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1시 경기도 파주시 올랜드아울렛. 500㎡(약 150평) 크기의 리퍼브(refurb) 가전제품관에는 김치냉장고·TV·청소기 등을 둘러보고 있는 100여명의 고객들로 북적거렸다. 인천에서 온 김상철(58)씨는 "내년 초 결혼하는 딸의 혼수용품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다이슨 공기청정기를 정가(定價)에서 45% 할인된 49만원에 구매했다. 김남중(31) 올랜드아울렛 관리팀장은 "이사를 앞둔 가족들부터 예비 신혼부부들까지 전국 곳곳에서 찾아온다"며 "올해 예상 매출은 765억원으로 작년보다 20% 이상 성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경기 불황이 심화되는 가운데 전국 리퍼브 매장들이 뜨고 있다. 리퍼브 매장은 고객의 단순 변심으로 반품된 제품, 또는 매장에서 전시용으로 쓰이며 미세한 흠집이 생긴 제품들을 가져와 판매하는 곳이다. 취급하는 제품도 삼성전자·LG전자의 TV부터 한샘의 책장, 대유위니아의 김치냉장고 등 다양하다. 리퍼브 제품 인기에 힘입어 지난해 100여개였던 리퍼브 오프라인 전문점은 올해 300여개로 늘어났다. 업계에서는 올해 리퍼브 시장 규모가 지난해 대비 약 30% 성장한 10조원 수준으로 추산한다.

◇'불경기'의 거울인 리퍼브 시장

리퍼브 시장은 전통적으로 불경기에 호황을 누리는 업종이다.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이 늘어나고,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이 사용하던 제품들을 헐값에 내놓는 경우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경기도 용인시에서 리퍼브 가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SI퍼니처는 지난달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배 이상 성장한 2억7000만원을 기록했다. 방문객들은 이 매장에서 이탈리아 소가죽으로 만든 리클라이너(안락의자)를 정가 300만원에서 60% 할인된 119만원에 살 수 있다. 요즘 신혼부부 사이에서 인기인 정가 110만원짜리 4인용 세라믹테이블·의자 세트도 54만8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박상일 SI퍼니처 사장은 "판로를 찾지 못한 신제품 재고품이 덤핑 가격에 리퍼브 매장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다"며 "사실상 신제품을 반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2일 경기도 파주시 올랜드아울렛 리퍼브 가전매장에서 손님들이 세탁기와 건조기, TV를 살펴보고 있다. 올랜드아울렛 관계자는 “가전·가구·생활용품을 싼값에 살 수 있어 지갑이 얇아진 고객들이 전국에서 찾아온다”고 했다.

온라인 리퍼브 쇼핑몰인 이유몰은 올 9월 부도난 화장품 수입 업체로부터 5t 트럭 5대 분량의 마스크팩·스킨·로션 등을 받아와 최대 99% 세일 가격에 판매했다. 이유몰 관계자는 "홈쇼핑에서 5만원에 팔던 영양크림을 95% 세일해 2500원에 팔고, 1000원짜리 마스크팩을 99원에 판매하다 보니 두 달도 안 돼 확보한 물량이 동났다"며 "파격적인 가격으로 소문을 타며 회원 수가 지난해 대비 50% 늘어났다"고 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화장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리퍼브몰들은 특히 젊은 1인 가구 사이에서 인기다. 떠리몰·임박몰과 같은 온라인 리퍼브 쇼핑몰을 자주 사용하는 회사원 김유진(31)씨는 "유통기한을 1주일 앞둔 식재료라도 가격이 50% 이상 저렴하면 안 살 이유가 없다"며 "고기·즉석식품·과자 등 대부분 식품류를 리퍼브 쇼핑몰에서 산다"고 했다. 리퍼브 의류를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리퍼브 의류 전문 매장인 킴스무역은 30만원짜리 고급 코트를 3만원에 팔고, 10만원짜리 원피스는 1만~2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킴스무역 박흥식 사장은 "요즘은 폐업을 앞두고 창고에 쌓인 재고를 가져가 달라는 업체가 많아 새 옷들이 싼 가격에 나온다"고 말했다.

"이게 정상인가…잘 되도 걱정"

전체 리퍼브 시장이 호황인 가운데 컴퓨터·노트북·프린터와 같은 전자기기만은 매물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기업들이 낡은 전자제품을 신제품으로 교체할 때 대량의 매물들이 리퍼브 시장으로 유입되는데, 불경기에 전자제품의 평균 사용 기간이 늘어나며 시장에 나오는 매물도 줄어든 것이다. 온라인 전자기기 리퍼브몰 전시몰 관계자는 "지난해 기업에서 매입한 물품은 330억원 규모였는데, 올해는 220억 규모로 대폭 줄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일반 가구·의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불경기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리퍼브 시장이 호황을 이루고 있지만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경우 리퍼브 시장도 똑같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부도 업체가 많아지면 쏟아지는 매물들을 리퍼브 매장들도 감당하지 못하고 주머니가 가벼워진 소비자들도 장기적으로는 아무리 싼 물건도 덜 사게 된다는 것이다. 변상범 반품마트 사장은 "당장은 호황으로 보일지 몰라도 정상은 아니다"라며 "경기 상황이 계속해서 나빠지면 우리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리퍼브(refurb) 제품

'새로 꾸민다'는 뜻의 'refurbish'를 줄인 말이다. 매장에서 전시용으로 사용됐던 제품, 반품 제품, 이월상품,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이 리퍼브에 해당한다. 리퍼브 전문 매장들은 이런 B급 제품들을 새로 포장해 신제품보다 평균 40~50% 싸게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