉과 비슷하다. 은행 창구 직원들의 연봉 수준은 타 업종에 비해 이미 너무 높다는 지적이 많다. 금융 선진국 미국의 경우, 텔러 임금 수준은 시급 12달러, 연봉으로 치면 많아야 3만달러 수준이다.

KB국민은행 노조의 1차 총파업 다음 날인 9일 오전 KB국민은행 서울 여의도본점에서 직원들이 고객들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있다. 최근 19년 만의 총파업을 강행한 KB국민은행 내부에서는 지난 2014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L0(엘 제로)’ 직군의 처우 개선을 둘러싸고 직원들 간에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KB국민은행 노조의 1차 총파업 다음 날인 9일 오전 KB국민은행 서울 여의도본점에서 직원들이 고객들을 맞이하며 인사하고 있다. 최근 19년 만의 총파업을 강행한 KB국민은행 내부에서는 지난 2014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L0(엘 제로)’ 직군의 처우 개선을 둘러싸고 직원들 간에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연합뉴스

L0 직원들도 승진 심사를 통과하면 L1(대리), L2(과장·차장) 등 상위 직급으로 이동이 가능하지만, 실제 이동하는 숫자는 많지 않다. 이들은 비정규직 시절 근속 기간의 25%만 경력으로 인정받았는데 100% 모두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은행 내부에서부터 노노(勞勞)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국민은행의 대졸 공채 직원들은 '과도한 요구'라고 보고 있다. 만약 L0 직원들의 비정규직 시절 경력을 모두 인정해줄 경우, 치열한 공채 경쟁을 뚫고 입사한 자신들(L1·L2 직군)보다 일부 L0 직원이 연봉을 많이 받는 역전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L0부터 L4(고참 지점장·지역본부장)까지 임원을 제외한 국민은행 직원 전체 평균연봉은 9100만원이다. 입행 5년 차 한 행원은 "어려운 시험, 수천 대 1의 바늘구멍을 뚫고 입사했는데 (L0들이) 오래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연봉을 대폭 올리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과잉 고용, 고임금 구조 고착화" 경고

주요 시중은행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사례

문제는 ‘정규직 전환자’들의 처우 개선 요구가 국민은행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공기관 민간기업 할 것 없이 각 노조가 처음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다가 정규직화가 달성되고 나면, 국민은행처럼 “위화감을 없애자”며 기존 정규직과의 차이를 없애자고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정규직으로 편입 결정이 난 산업은행 청소·시설관리 용역 직원들은 지난 6일 산업은행 여의도 본점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현재 산은 출자회사에 소속된 이들은 산은 신설 자회사가 아닌 산은 본사가 직접 고용해줄 것과 정년을 65세로 연장해줄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정년이 만 60세인 산은으로선 본사 직원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받기 어려운 요구다.

2050여 명의 기간제·파견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키로 한 기업은행 역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 현재 대상자 중 350여 명이 자회사 고용 승계를 거부하고 기업은행 직고용을 원하는 상황이다. 이미 60세에 가까운 고령자들이 상당한 이들을 직고용할 경우, 마찬가지로 정년 연장 문제를 떠안게 돼 사측은 난감해하고 있다.

정부 일정대로라면 850여 개 공공기관 비정규직 20만5000명이 2020년까지 단계별로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정규직화된 직원들은 결국 ‘과잉 고용’을 초래하고 고임금 구조를 고착화해 기업 수익성을 갉아먹을 것”이라며 “수익성이 나빠진 기업은 부실 상태에 빠지거나 결국 수수료를 올리는 식으로 소비자에게 비용을 전가해 전체 국민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KB국민은행 L 직급

KB국민은행 직원의 직급은 L0에서 L4까지 5단계로 나뉜다. L은 ‘레벨(level)’이란 의미다. L0는 은행 창구 직원, L1은 대리, L2는 과장·차장, L3는 일부 지점장·부지점장·팀장, L4는 고참 지점장·지역본부장·부장이 해당한다. 복지 혜택은 같지만 직급에 따라 임금 수준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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