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車… 전 업종 소비 꺾였다, 90년대 일본 판박이

입력 2018.06.23 03:05

[일본형 장기불황으로 가나] [上] 침체 수렁에 빠진 내수

18일 강원도 태백시 오투리조트 스키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옆 상점가는 태반이 텅 비어 있었다. 한때 돼지 갈비집이었던 어느 빈 건물 안에는 누렇게 바랜 2010년도 달력이 걸려 있었다. 오투스키장은 5년간 폐업 상태였다가 작년 12월 새 단장을 하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님이 없어 61만㎡ 광활한 설원(雪原)에서 고작 수십 명이 스키를 탄 날도 있었다.

'젊은이의 스포츠' 스키의 몰락은 고령화에 따른 내수 시장 축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나라 스키장 이용객 수는 2012년 686만명을 기록한 뒤 매년 줄어 2016년에는 491만명까지 내려갔다. 이는 일본과 판박이다. 일본에선 1982년 600만명이던 스키 인구가 경제 호황을 타고 치솟아 1993년 1800만명을 기록했지만, 고령화가 본격화한 이후 2016년에는 530만명까지 쪼그라들었다. 스키장 파산이 줄을 이었다.

노후 걱정에 10년 당겨진 소비 축소

내수 소비가 줄어드는 품목은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휴대전화는 2013년 2095만대 이후 꺾여 작년엔 1880만대 팔렸다. 전국 주택 거래량도 2015년 이후 3년 연속 줄고 있다.

먹고 마시고 서비스받는 것도 줄였다. 작년 흰 우유 소비량은 2012년 대비 2.7% 줄었고, 밀가루 총 소비량도 1만t 감소했다. 술 출고량(국산·수입 합산)도 1.9% 줄었다. 1980년대 시작된 학생 수 감소에도 꾸준히 성장하던 사교육 시장 규모도 2009년을 정점으로 꺾였다.

1990년대 일본 닮아가는 한국

소비 위축의 중심에 고령화가 있다. 일본처럼 한국도 주요 상품 소비가 정점을 찍은 직후인 작년 고령사회 진입과 생산 가능 인구(15~64세) 감소가 나타났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교수는 "분석 결과, 국내 소비 성향 하락은, 77.4%는 '노인 가구 비중 증가' 때문인 것으로 집계됐다"고 말했다.

고령화는 소비에 어떤 영향을 줄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20년 전 우리 국민은 50대에 가장 왕성하게 돈을 썼고, 60세 이후에도 정점 대비 80% 이상 소비했다. 하지만 지금은 50대부터 소비를 줄이기 시작해 60세 이후에는 가장 많이 쓰던 때와 비교하면 절반에 그친다. 김기호 한국은행 거시경제연구실 차장은 "은퇴 후 더 길어진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소비를 더 일찍, 더 많이 줄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적 연금 등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은퇴한 고령자가 대거 저소득층에 편입되고 있는데, 그 정도가 오히려 일본보다 심하다"고 말했다.

청년들, 수입 늘어도 돈 안 쓴다

주요 소비 품목 전체 판매량 추이 그래프
젊은 층에서도 씀씀이를 줄이고 있다. 청년 실업률은 2014년 처음 10%대에 진입했고, 지난달엔 5월 기준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소비 심리 위축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39세 이하 가구는 2006~2010년 소득이 연평균 4.6% 올랐고, 지출도 같은 비율로 늘었다. 하지만 2011~2016년에는 소득이 2.8% 늘었음에도 지출은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비혼(非婚) 확산도 내수에 타격을 준다. 작년 한 해 국내에서는 26만4500건의 결혼식이 열렸다. 2016년에 통계 작성(1990년부터) 이후 처음으로 혼인 건수가 30만건 아래(28만1600건)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또 17% 떨어진 것이다. 결혼 컨설팅업체 듀오웨드가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실태조사에서 집계된 평균 결혼 비용은 6294만원(주택 자금 제외). 결혼 시장에서만 한 해 1조원 이상 민간 소비가 증발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비혼은 고령화를 더욱 촉진한다. 올해 1분기 출생아 수는 처음 8만명대로 추락,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이지연 통계청 인구동향과장은 "이대로라면 인구 감소 시점이 기존 예상했던 2028년이 아니라 2022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잠재 GDP(국내총생산) 성장률과 실질 GDP 성장률 격차인 'GDP 갭(Output gap)'에 주목한다. 한국은 GDP 갭이 2013년부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잠재력이 떨어지는데 실제로는 떨어진 잠재력만큼조차도 성장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의미다. 일본은 1993년부터 14년간 마이너스를 13번 기록하며 장기 침체로 빠져들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한국은 저성장·침체 국면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예측 전문기관 덴트연구소의 해리 덴트 이사장은 "한국은 인구 구조상 현재 소비가 정점을 지나고 있으며, 조만간 일본처럼 소비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라며 "한국은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인 에코붐 세대가 워낙 적어 일본보다 더 심각한 내수 침체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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