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 지시다, 단기 일자리 빨리 만들어라"

입력 2018.10.12 03:07

기재부, 공공기관 총동원… 2개월~1년짜리 3만개 대책 내주 발표
수차례 독촉 공문 발송, 예정에 없던 사업 집행하도록 예비비 투입

문재인 정부가 공공기관은 물론 각 부처, 외청(外廳)들까지 압박해 적어도 3만개 안팎의 단기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일자리 대책을 추진 중이다. 범(汎)정부적인 단기 일자리 만들기는 1998년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같은 대형 외부 충격이 닥쳤을 때나 정부가 꺼내 들던 카드다.

11일 청와대,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산업부 등 관계 당국에 따르면, 정부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일자리 대책을 최종 조율하고 이르면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국제통화기금(IMF) 총회를 마치고 귀국하는 다음 주에 발표할 계획이다.

정부 내 사정에 밝은 복수의 관계자는 "고용 기간이 2개월~1년인 단기 일자리를 2만~3만개 이상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골자"라고 했다. 하반기 이후 취업자 증가 수치가 급격히 줄어드는 '일자리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쥐어짜기도 불사하겠다는 얘기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가용 수단을 총동원해 일자리 물량을 늘리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공공기관들을 대상으로 단기 일자리 확대를 압박했다는 야당과 언론의 지적에 "지난달 채용 계획을 묻는 일종의 '수요 조사'를 했을 뿐"이라고 해명해왔다. 그러나 본지 취재 결과 기재부가 두 차례나 공공기관 인사 담당자들을 불러 "(청와대가) 단기 일자리 조사를 지시했다"거나 "체험형 인턴 추가 채용 계획을 적극 제출해 달라"며 압박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부 전체가 동원돼 만들어낼 단기 일자리 규모는 2만~3만개 정도로 추정된다. 올해 연말과 내년 상반기에 걸쳐 이 정도 숫자의 공공 일자리가 늘어나면 취업자 증가 수치가 마이너스까지 악화되는 사태를 방어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정부 관계자는 "김동연 부총리 의지가 강하지만 12일 발표될 고용 통계 내용에 따라 일자리 대책의 강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예산 당국은 단기 일자리 창출을 위해 각 부처가 예정에 없던 사업을 집행하도록 예비비를 나눠주고, 대규모 재정 사업에 필요한 예비 타당성 조사를 간소화하는 실행 방안 검토도 거의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업무 외부 위탁 등의 사업은 부처별 사정에 따라 속도를 조절한다"며 "이런 것들만 조금 당겨도 (추가 고용) 효과가 바로 나온다"고 했다.

최근 공공기관들이 앞다퉈 '체험형 청년 인턴' 채용 공고를 내고 있는 배경에는 청와대와 기획재정부의 강력한 압박이 작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체험형 청년 인턴은 공공기관이 정규직 채용 의무 없이 '직장 체험 기회'만 제공하는 제도다.

◇공공기관 대상 '일자리 쥐어짜기'

본지가 11일 국회 민경욱 의원(자유한국당)을 통해 입수한 정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17일과 이달 4일 두 차례에 걸쳐 주요 공공기관 인사담당 임원들을 불러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 관련 간담회'를 열고 각 기관의 체험형 인턴 채용 수요를 점검하고 채용 확대를 독려했다. 특히 4일 간담회에서는 체험형 인턴 채용 확대 실적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계량·비(非)계량 항목 점수에 모두 반영하고, 인턴 채용 실적에 대해 별도 시상(施賞)도 하기로 했다. 기재부는 간담회 당일 오후 5시에 각 공공기관에 이메일을 보내 간담회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해 체험형 인턴 추가 채용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출해 주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 결과는 임직원 성과급 지급은 물론 CEO(최고경영자) 연임 여부 결정에 활용된다. 한 공공기관 임원은 "'체험형 인턴을 안 늘리면 CEO를 자르겠다'고 한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기획재정부가 공기업, 공공기관에 보낸 문건

체험형 청년 인턴 등 단기 일자리 채용 실적 파악 등의 과정에는 청와대가 직접 개입한 사실도 확인됐다. 기재부는 지난달 14일부터 공공기관들에 최소 7차례 단기 일자리 관련 이메일을 발송했다. 첫 이메일의 제목이 '〈BH(청와대)요청〉 공공기관 단기 일자리 확대 관련 간담회 참석 요청'이다. "사안의 긴급성 및 중요도를 감안해 임원이 참석 대상"이라고 했다.

이어진 9월 27일 이메일에서는 'BH에서 자료 보완을 요구함에 따라 부득이 추가조사를 요청드리고자 한다'며 작년과 올해의 1~8월 단기 일자리 현황을 요구했다. 하루 뒤에는 '(BH가) 2년 전체 기간을 재조사할 것을 지시하여 부득이 재공지를 드린다'며 '보고 일정이 급박하여 하루밖에 (시간을) 더 드리지 못한다'고 했다. 민경욱 의원은 "체험형 청년 인턴은 실제 취업과는 무관한 단순 '직장 체험 이벤트'에 불과한데, 청와대와 정부가 청년들의 절박한 처지를 악용해 고용지표 부풀리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절박한 상황 이해되지만…"

외부 요인에 따른 경제 위기라는 명분도 없는데 정부가 비상 카드를 뽑아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위기의식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이번에 정부가 만들어낼 일자리는 고용 기간이 1년에 못 미치는 임시직이나 인턴이 대부분이다. 업무도 일시적이거나 기존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이라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도 낮다. 단기 일자리를 잡은 청년이 받는 임금은 한 달 200만원 안팎으로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정도다. 게다가 대부분의 외청과 정부 산하기관, 공공기관들이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수도권에 사는 청년은 지방으로 내려가 일해야 한다. 고용 기간이 끝나면 취업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소지가 많다.

경제 전문가들은 "일자리 상황이 절박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도 "일자리 위기가 우리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와 최저임금 등 정책 실패에 따른 것인데도 이에 대한 대책은 안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정규직 취업 희망이 없는 수개월짜리 단기 일자리는 청년들에게 경력 개발의 기회를 주기도 어렵고, 숫자 채우기로 비칠 수 있다"며 "단기 일자리라도 직업 교육과 연계 취업으로 연결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민간에서 줄어든 일자리를 정부가 채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미봉책"이라며 "일자리 위기의 원인은 그대로 두고 엉뚱한 처방을 가져다 쓰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내년 이후 경기가 추가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은데 무리한 단기 대책이 필요한지 의문을 표시하는 의견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 경제가 더 어려워질 텐데 벌써 비상수단을 총동원해 일자리 위기를 막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라며 "정부가 최저임금 정책 수정과 제조업 부진, 인구 감소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법부터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공공기관 청년인턴 제도

청년 일자리를 제공하고 취업역량 강화를 위한 제도로, ‘체험형’과 ‘채용형’이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체험형은 정규직으로 채용할 의무가 없는 반면 ‘채용형’은 70% 이상을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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