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봉 2배 걸고 한국 IT인재 사냥

입력 2018.11.07 03:07

5년 근속·체재비 등 파격조건… 삼성·SK 핵심임원 잇단 영입
中기업, 한국인재 50명 데려가 2년 만에 D램 반도체 생산 성공

삼성전자에서 메모리 반도체 설계를 담당했던 A 전(前) 상무는 지난여름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 허페이창신(合肥长鑫)으로 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전 상무는 2000년대 D램 반도체의 나노미터(nano·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설계를 담당했고, 2010년대 초 40대의 나이에 상무로 발탁 승진한 핵심 인력이다. A 전 상무는 작년 말 삼성SDI로 발령나면서 마케팅 담당으로 가자 수개월 만에 일신상의 이유로 돌연 사직서를 제출했다. 삼성 관계자는 "중국 반도체 기업으로 전직했다는 소식만 들었다"면서 "정확한 기술 유출 정황이 없는 만큼 법적 대응까지는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테크(tech) 분야의 핵심 인력을 빼가기 위한 중국 업체들의 시도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단숨에 기술 격차를 좁히기 위해 무차별적인 '인재 사냥'에 나선 것이다. 삼성의 A 전 상무가 옮겨간 허페이창신은 중국 허페이시(市)가 자본금을 댄 국영기업으로 칭화유니·푸젠진화와 함께 중국 정부의 반도체 굴기(崛起)를 이끄는 선두 기업이다. 허페이창신은 지난 7월부터 D램 반도체의 시제품 생산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중국 충칭에 있는 국영 디스플레이 기업 BOE 공장에서 안전복을 착용한 근로자들이 자동화 설비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BOE는 지난해 LCD 시장에서 1위에 올랐다.
중국 충칭에 있는 국영 디스플레이 기업 BOE 공장에서 안전복을 착용한 근로자들이 자동화 설비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BOE는 지난해 LCD 시장에서 1위에 올랐다. /블룸버그
허페이창신이 지난 2년간 빼간 한국 핵심 인재는 50여명으로 추정된다. SK하이닉스에서 D램 제조그룹장을 역임한 B 상무도 지난 2016년 허페이창신 설립 초창기에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핵심 인력 50명만 있으면 D램 제조 공정 구축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면서 "반도체 장비를 어떤 제품을 쓰는지만 알아도 공정 전체의 그림을 쉽게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업체들은 국내 반도체 기업 퇴직자를 브로커로 활용해 영입 리스트를 만들고 연봉 2배, 5년간 근속 보장, 차량·체재비 지원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한국 기술 인력을 빼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8월 삼성디스플레이에서 휘어지는 OLED(유기 발광 다이오드) 화면 제조를 맡았던 한 부장급 엔지니어가 중국 기업으로 이직을 시도했다. 그는 국내 한 선박 업체에 취업했다는 채용 통지서를 들고 와 2년간 동종(同種) 업계 경쟁사에 취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퇴직했다. 그런데 그는 퇴사 다음 달 선박 회사가 아닌 중국의 LCD(액정 표시 장치) 생산 업체인 청두중광전과기유한공사(COE)와 근로계약을 맺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회사는 서약서상 전직(轉職) 금지 대상이었던 중국 국영 디스플레이 업체 BOE에서 불과 650m 떨어진 곳에 있는 협력업체였다. BOE는 현재 세계 1위 LCD 기업으로 삼성·LG디스플레이가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OLED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외국인 취업 허가를 받고자 중국 정부에 낸 건강 상태 증명 서류에는 회사 연락처로 BOE 직원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원래 취업했다는 선박 회사가 작년 4월 개업했다가 9개월 만인 올 1월 폐업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삼성은 뒤늦게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수원지법에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승소했다. 삼성 관계자는 "해당 엔지니어가 이력을 세탁하려고 중국 브로커와 짜고 유령 업체까지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中 넘어가도 대부분 토사구팽

중국은 디스플레이뿐만 아니라 반도체 분야 핵심 인력도 노골적으로 빼 가고 있다. 국가 차원의 반도체 굴기(崛起)에 나선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들로서는 세계 1·2위인 삼성과 SK하이닉스에서 앞선 기술과 공정을 경험한 인재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인재 영입에 가장 적극적인 허페이창신은 중국 허페이시(市)가 자본금을 댄 국영기업으로 칭화유니·푸젠진화와 함께 중국 3대 반도체 기업으로 꼽힌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헤드헌터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본사 앞까지 찾아와 집요하게 이직을 설득할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인재 빼 가기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 건너간 한국 인력 상당수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들 중 중국 스마트폰·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의 고위직에 오른 사례는 전무(全無)하다. 삼성 출신의 사장급 전직 임원은 "중국은 필요한 제조 공정에 맞게 핀포인트 식으로 정확하게 인력을 찍어서 데려가고 해당 기술 확보가 끝나면 아예 업무를 안 주고 팽(烹)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낸드 반도체를 개발하는 중국 칭화유니는 초기 연구·개발(R&D) 단계에 삼성 출신 엔지니어를 다수 참여시켰지만 지금은 대부분 현업에서 배제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데려갈 때는 '3년 보장+2년 연장'으로 5년 계약 조건을 내걸지만 실제 연구·개발에 참여하는 기간은 1년 미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술 관련 지식만 확보하면 이후에는 관계사나 연구·개발과 무관한 부서로 전출시켜 버린다. 이 전직 임원은 "중국말을 못하는 한국인 연구 인력은 처음부터 역할이 크게 한정돼 있다"며 "칭화대 출신과 해외 유학파 중국인, 대만 출신 등이 장악한 중국 기술 기업에서 한국 인력의 승진 기회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인재 유출 막기 어려워… 유인책 필요

핵심 기술 인력이 속속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국내 업체들은 일부 노골적 사례에만 상징적으로 대응할 뿐 대부분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퇴직자들의 이직 현황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운 데다 '2년 전직 금지 약정'을 앞세워 소송을 해도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패소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법원은 해당 기술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를 비롯해 퇴직자의 지위와 경력, 퇴직 경위, 별도의 대가 지급 여부 등을 꼼꼼히 따진다.

IT(정보 기술) 업계에서는 핵심 기술 인력이 중국행(行)을 택하는 대신 국내에서 계속 일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안기현 상무는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장비·소재 산업을 집중적으로 키워 대기업 퇴직자가 중소기업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인력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 공대 황철성 교수는 "반도체는 경쟁사보다 반년만 기술이 앞서 있어도 시장의 90%를 차지할 수 있다"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가 우수한 신진 인력을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연구·개발 지원 등 다양한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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