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홍콩 진출 앞둔 은행장의 감탄사

입력 2018.10.11 06:00

"최근 홍콩 진출을 타진해보니 그곳은 해외 금융사에 대한 자본규제가 매우 약하더군요. 믿기지 않지만 금융감독원 같은 금융당국조차 사실상 없었습니다." 오는 2020년 3월까지 홍콩 현지 지점을 개설하겠다고 밝힌 한 은행장이 사석에서 내뱉은 일종의 감탄사다. 홍콩에는 ‘홍콩금융관리국(HKMA)’이 있지만 실제 이곳은 기준금리 조정 등 중앙은행 역할을 함께 한다.

지난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서울을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 3대 금융허브’로 키우겠다는 목표로 ‘동북아 금융허브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유수의 글로벌 금융회사들을 국내로 끌어들여 금융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현재 금융허브라는 단어는 한국에서는 사어(死語)가 된 듯 낮설다.

실제 금융허브(금융중심지) 조성사업의 성적표는 지극히 초라하다. 현재 서울의 금융중심지 경쟁력은 싱가포르, 홍콩과 비교하면 언급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과거 금융 후진국으로 여겨졌던 중국보다도 뒤쳐졌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정부의 금융 홀대가 여전한데 서울과 부산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키운다는 계획은 현실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는 "규제의 벽이 낮아지기는 커녕 날로 높아지는데 어느 금융사가 한국에 진출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영국계 리서치 기관인 지옌(Z/Yen)그룹이 지난달 발표한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중심지 경쟁력 순위(GFCI·Global Financial Centers Index)에서 한국의 현실은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은 평가 대상 100개 도시 중 33위에 머물렀다. 이는 정권교체 전인 2016년 9월(14위)에 비해 무려 19계단이나 낮아진 순위다.

GFCI는 해당 국가의 사업환경(business environment), 금융발전(financial sector development), 관련 인프라(infrastructure factors), 인적자본(human capital) 등 다양한 요소를 평가한 후 전문가 설문을 거쳐 매년 3월과 9월에 발표된다. 이 지표는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중심지 경쟁력을 평가할 때 쓰인다. 금융위원회도 이 지표를 정책에 참조한다.

중국의 경우 상하이(5위), 베이징(8위), 선전(12위) 3곳의 도시가 일제히 서울을 크게 앞질렀다. 홍콩과 싱가포르는 각각 3, 4위로 미국 뉴욕(1위)과 영국 런던(2위)의 뒤를 이었다. 서울은 ‘홍콩과 싱가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커녕 중국 칭다오(31위)에도 뒤쳐졌다. 정부가 서울과 함께 금융중심지 후보로 지정한 부산은 44위를 기록했다. 이는 유럽의 소국 모나코(46위)와 비슷한 수준이다.

정부는 실효성을 높인다며 2008년 관련 법을 제정한 후 3년마다 수정된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 2012년 서울 여의도에 국제금융센터(IFC)가 생겼다. 부산 문현동에도 국제금융센터가 들어섰다. 그러나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중 규모가 가장 큰 3동은 지난해 입주율이 3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IFC설립 당시 정부 목표는 세계 50대 자산운용사 지역본부를 유치히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온 자산운용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반대로 일부 유럽계 금융사들은 짐을 싸서 한국에서 탈출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에서는 무리한 논의까지 진행되고 있다. 여당은 금융공기업의 지방이전 방침을 거두지 않고있다. 서울에 본사를 둔 금융공기업을 문재인 정부의 지방공약인 ‘제3의 금융도시 구상’에 따라 이전하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전북혁신도시를 서울과 부산에 이어 제3의 금융도시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 서울과 부산으로 갈라진 금융허브 정책이 실패했는데도 추가로 도시를 지정한다고 갑자기 잘 될리가 만무하다. 기존 중심지조차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고 있는 판국에 하나를 더 만들겠다는 것은 표만 생각하는 정치적인 발상이다.

금융공기업 상당수가 지방 혁신도시로 이전하지 않고 서울에 남겨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은 기업금융 수요 대부분이 서울에 몰려 있다. 무역보험공사와 예금보험공사 등의 잔류배경도 마찬가지다.

사이먼 쿠퍼 전 HSBC은행장은 한국에서 개인금융사업을 철수하기 전 "금융허브 서울의 성공 열쇠는 개방성에 있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금융허브는 절대로 저절로 육성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을 거쳐 물적·인적자본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형성된다. 뉴욕과 런던·홍콩 등이 대표적이다. 금융 역사가 짧다면 중국처럼 과감한 규제혁파가 필수적이다. 안타깝지만 현 정부에서도 한반도 금융허브는 달성 불가능한 과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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