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남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왼쪽)이 직원과 함께 입체패턴 디자인 방식으로 여성용 스포츠 댄스웨어를 제작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춤(댄스)은 꽤 오랫동안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춤은 가정파탄의 원인으로, 추는 곳은 타락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춤바람으로 파탄난 가정이 속출했고, ‘자유부인’ ‘제비족' 등 춤과 관련된 부정적인 단어가 시대별로 등장했다.

하지만 춤은 서서히 과거의 나쁜 이미지를 지우고 스포츠로 변신했다. 2013년 인기를 끌었던 연예 프로그램 ‘댄싱위드스타’는 춤의 이미지를 건전한 여가생활로 끌어올렸다. 많은 사람이 프로 댄서와 연예인의 격정적이면서도 현란한 몸짓과 한치 어긋남 없는 조화에 매료됐다. 나이 지근한 중년과 노년 부부들의 취미이자 젊은 이들의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댄스가 건전한 스포츠로 자리를 잡으면서 의상과 용품 시장도 커졌다. 한국 댄스 의상과 용품 시장은 2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이 시장에서 주목받는 가장 기업은 장일남 명장이 설립한 기업 ‘J그룹’이다. 국내 1위다. J그룹은 현재 댄싱 스포츠웨어 브랜드로 출발해 관련 용품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남대문 근처에서 ‘댄스 의상 제작의 달인’ 장일남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을 만났다.

그의 부띠끄는 검정색의 고혹적인 드레스를 비롯해 화려한 수정으로 장식된 의상 등 수백 벌의 춤 옷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아주 작은 빛마저 수백 배로 키워주는 ‘반짝이’ 의상을 고르는 나이 지긋한 중장년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장 명장은 "대회 출전을 앞둔 스포츠 댄스 선수라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고 했다.

장일남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은 매년 스포츠 댄싱웨어를 주제로 한 패션쇼를 개최한다.

스포츠 댄서들이 장일남패턴연구소를 찾는 이유는.

"‘입체패턴’을 적용해 디자인이 뛰어나다. 착용감도 일반 경기복에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다. 입체패턴은 마네킹이나 피팅모델의 몸에 대고 패턴을 만드는 방법이다. 옷감을 평면에 그려서 패턴을 만드는 평면 재단과는 다르다.

입체패턴은 선수의 체형에 맞춰 같은 디자인이라도 다양하게 변형이 가능하다. 몸의 움직임도 자유롭다. 부드러운 선도 연출할 수 있다. 패션 선진국인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입체 패턴이 일반적이지만 손이 많이 가고, 고난도 기술을 필요로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기피하는 방법이다."

어렸을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나.

"전남 고흥에서 살림에 나름 여유가 있던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교복을 맞출 때 남들과 똑같은 일자 바지가 싫어 부모님 몰래 교복을 맞춘 의상실에 찾아가 유행하던 나팔바지(바지 밑단의 통이 넓은 바지)로 고쳐달라고 했다. 나팔바지 덕분인지 당시 인근 여중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웃음)

부모님은 맏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보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공부보다 패션에 관심이 더 많았다. 결국 고등학교 때부터 패션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패션 전문학교가 없던 때였다."

여성복을 만드는 남성 디자이너가 많지 않았을 때 아닌가.

"우중충한 색상의 남성 양복보다 세련되고 다양한 변용이 가능한 여성복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화여대 근처 이사벨라라는 의상실에 취직했다. 실무를 배우는 게 너무 즐거웠다.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을 정도다. 이후 여러 의상실에서 조수로 생활했다. 7년쯤 일하자 실력을 인정받았고, 당시 패션업계에서 유명세를 탄 박윤수 의상실에서 패턴 실장을 맡았다. 이곳에서 8년간을 근무하며 여성복을 만든 뒤 독립했다."

독립해서도 여성복을 만들었나.

"홍대 근처에 ‘베틀’이라는 의상실을 열었다. 당시에는 생소한 파티복을 전문으로 만들었다. 미스코리아 염정아씨와 패션 모델 박영선씨가 내 작품을 입었다. 소문이 나면서 다른 의상실에서도 파티복 주문을 받으면 나한테 의뢰했다. 이 때 평생의 반려자인 집사람도 만났다."

서울로 유학을 보낸 부모님의 기대가 컸을 텐데.

"부모님이 처음에는 패션 일을 하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여자들이 주로 하는 의상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실망이 크셨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름 패션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를 들으셨는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내 결정이 옳았다.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해 좋은 직장에 취직했던 친구들은 지금은 모두 현업에서 은퇴했다. 친구들 중 아직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2009년 대한민국 패션디자인 명장이 됐을 때 부모님이 보셨으면 좋았을텐데. 못내 아쉽다."

스포츠 댄스복을 만들게 된 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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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터지자 패션 경기도 꼬꾸라졌다. 생존을 위해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우연찮게 사교 댄스를 알게 됐고 음지에 있던 댄스 문화가 양지에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다. 이후 매년 사교 댄스의 성지로 불리는 영국 블랙펄을 찾아 의상을 연구했다.

