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한복판, 한국의 도전 DNA가 불밝혔다

입력 2019.01.01 03:09

[세계로 뛰는 한국의 심장] [1]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에… 자금성보다 큰 석유화학공장, 현대엔지니어링이 세웠다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2014년 10월 종합 석유화학단지 건립을 위한 자재·시설물을 실은 배는 부산항을 출발해 인도양을 건너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뒤 지중해를 지나 흑해에 있는 터키 항만에 하적했다. 여기서 아제르바이잔까지 화물차로 운송된 자재들은 다시 배에 실려 카스피해를 건넜다.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항구에 닿는 데까지 50~70일, 2만㎞의 대장정이었다. 적막감만 흐르는 사막 한복판에 1만2000여 명의 근로자가 잠잘 조립식 막사가 지어졌다. 연일 40도를 넘어서는 혹서(酷暑)와 눈을 가리는 모래 폭풍과 싸우며 꼬박 47개월 만에 사막 한복판에 축구장 140개 규모(100만㎡)인 초대형 공장이 완성됐다. 2018년 9월 현대엔지니어링이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키얀리(Kiyanly)에 준공한 석유화학단지이다. 공사비만 3조3400억원(약 29억9000만달러)이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작년 9월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키얀리(Kiyanly) 사막 한가운데에 3조3400억원을 투입해 건설한 석유화학 공장이 밤에도 불을 밝힌 채 가동되고 있다.
축구장 140개 크기 거대한 공장 - 현대엔지니어링이 작년 9월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키얀리(Kiyanly) 사막 한가운데에 3조3400억원을 투입해 건설한 석유화학 공장이 밤에도 불을 밝힌 채 가동되고 있다. 중국 자금성의 1.5배 넓이인 이 공장에서는‘산업의 쌀’로 불리는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을 만들어낸다. /현대엔지니어링
지난달 18일 오전(현지 시각) 찾아간 키얀리 석유화학단지에선 쌀알 모양의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이 쉼없이 쏟아져 나와 포대에 담겼다.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원료인 PE와 PP는 흔히 '산업의 쌀'로 불린다. 카스피해 연안에서 뽑아낸 천연가스는 동쪽으로 곧게 뻗은 가스관을 따라 이곳 키얀리 단지에 도달한다. 천연가스는 높이 40m의 가스분리시설(GSU)에서 화학작용을 통해 메탄과 에탄·프로판·부탄으로 나뉜다. 에탄·프로판·부탄은 다시 에탄크래커(ECU)라 불리는 시설에서 액체 상태의 프로필렌, 기체 상태의 에틸렌으로 분리된다. 이를 쌀알 모양으로 고체화한 PE·PP는 공장과 연결된 철로를 통해 카스피해 항만으로 이동한다. 3개월 전 공장이 문을 연 후 현지 방송은 이틀에 한 번꼴로 키얀리의 생산 소식을 주요 뉴스로 전하고 있다. 준공식에 참석했던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땀방울로 불모지에 경제 초석을 닦았다"며 "현대엔지니어링에 무한한 신뢰와 찬사를 보낸다"며 이례적 극찬을 쏟아내기도 했다.

해외 시공 경험 없던 현대엔지니어링… 중동 대신 중앙아시아서 활로 모색

투르크메니스탄이 키얀리 단지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PE·PP가 천연가스 수출을 대체할 첫 석유화학 가공품이기 때문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4위의 자원 부국이지만, 대양(大洋)과 면하지 않은 사실상 내륙국이다.

키얀리의 종합 석유화학단지에서 생산된 폴리에틸렌(PE) 제품.
키얀리의 종합 석유화학단지에서 생산된 폴리에틸렌(PE) 제품. 플라스틱 제품의 원료로 쓰이는 쌀알 모양의 PE는‘산업의 쌀’로 불린다. /김충령 기자
파이프를 연결해 러시아·중국·이란 등에 천연가스를 팔아왔지만, 주 수입국인 러시아가 2014년 크림 사태 등으로 촉발된 서방과 갈등으로 천연가스 수입을 사실상 중단한 상황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직접 천연가스를 파는 대신 이를 부가가치가 높은 석유화학 제품으로 전환해 수출하려는 것이다. 발주처인 국영가스회사 투르크멘가스(TG)는 PE·PP 수출을 통해 연간 6억달러(약 6756억원)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관련 수출(52억6000만달러·2016년)의 10%가 넘는 수치다.

