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천 칼럼] 아르헨티나는 누구를 위해 울어야 하나

입력 2018.05.15 04:00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2004년까지 상환을 완료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2001년 8월 마지막 남은 차입금 1억4000만 달러를 갚고, IMF관리체제에서 조기졸업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기아자동차 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IMF 자금 차입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됨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과 신인도가 크게 개선될 것”이라고 자축했다. 청와대 기념만찬에서는 “IMF를 극복했지만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4대 개혁을 철저히 해 후대에 건강한 나라를 물려주자”고 했다.

중남미 아르헨티나도 10여년 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05년 12월 당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IMF 차입금 조기 상환을 선언한 뒤 이듬해 1월 초 이를 실행했다. 외환보유고의 3분의 1 가까운 98억 달러의 빚이 남아 있어 부담이 컸지만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상환을 강행했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무례하고 오만한 IMF가 아르헨티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도록 하면 안된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IMF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빈곤과 고통만 안겨줬다”고도 했다. 2001년 디폴트(채무 불이행)와 그로 인한 경제적 고통이 전적으로 IMF의 책임인 것처럼 비난했다. IMF가 주문한 4대 개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과 정반대다.

아르헨티나는 차입금 상환 이후 IMF와 관계를 끊었다. 연례 정책 협의를 중단하며 다시는 간섭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국제사회는 우려의 시선을 보냈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환호했다. 지금도 아르헨티나에서 IMF는 긴축·경제위기·고리대금업과 거의 동의어로 간주된다고 한다.

IMF가 과거 아르헨티나 환율 정책 등에 대해 잘못된 조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아르헨티나 페소화와 미국 달러화 환율을 1대1로 연동시킨 페그(peg)제가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됐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아르헨티나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IMF 정책 처방에 오류가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IMF는 어디까지나 조연이었다.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의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과 정부에 있다.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 이후 지금까지 모두 8번이나 디폴트를 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방만한 재정 운용이 거의 체질화돼 있다. 2001년 디폴트가 IMF 탓이라는 주장은 적반하장에 가깝다.

자기 반성 없이 남탓만 하는 아르헨티나가 재정적자·인플레이션·외환부족의 삼중고에 빠져든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키르치네르와 그의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의 연속 집권 기간(2003~2015년)에 아르헨티나 경제 정책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실업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공공부문 일자리를 대폭 확대했다. 새로 채용된 공무원 중 상당수는 업무가 없었고, 심지어 출근도 하지 않았다. 뇨키(ñoqui)로 불리는 ‘월급도둑’들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공무원 임금과 연금을 두 배로 올렸다. 일자리 창출 명목으로 그냥 돈을 뿌린 것이나 다름 없다.

서민 생활 안정을 내세워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에너지·교통 가격을 동결하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상위 가계의 한달 전기요금이 2달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공공요금을 원가 이하로 낮게 유지했다. 모든 학생에게 최신 노트북을 무상 지급하는 등 온갖 선심 정책을 남발했다.

그 결과 중앙정부 지출은 2004년 GDP 17.4%에서 2015년 37.8%로 크게 늘었다. 재정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다 못해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기까지 했다. 물가가 급등하자 경제 실정(失政)을 감추기 위해 통계를 조작했다. 정부가 발표한 공식 물가상승률은 연간 10% 수준으로 민간 조사기관 추정치의 절반 이하였다.

기업인 출신인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2015년말 취임하면서 경제 재건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집권당이 의회에서 소수파였고, 경제 기반이 워낙 취약해 과감한 정책을 펼 수 없었다. 재정 건전성을 높이기 위한 보조금 삭감 정책이 물가 폭등을 유발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됐다.

아르헨티나는 마크리 정부 출범 이후 국제금융시장 접근이 가능해진 덕분에 돈을 찍어내는 대신 해외 차입으로 재정적자를 메꿨다. 그러다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로 외화 자금이 유출되고 환율이 급등하는 등 타격을 받게 됐다. 마크리 정부가 최근 IMF에 3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위기 대응을 위한 선제 조치에 나선 배경이다.

결국 아르헨티나의 주기적 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은 페로니즘의 유산과 적폐에 있다. 상당수 아르헨티나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짜 복지를 당연하게 여기며 마크리 정부의 긴축 정책과 개혁에 반발하고 있다. 이유 불문하고 IMF 구제금융 신청은 잘못이라는 여론이 75%에 이른다. 한번 포퓰리즘에 오염되면 이를 치유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뮤지컬 ‘에비타’에서 주인공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난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아요”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페로니즘의 상징인 에비타를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게 아르헨티나의 진짜 비극일 수 있다. 이제는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봐야 한다. 아르헨티나는 에비타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회한(悔恨)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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