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계곡을 달린다...오프로드 강자 '올 뉴 랭글러'

입력 2018.08.26 11:20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용으로 개발...미군 승전 이끌어
산과 계곡의 험로 주행할 때 힘 발휘하는 오프로드의 전설

지프의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랭글러는 ‘오프로드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불린다. 돌과 모래, 진흙 등으로 뒤엉킨 험로와 경사진 비탈길, 물웅덩이 등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탁월한 힘을 바탕으로 강인하게 돌파하는 랭글러의 주행성능은 오랜 기간 SUV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프 올 뉴 랭글러/진상훈 기자
랭글러의 기원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초반 독일군에게 기동력에서 열세를 보이던 미군은 민간 자동차 업체들에게 가벼운 체구의 군용차 제작을 발주했다. 미국 자동차 제조사 윌리스가 제작한 공차중량 950kg의 4륜구동차 ‘윌리스MB’는 이렇게 탄생했다. 포탄이 빗발치는 거친 전장을 빠르게 질주하며 미국의 승리에 일조했던 윌리스MB의 후손이 바로 지프 랭글러다.

1941년 탄생한 군용차 윌리스MB/진상훈 기자
전쟁이 끝난 뒤 윌리스MB는 ‘시민 지프(Civilian Jeep·CJ)’라는 새 이름을 달고 민간 자동차 시장에 진출한다. 군용차 특유의 힘과 탁월한 오프로드 주행성능을 그대로 간직한 CJ의 등장은 당시 세단 일색이었던 자동차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이후 SUV라는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지프의 제조사인 윌리스는 1953년 카이저코퍼레이션에 인수됐고 다시 1970년 AMC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AMC는 이후 1987년 크라이슬러그룹에 합병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40여년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던 CJ가 랭글러라는 이름을 달고 첫 선을 보인 것도 이 시기부터다.

1987년 출시된 지프 랭글러 1세대 모델/진상훈 기자
지프의 국내 판매사인 FCA코리아는 최근 4세대 완전변경 모델인 올 뉴 랭글러를 국내에서 공식 출시했다. 강원도 평창의 흥정계곡에서 랭글러의 독보적인 오프로드 주행성능을 직접 체험하는 행사를 가졌다. 시승은 포장된 도로를 주행한 뒤 오프로드 코스와 계곡을 거쳐 다시 포장도로로 복귀하는 왕복 14.5km 구간에서 진행됐다.

◇ 자갈 깔린 비탈길부터 계곡까지 척척…진정한 오프로드 ‘최강자’

첫 등장부터 강렬했다. 흥정계곡 한복판에서 진행된 파블로 로쏘 FCA코리아 사장의 상품 소개가 끝나자마자 올 뉴 랭글러의 검은색 사하라 모델과 붉은색 루비콘 모델이 물길을 박차고 질주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시승차인 랭글러 루비콘을 타고 5km의 포장도로를 지나 흥정산 오프로드 구간에 진입했다. 기어를 ‘4륜 오토’로 설정하고 모래와 자갈로 이뤄진 산 속의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일반적인 차량이라면 주행하는데 상당한 애를 먹었을 법한 코스였지만, 랭글러는 별다른 흔들림 없이 내달렸다. 깊이 들어갈수록 비탈길의 경사는 점점 심해졌고 뾰족한 돌과 진흙이 잔뜩 깔린 험로가 이어졌지만, 묵직하게 중심을 잡으며 주행을 계속했다.

오프로드를 주행하는 올 뉴 랭글러의 전면부/진상훈 기자
오프로드 구간인만큼 거친 노면의 상태는 실내공간에 그대로 전달됐다. 돌무더기로 가득한 길과 깊이 패인 물웅덩이 등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행환경의 변화는 차체의 움직임과 시트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러나 랭글러는 급작스러운 노면 변화에서도 차체의 움직임을 안정적으로 제어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주행하는데 불편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오프로드 주행에서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SUV로 진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분간의 평지 주행을 거쳐 언덕 코스에서의 주행이 시작됐다. 이 코스는 35도에 이르는 급경사 구간인데다 바닥은 역시 크고 작은 자갈로 가득찬 험로였다. 4개의 바퀴를 각각 다른 각도의 접지면에 붙일 수 있도록 전자식 스웨이바를 분리한 뒤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자, 랭글러는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가볍게 치고 올라갔다. 같은 각도의 내리막길에서도 별다른 밀림 없이 안정적으로 차체를 유지하며 내려왔다.