이렇게 큰 사업을 현대엔지니어링이 맡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투르크메니스탄에 처음 진출한 것은 2009년이다.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동부 마리(Mary) 지역에 13억달러(약 1조4500억원) 규모의 천연가스 탈황(脫黃) 시설을 지을 업체를 물색 중이었다. 중동 지역에서 수주가 원활하던 국내 건설사 대부분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해외 플랜트 시공에 처음 도전하던 현대엔지니어링에 투르크메니스탄은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 현대엔지니어링은 해외 플랜트 설계 경력만 있는 연매출 7500억원(2008년) 규모의 회사였다.

투르크메니스탄 수주 시작으로 현대엔지니어링 매출도 9배로

2010년 탈황 시설 공사에 착수한 현대엔지니어링은 공사 진행 과정에서도 다른 해외 건설 업체에 비해 월등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래 폭풍이 부는 날엔 공사 자체를 중단하는 영국·중국 업체와 달리 현대엔지니어링은 폭풍이 걷히길 기다렸다가 공사를 이어갔다. 당시 근무했던 한 직원은 "중국 업체 직원들은 현지인들을 상대로 사고를 일으켜 구설수에 오른 반면 우리는 지역의 학교·고아원을 찾아가 컴퓨터를 무상 제공하며 지역민들의 호감을 샀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키얀리에서 열린 종합 석유화학단지 준공식에서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왼쪽에서 둘째)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성상록(오른쪽 둘째) 현대엔지니어링 사장 등이 준공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지난해 10월 키얀리에서 열린 종합 석유화학단지 준공식에서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왼쪽에서 둘째)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성상록(오른쪽 둘째) 현대엔지니어링 사장 등이 준공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현대엔지니어링
이후 현대엔지니어링의 투르크메니스탄 사업엔 탄력이 붙었다. 2012년 투르크멘바시 정유 플랜트 현대화 사업(약 5140억원), 2013년 키얀리의 원유 처리 플랜트 확장 사업(약 2680억원)을 잇따라 수주했다. 지난 2015년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4조3500억원 규모의 가스액화처리시설(GTL), 1조500억원 규모의 플랜트 현대화 사업도 현대엔지니어링에 맡기기로 합의했다. 2009년 이후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 수주액은 약 454억8000만달러다. 이 중 22%인 100억8000만달러(전체공사 기준)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이뤄졌다. 같은 기간 현대엔지니어링의 매출도 7500억원에서 6조2600억원(2017년)으로 늘었다.

현지 기업 공사까지 지원하며 공기 완수… "한국 기업은 약속을 지킨다"

투르크메니스탄
키얀리 단지 현장 소장인 이용상 상무는 한국 기업이 현지에서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을 공기(工期) 완수로 꼽았다. 교통·물류 환경이 나쁜 투르크메니스탄은 건설용 자재·시설물 조달이 어렵고, 구소련 시절 관료주의 문화가 남아 있어 사업 진행을 위한 인허가 절차가 복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대형 건설 프로젝트는 여러 건설사가 사업 영역을 쪼개 각각 건설을 진행한다. 투르크멘가스 측 관계자는 "일본 기업만 해도 자신이 맡은 사업 부분 완수에만 집중하는데, 한국 기업은 자신이 맡은 부분과 연결된 현지 기업의 사업 속도까지 끌어올려 약속된 시간을 맞춘다"고 했다. 카스피해 연안에서 키얀리 단지로 이어지는 가스관 건설은 현지 기업이 맡았지만, 자재 구입에 난항을 겪어 공사가 지연되고 있었다. 키얀리 단지가 조기 완공되도 가스관 건립이 안 되면 준공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무는 "현대엔지니어링이 가스관 자재 구매를 대행해 현지 기업이 공사를 제때 마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이 플랜트 건설 사업을 통해 유명세를 얻으며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는 수도 아슈하바트의 모든 시내버스를 현대자동차 제품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준공을 마친 키얀리 종합 석유화학단지는 지난달 15일부터 투르크멘가스가 운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투르크멘가스는 향후 3년간 공장 관리·운영을 현대엔지니어링에 위탁한 상태다. 현대엔지니어링 측은 "이번 사업을 계기로 투르크메니스탄은 물론 중앙아시아 인접 국가로도 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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