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최근 해외의 차량 공유 업체에 연이어 투자하고 있다. 지난 1월 동남아 차량 공유 업체 '그랩'에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7월에는 호주의 카넥스트도어, 지난달에는 인도 차량 공유 업체 '레브'에 투자했다. 11일에도 미국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미고'(Migo)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국내에서는 현대자동차의 차량 공유 사업 투자가 한 건도 없다. 이 회사는 지난해 8월 카풀(차량 동승) 서비스 업체 '럭시'에 50억원을 투자했지만 택시 업계 반발과 카풀 운행 규제에 부딪혀 지난 2월 이 지분을 모두 매각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출퇴근 시간에만 카풀을 할 수 있도록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 서비스 확산이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 최대 차량 공유 업체 우버마저 2013년 국내에서 서비스를 출시했다가 엄격한 국내 규제를 견디지 못하고 2년 만에 철수했었다.
◇차량 공유·블록체인… 신기술마다 규제에 묶여
현재 글로벌 업체들이 차량 공유, 블록체인 등 신기술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며 신규 사업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사업화 시기를 놓치고 있다. 카카오의 택시 호출 자회사 카카오모빌리티가 최근 일본 택시 호출 서비스 '재팬 택시'와 제휴해 일본에 진출한 것도 국내 규제 때문이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올해 초 국내에서 카카오T의 호출 유료화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토부가 "수수료를 현행 수준(1000원)을 초과해 받을 경우 사실상 불허한다"는 권고안을 내면서 수익 모델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카카오는 결국 규제의 끈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일본에서 유료화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재팬 택시에 15억엔(약 151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정부가 신성장 동력 사업으로 선정한 바이오산업에서도 해외에서 먼저 서비스를 출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최대 유전자 분석 기업 마크로젠은 올 연말 해외에서 암·당뇨 등 중증 질환에 대한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출시할 계획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중증 질환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의료 기관에서만 할 수 있도록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 출신 인력 3명이 창업한 스타트업 '쓰리빌리언'도 지난해 5월 미국 등에서 희소 질환 유전자 분석 서비스를 출시했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거래소도 한국에서는 유흥업이나 사행 시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정부가 다음 달 시행할 예정인 '벤처특별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에 따르면 암호화폐 거래소는 벤처 인증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렇다 보니 네이버의 자회사 라인은 지난 7월 싱가포르에 암호화폐 거래소 '비트박스'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올해 초 프랑스 투자 기업과 펀드를 조성해 프랑스 블록체인 기업 '렛저'에도 50억원을 투자했다.
◇1년 넘게 성과 없는 4차산업혁명위원회
정부는 의료·숙박·교통 등 신사업 분야 규제 혁파를 위해 지난해 9월 대통령 직속의 4차산업혁명위원회(4차위)를 야심 차게 출범시켰다. 그러나 1년 넘게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4차위는 지난 4~5일에도 규제를 풀기 위해 이해 당사자들을 모아놓고 논의를 진행했지만 뚜렷한 결과는 없었다. 택시 업계가 불참해 교통 분야는 아예 논의조차 진행되지 못했다. 이 같은 답답한 상황이 1년 넘게 이어지자 장병규 4차위 위원장마저 "주무 부처가 움직이는 게 절실하다"며 정부에 적극적인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신사업에 투자하는 일이 장기화할 경우 국내에서는 이 사업들이 아예 싹 틔울 기회조차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업들이 해외 유망 업체에 투자해 이익을 낼 수는 있겠지만 자체 기술 개발과 산업 생태계 구축에는 뒤처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규제 때문에 기업이 국내에 투자하지 않으니 일자리도 만들어지지 않는 악순환에 빠졌다"며 "정부는 현재 있는 규제를 완화해야 할 뿐 아니라 향후에도 새로운 규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줘야 기업들이 국내에서 투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