수영복처럼 신축성 있는 소재로 옷을 만들면 활동하기 편하고, 춤 출 때도 예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수영복 소재로 댄스 스포츠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에는 댄스 의상 제작법을 아는 사람이 없어 독학으로 공부했다.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의상으로 연구해 경기용 댄스 의상을 제작했다. 당시 매일 3~4 시간밖에 잠을 못잤다. 그래도 행복했다.

예상대로 스포츠 댄스가 음지를 벗어나 주목받는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화려한 드레스를 디자인한 경험 덕분인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해졌다. 지금은 스포츠 댄싱웨어 분야에서 국내 최고 브랜드라고 자부한다."

한국에서 댄스를 즐기는 인구가 많은가.

"350만명쯤으로 추산된다. 전국에서 매주 3~4회의 댄스대회가 열린다. 전국 읍·면 단위까지 댄스 강좌가 열리고, 동호회도 만들어졌다. 관심을 가지고 보면 주변에 스포츠 댄스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관련 시장도 커지고 있다. 현재 국내 댄스 의류와 용품 시장은 2000억원 정도 규모다. 앞으로 시장이 더 커질 것이다."

만든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처음 만든 댄스 복이 생각난다. 흰색 바탕에 승천하는 용이 수놓인 경기복이었다. 그 옷을 입고 출전한 선수들이 국내 대회 프로 챔피언에 올랐다. 최근 독일 GOC(German Open Championship) 대회에서 10강에 든 김기환·박애랑 선수가 입은 의상도 기억에 남는다."

장일남 대표가 만든 스포츠 댄싱웨어를 입고 춤을 추는 전문 댄서들. /장일남패턴연구소 제공
선수들에게 의상 후원도 하나.

"김기환·박예랑·명진우·정유선·김현중·조함인·서황용·정아라·이재현·서수진 선수에게 의상을 지원한다. 대회에 출전하려면 의상이 여러 벌 있어야 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아끼는 선수가 세계적인 위치에 오르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즐겁기만 하다. 우리 부띠끄에서 만든 옷이 주목을 받으니 브랜드 이미지가 높아지고 판매에도 도움이 된다."

가격은 어느 정도인가.

"선수들이 대회에 출전할 때 입는 화려한 반짝이 의상은 한벌에 500만원쯤 한다. 신축성이 좋으면서도 찰랑찰랑 해야 하기 때문에 옷감이 비싸다. 옷에 붙이는 스와로브스키 보석 값도 무시 못한다."

평소 댄스를 즐기는지?

"직접 춤을 추는 사람이 댄스복을 만들면 아무래도 좀 더 편안한 옷을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댄스 스포츠를 배웠다. 춤을 즐기다 보니 현재 실력은 중상급쯤 된다."
패션쇼도 매년 개최한다던데.

"댄스 스포츠 웨어를 알리기 위해 2009년 국내 최초로 댄스 스포츠웨어 패션쇼 ‘장일남 콜렉션’을 열었다. 올해는 국내 댄스스포츠 동호인을 위한 제1회 전국 댄스스포츠 마니아 및 동호인 댄스 스포츠 대회를 함께 열었다.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외교관을 비롯해 모두 700여명이 왔다. 사업가와 선수 등 초대된 사람들이 모델로 나서 런웨이를 걷고 스포츠 댄스를 췄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댄스를 즐기는 이들의 축제였다."

장일남패텬연구소에서 만든 다양한 댄스스포츠웨어.

앞으로 만들고 싶은 옷은.

"오래 전 얘기지만 고액 연봉에 자동차·아파트까지 주는 파격적인 조건의 스카우트 제의가 왔을 때도 거절했다. 그때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지금 경제적으로 더 윤택한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패션에 대한 열정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한 이유는 잘 팔리는 옷’보다 ‘만들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 가장 어려운 때가 있다면.

"지금이 가장 어렵다. 최저임금이 갑자기 올라 IMF 때보다 더 어렵다. 기술을 배우러 온 생초보들에게도 적지 않은 돈을 줘야 한다. 일감이 몰리면 야근도 해야 하는데 최저임금이 오르면서 시간외 근무수당도 무시 못할 부담이다.

초보에게 월급을 많이 주면 고참들 임금도 올려줘야 한다. 임금을 올려주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올려줘야 하니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 부띠크는 회사가 매입한 건물이어서 임대료가 없다. 손실이 나도 어느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곳이 많다. 아는 의상실 여러 곳이 인건비 때문에 문을 닫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문을 닫는 의상실이 정말 많아질 것이다.

정부가 하루 빨리 업종별로 최저임금을 차등하는 등의 대안을 마련해 줬으면 한다."

무한 생존경쟁에 내몰린 젊은이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생존 경쟁이 극심해지면서 순수한 열정을 간직하기가 힘든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런데 돈을 버는 이유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돈 때문에 원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목표를 한번 정하면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털고 일어나면 길이 있다. 잠시 주춤하더라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장일남 대한민국 명장이 후원하는 스포츠대스 선수들이 기념사진을 촬용하고 있다.

스포츠 댄스 웨어 분야의 일인자다. 기술도 전수하는가.

"각종 교육과 스폰서 역할을 통해 인재개발과 양성에 기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직업전문학교, 대학, 대학교와 협약을 맺고 현장실습과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