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전쟁]③ 한진 침몰에 유럽 선사가 수익 독점 "강자만 산다"

입력 2018.12.17 06:00

"유럽에는 중간이 없어요. 작은 피더선(근거리 항해용 중소형 선박) 아니면 초대형 선박이에요."

지난 2일 새벽 현대상선(011200)컨테이너선 현대수프림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에서 출항했다. 배를 돌려 바다로 향하던 염철수 현대수프림호 선장은 터미널마다 접안해 작업하고 있는 배들을 보며 말했다.

네덜란드 마스(Maas)강을 따라 쭉 들어선 터미널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붙어 하역 작업이 한창이었다. 눈에 띄는 선박은 46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현대수프림호 크기의 절반도 안 되는 피더선 아니면 덩치가 2배는 돼 보이는 초대형 선박뿐이었다. 현대수프림호는 피더선도 초대형 선박도 아닌 어중간한 크기였다.

로테르담항에서 본 초대형 선박에는 ‘MAERSK LINE(덴마크 머스크)’, ‘MSC(스위스 MSC)’, ‘CHINA SHIPPING LINE(중국 COSCO)’, ‘EVERGREEN(대만 에버그린)’ 등 글로벌 선사들 영문명이 진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함부르크항으로 향하는 엘베강에서는 ‘Hapag-Lloyd(독일 하팍로이드)’ 선박과도 조우했다. 모두 1만TEU 이상급 초대형 선박이었다.


함부르크항에서 떠나고 있는 MSC 1만TEU급 컨테이너선 MSC ‘NITYA B’호 /조지원 기자
유럽은 글로벌 선사 간 해운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펼쳐지는 최전선이다. 전 세계 초대형 선박은 모두 유럽으로 몰려든다. 선사들은 1만8000TEU가 넘는 선박을 인도 받으면 유럽부터 집어넣는다. 현대상선도 2020년 2분기부터 2만3000TEU 12척을 유럽에 투입한다.

글로벌 선사 간 인수합병(M&A)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머스크, MSC 등 유럽계 선사들은 지금도 세계 해운업계 흐름을 주도하면서 세력을 불리고 있다. 중국 COSCO, 일본 ONE, 대만 에버그린, 현대상선 등 아시아계 선사들은 유럽 선사들과 합종연횡하며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다. 유럽에서 밀려나면 치열한 해운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선박 대형화에 M&A 주도…과점구조 형성해 이익 독식 노려

해운 불황의 원인으로 꼽히는 선박 대형화는 유럽에서 시작됐다. 머스크, MSC 등 유럽 선사들은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초대형 선박을 확보한 뒤 운임을 낮추는 전략을 펼쳤다. 다소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경쟁사를 없앰으로써 과점적 시장 구조를 만든 뒤 이익을 독차지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머스크는 2011년 대우조선해양에 세계 첫 1만8000TEU급 선박 20척을 한 번에 발주하면서 선박 대형화에 불을 붙였다. MSC, CMA‧CGM 등 다른 유럽 선사들도 잇따라 1만8000TEU 선박을 주문했다. 선박 대형화는 공급 과잉으로 이어졌지만, 초대형선 발주는 계속됐다. 글로벌 선사 간 ‘치킨게임(죽고살기식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해운 운임은 2016년 사상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 때 머스크마저 4300억원 규모의 적자를 냈다. 손실이 다소 발생했지만 머스크 작전은 성공했다. 세계 7위 한진해운이 2016년 8월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면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있는 MSC 법인,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함부르크 수드 본사·COSCO 유럽본부·하팍로이드 본사 /조지원 기자
유럽 선사들은 선박 대형화와 함께 인수합병(M&A)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초대형 선박을 쉴 새 없이 발주하면서 대형화 경쟁을 부추기던 머스크는 어느 샌가 선박 발주를 멈췄다. 그리고 세계를 횡으로 움직이는 동서항로에서 눈을 돌려 남미‧아프리카 등 남반구로 향하는 남북항로를 주목했다. 머스크는 남북항로에 강한 독일 함부르크수드를 인수하면서 1위 자리를 더욱 굳혔다.

머스크 말고도 프랑스 CMA‧CGM은 싱가포르 APL, 독일 하팍로이드는 쿠웨이트 UASC를 각각 인수했다. 중국 COSCO도 홍콩 OOCL을 인수하면서 M&A 행렬에 합류했다. 강한 선사는 약한 선사를 먹고 덩치를 키웠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업계를 지배했다.

결국 선복량(적재 용량) 20만TEU 이상을 보유하고 원양 서비스를 했던 글로벌 선사 수는 2016년 8월 18곳에서 현재 12곳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선복량 100만TEU가 넘는 초대형 선사는 4곳에서 7곳으로 늘었다. 일부 선사의 과점적 시장 구조가 현실화되고 있다. 100만TEU가 넘는 선사들은 얼라이언스(해운 동맹)를 맺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8년 12월 기준 글로벌 선사 순위 /알파라이너 자료
◇ 다음 이슈는 환경 규제…여전한 주도권 싸움

유럽 현지에서는 2016년 한진해운 사태를 전후로 숨 가쁘게 진행됐던 선사 간 이합집산이 어느 정도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때 프랑스 CMA‧CGM과 독일 하팍로이드 간 합병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지금은 잠잠해졌다. 이제는 선박 대형화, M&A가 아닌 환경 규제를 주목하고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20년부터 황산화물(SOx) 배출 규제를 시작한다. 선사들은 오염물질을 줄여주는 스크러버를 설치하거나 기존 연료유보다 50% 가량 비싼 저유황유를 써야 한다. LNG(액화천연가스)를 연료로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세 가지 방법 모두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

머스크는 이번에도 유가 변동에 따라 할증료를 받는 새로운 운임 체계를 발표하면서 한 발 먼저 나갔다. 내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유류할증료 체계를 도입하기로 했다. MSC, CMA‧CGM도 환경규제로 인한 추가 부담을 완화할 방법을 찾고 있다.

현대상선은 2만3000TEU급 선박 12척, 1만5000TEU급 선박 8척 등 초대형 친환경 선박 20척을 발주하면서 글로벌 선사 간 경쟁에 뛰어들었다. 선박 대형화는 뒤쳐졌지만, 스크러버 설치로 환경 규제 대응에는 한 발 빨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운업계에서는 환경 규제가 판도를 뒤흔들 변수가 될지, 유럽 상위권 선사들이 다른 선사와의 격차를 더 벌리는 계기가 될지 주목하고 있다.

최덕림 현대상선 독일법인장은 "현대상선을 단순한 한국 회사가 아니라 글로벌 선사들과 경쟁하는 글로벌 회사로 취급해야 한다"며 "유럽 각국이 해운사를 어떻게 지원하는지, 특히 머스크가 어떤 전략을 펼치는지 등을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핫뉴스 BEST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