올 뉴 랭글러의 측면부/진상훈 기자
이번 오프로드 주행의 ‘백미’는 바위가 가득 차 있으며 거친 물살이 굽이치는 계곡을 돌파하는 ‘락 크롤링(rock crawling)’ 코스였다. 기어를 ‘4륜 로우’로 바꾸고 천천히 물길 속으로 진입했다. 미끄러운 바윗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차체가 크게 흔들렸지만, 옆으로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끈기있게 중심을 잡고 움직였다. 일반적인 차라면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을 험로에서의 긴장감이 오히려 즐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약 7km의 오프로드 주행을 끝낸 뒤 다시 포장된 도로로 들어왔다. 가속페달에 힘을 주자 포구를 떠난 포탄처럼 강하게 치고 나갔다. 올 뉴 랭글러는 기존 V6 엔진을 개선한 2.0리터 터보차저 직렬 4기통 가솔린 엔진이 탑재돼 최고출력 272마력, 최대토크 40.8kg·m의 힘을 낸다. 가솔린 모델답게 한껏 속도를 높여도 엔진 구동음을 비롯한 소음은 크지 않았고 곡선 구간에서의 핸들링도 매끄러웠다.

올 뉴 랭글러의 후면부/진상훈 기자
◇ 경사각도와 주행환경 한 눈에…오프로드 최적화된 모니터링 시스템 돋보여

올 뉴 랭글러는 제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이어져 온 7슬롯 그릴과 원형 헤드램프 등 지프의 전통적인 디자인 철학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일부 디자인에 변화를 줬다.

사하라와 루비콘 모델에 적용된 LED 헤드램프와 안개등은 흰색 빛을 발사해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했다. 헤드라이트의 양 옆에는 날렵한 모양의 주간주행등을 배치했고 LED 전방 방향 지시등이 사다리꼴의 휠 플레어 앞쪽에 자리잡았다.

올 뉴 랭글러의 스티어링휠과 센터페시아/진상훈 기자
실내는 오프로드의 가시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전방 창의 크기를 확대했다. 올 뉴 랭글러의 전장은 4885mm, 전폭은 1895mm, 전고는 1880mm, 축거는 3010mm다. 이전 모델에 비해 차체가 커지면서 실내공간이 한층 쾌적해졌다. 키 180cm인 동승자가 뒷 좌석에 앉아 다리를 꼬아도 무릅이 앞 좌석 등받이에 닫지 않을 정도로 레그룸도 넉넉했다.

올 뉴 랭글러의 뒷 좌석/진상훈 기자
올 뉴 랭글러는 실내 센터페시아 상단에 배치된 8.4인치 터치스크린을 이용해 드라이브 트레인과 액세서리 게이지, 피칭과 롤링 등 주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피칭과 롤링 메뉴를 통해 두 가지 방향에서 실시간으로 노면의 경사각도를 볼 수 있도록 설계돼 보다 박진감 있는 오프로드 주행을 즐길 수 있다. 라디오와 엔터테인먼트, 기후와 차량 컨트롤, 내비게이션, 전화 등 각종 기능들도 터치스크린을 통해 손쉽게 이용이 가능하다.

올 뉴 랭글러의 8.2인치 터치스크린 화면/진상훈 기자
루비콘과 사하라 모델은 크루즈 컨트롤과 전자제어 전복 방지(ERM), 내리막 주행제어장치(HDC) 등과 함께 사각지대 모니터링 시스템과 후방 교행 모니터링 시스템이 새롭게 추가됐다. 안드로이드 오토와 애플 카플레이, 블루투스 통합 음성명령 기능을 포함한 차세대 유커넥트 시스템을 적용하는 등 다양한 편의사양도 갖췄다. 전통적 디자인과 오프로드의 최강자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재 소비자들이 원하는 다양한 기능들도 놓치지 않겠다는 지프의 방향성이 엿보인다.

올 뉴 랭글러의 적재함/진상훈 기자
올 뉴 랭글러의 국내 판매가격은 스포츠 4도어 모델이 4940만원, 루비콘 4도어 모델이 5740만원, 루비콘 하이 4도어 모델은 5840만원, 사하라 4도어 모델은 6140만원으로 각각 결정됐다. 이전 3세대 랭글러에 비해 각 모델별로 1000만원 정도 오른 가격이다.

문제는 연비다. 가솔린 모델인 지프의 연비는 리터당 10km 미만으로 디젤 모델이 주를 이루는 경쟁 SUV에 비해 연료 효율성이 낮은 편이다. 이전 모델에 비해 다소 개선됐지만, 올 뉴 랭글러 역시 루비콘이 리터당 8.2km, 사하라가 리터당 9.0km로 최근 출시된 주요 경쟁 모델들의 연비에 미치지 못한다.

강원 평창 흥정계곡에서 올 뉴 랭글러를 소개하는 파블로 로쏘 FCA코리아 사장/진상훈 기자
1987년 1세대 모델이 나온 이후 30여년간 랭글러는 ‘오프로드에서 가장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SUV’라는 타이틀을 유지해 왔다. 올 뉴 랭글러 역시 이같은 평가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말과 여가시간을 활용해 도심을 벗어나 거친 대자연을 질주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올 뉴 랭글러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차의 경제성이 중시되는 국내 시장에서는 낮은 연비와 1000만원의 가격 인상이 대량판매로 이어지는데 어느 정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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