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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대장 속에 사는 세균, 뇌질환까지 막는다

  •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 입력 : 2018.05.24 03:06

    뇌 치료제로 발전하는 장내세균
    아미노산 '트립토판' 분해 산물이 뇌 신경세포의 염증 반응 억제

    사람의 대장(大腸)에 사는 미생물이 난치성 뇌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과학자들은 같은 방법으로 알츠하이머 치매와 파킨슨병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앞서 연구에서는 장내 세균이 세균 감염에 의한 설사병에서부터 관절염, 비만, 위염까지 치료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제 장내 세균 치료제의 범위가 뇌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대장에 사는 장내 세균이 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장내 세균이 신경세포의 염증 억제

    미국 하버드 의대 브리검 여성병원의 프란시스코 킨타나 박사 연구진은 지난 17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장내 세균이 영양 물질을 분해할 때 나오는 부산물이 뇌로 가서 다발성 경화증으로 인한 염증 반응을 억제하는 것을 실험 동물과 인간 세포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고 발표했다. 다발성 경화증은 면역세포가 멀쩡한 신경세포를 공격해 염증을 유발하는 희귀 질환으로, 시력 감퇴와 운동기능 상실로 이어진다.

    연구진은 장내 세균이 트립토판이라는 아미노산을 분해할 때 나오는 물질이 혈관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것을 확인했다. 트립토판은 칠면조와 달걀, 우유 등에 많은 인체 필수아미노산이다.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게 한 쥐와, 환자의 세포에 각각 트립토판 분해 산물을 투여하자 염증이 억제됐다.

    뇌질환 막는 장내 세균
    /그래픽=김충민
    다발성 경화증은 미세아교세포와 성상세포라는 신경세포를 통해 발생한다. 두 세포는 신경신호 전달은 하지 않고 대신 그런 일을 하는 신경세포를 보호한다. 미세아교세포는 손상된 신경세포를 분해해 다른 신경세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한다. 성상세포는 신경조직에 영양분을 제공한다.

    연구진은 미세아교세포가 분비하는 특정 단백질이 성상세포에 결합하면 염증이 억제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 단백질은 바로 장내 세균의 트립토판 분해 산물이 미세아교세포에 결합할 때 나왔다. 결국 장내 세균은 두 신경세포를 통해 뇌질환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킨타나 박사는 "제약사들과 장내 세균의 아미노산 분해 산물을 제품화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며 "몇 년 내 실제 환자 대상 임상시험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같은 방법으로 다른 뇌질환 치료도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치매와 뇌종양의 일종인 교모세포종도 다발성 경화증처럼 신경조직의 염증과 깊은 연관이 있다. 브리검 여성병원 신경질환 연구센터는 "파킨슨병과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루게릭병)도 다발성 경화증과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트레스도 자폐증도 미생물이 좌우

    장내 세균이 뇌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은 2004년부터 알려졌다. 당시 일본 규슈대 연구진은 쥐에서 장내 세균을 없애고 스트레스를 유발하자 스트레스 호르몬이 정상 쥐보다 2배나 많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장내 세균이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력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뇌질환을 유발하는 장내 세균도 발견됐다. 캘리포니아 공과대 연구진은 파킨슨병 환자의 장내 세균을 쥐에게 이식하자 정상인의 장내 세균을 받은 쥐보다 파킨슨병 증세가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했다. 지난해 미국 하버드 의대의 허준렬 교수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글로리아 최 교수 부부는 임신 중 태아의 자폐증을 유발하는 장내 세균을 찾아냈다.

    그렇다면 장내 세균을 바꿔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세균성 장염 환자에게 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을 이식하는 치료가 이뤄지고 있다. 아일랜드 코크대 연구진은 우울증에 걸린 쥐에게 건강한 사람의 장내 세균을 이식하자 우울증 증세가 완화됐다고 밝혔다. 허준렬 교수도 항생제로 임신 쥐의 특정 장내 세균을 없애 자폐증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장내 세균이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사람 몸에 인체 세포보다 미생물이 더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인체 세포가 30억개 정도인데 미생물은 1.3배인 39억개나 된다. 장내 세균이 미생물의 다수를 차지한다. 유전자도 사람이 2만개 정도인데 미생물의 유전자를 합하면 200만~2000만개에 이른다.

    ◇한국인 장내 세균 프로젝트도 시작

    제약사들도 최근 장내 세균을 이용한 치료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장내 세균은 다발성 경화증처럼 면역 세포가 정상 세포를 공격해 발생하는 자가면역질환과 암 치료에서도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존슨앤드존슨·화이자·브리스톨마이어스스퀴브(BMS)·애브비·다케다 같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다양한 장내 세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BCC리서치는 세계 장내 세균 치료제 시장이 올해 5600만달러(약 608억원)에서 2024년 93억8750만달러(10조1892억원)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에서는 김유미 KAIST 교수 연구진이 장내 세균에 따라 항암제 효능이 달리 나타나는지 연구하고 있다. 조미라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자가면역질환인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의 장내 세균을 분석하고 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분당서울대병원, 천랩과 함께 2023년까지 '한국인 장내 표준 마이크로바이옴 뱅크'를 구축할 계획이다. 장내 세균이나 장내 세균의 유전자 전체를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이라고 한다.

    천종식 천랩 대표(서울대 교수)는 "국내 최초로 2000명 이상의 시민들로부터 대변 시료를 기증받아 한국인 마이크로바이옴을 분석하는 시민과학 프로젝트도 시작했다"며 "질병의 예방과 진단은 물론, 신약 개발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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