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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와 CEO' 키워드 주니… AI가 로맨스 소설을 완성했다

  • 이기문 기자
  • 김슬기 인턴기자(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입력 : 2018.08.11 03:06

    [오늘의 세상] 상금 1억원 국내 첫 AI 소설 공모전 수상작 살펴보니

    "'정신 차리고 말해!' 그녀는 숨을 한 번 몰아 쉬었다. 몸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남는 시간이 더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숨을 쉬지 않고 말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녀는 나를 믿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 '설명하려 하지 않겠어'에 나오는 이 문장들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 썼다. AI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포자랩스는 이 소설로 KT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총 상금 1억원을 내걸고 국내 처음으로 개최한 AI 소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KT는 "AI 개발 역량이 있는 개인과 회사 모두에게 지원 자격을 줘서 스타트업, 대학, 일반인 등 총 31개 팀이 지원했다"며 "대회 조건인 3000자 이상의 소설을 제출한 10팀 가운데 포자랩스 등 5팀이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10일 밝혔다.

    AI는 어떻게 소설을 쓰나
    AI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명령을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여겨지던 창작에까지 도전하고 있다. 이미 지난 2016년 미국 뉴욕대 연구원이 개발한 AI가 9분짜리 공상과학(SF) 단편 영화 '선스프링'의 시나리오를 썼고, 같은 해 일본에선 하코다테 미래대 연구팀의 AI가 쓴 단편소설이 문학상 예심을 통과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 나온 AI 업체 퀀트랩의 '로맨틱 스펙타클'은 신입 비서와 최고경영자(CEO)가 만나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그렸고, 아주대 컴퓨터공학과 석사과정 한승현씨 등 3명이 만든 '로맨스 무협'에선 주인공이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며 사랑을 키운다.

    ◇소설·뉴스 문장 수백만 개 사전학습

    지난 27일 열린 공모전 심사는 문학보단 과학 논문 심사에 가까웠다. 5개 팀이 인공지능 전문가 7명 앞에서 소설 창작에 AI 기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발표했다. 수상팀들은 모두 딥러닝(심층학습) 방식으로 AI에 소설 창작을 가르쳤다고 했다. 원리는 이렇다. AI에 기존 소설에 나오는 문장 수백만 개를 입력하면 AI가 이를 스스로 학습하고 작가들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맥락을 파악한다. 이후 사람이 도입이나 결말 문장과 인물 정보 등을 입력하면 AI가 이에 기반해 소설 내용을 채운다.

    예를 들어 한양대 산업경영공학과 박사과정 안길승씨는 AI에 인터넷에 공개된 문서와 뉴스, 소설 등 200만개 문장을 학습시켜 SF 소설 '무표정한 사람들'을 작성했다. 안씨가 등장인물, 시·공간 정보와 기본 문장 두 개를 입력하면 AI는 이런 문장을 만들어냈다. '2045년 7월 20일, 가랑비 부슬부슬 오던 날.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이선호의 방. 언제 샀는지 모르는 회색 트레이닝 바지와 목이 늘어난 흰 티셔츠를 입은 이선호. 그는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TV에선 박요섭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AI 소설의 구성이나 문장 표현이 일반 소설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지만, 단어와 문장이 정확하고 간단한 이야기 구조도 갖췄다고 평가했다. 뉴스 작성 로봇을 개발한 이준환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AI 소설의 문장이 어색하지 않고 유려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AI가 주인공의 심리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장면도 나온다. 예컨대 부모의 죽음을 겪은 주인공이 차를 타고 켠 라디오에서 아일랜드 가수 길버트 오셜리반의 '또다시 혼자(Alone again)'가 흐르는 장면이 묘사된다.

    ◇인간·AI 공동작업으로 완성도 높여

    물론 아직은 AI 혼자 힘으로 소설을 창작할 수는 없다. 사람이 AI에 학습 데이터를 입력하고 시작 문장을 써야 한다. 또 AI가 사람이 기존에 썼던 문장을 학습했기 때문에 '명목(면목)이 없다'처럼 사람이 저지르는 단어 실수가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대신 AI가 사람과 협력해 창작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소설가가 AI를 활용해 이야기 얼개를 만들거나 생각지 못한 소재 힌트를 얻는 식으로 작품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6년 설립된 독일 출판사 인키트는 AI를 통해 작가 4만명이 쓴 글 15만개에서 독자들이 좋아할 가능성이 큰 글을 추려 베스트셀러 20여권을 제작했다. KT도 자사가 운영하는 웹 소설 콘텐츠 서비스 '블라이스'에 AI를 편집자처럼 활용해 작가들을 돕겠다고 밝혔다. 전대진 KT 상무는 "AI가 인기 작품의 구성과 소재, 트렌드를 분석한 정보를 작가들에 제공해 작품 완성도를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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