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오전 4시 서울 동대문구의 한 모텔. 중국인 저우(25)씨가 대형 여행용 가방을 끌고 택시에 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 소공동 롯데면세점. 개장까지 5시간 넘게 남았지만, 면세점 문 앞에는 중국인 300여명이 150m 가까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여행용 가방을 바람막이 삼아 침낭과 이불을 깔고 전날 밤 8~9시부터 대기하던 이들이다. 각 면세점 점포는 인기 국산 화장품의 경우 판매량을 1인당 5~10개씩 제한해 선착순으로 판다.

저우씨는 "다오완러(늦었다)"라며 스마트폰으로 구매 목록을 확인했다. 아모레퍼시픽 '설화수'와 LG생활건강 '후' 등 화장품 20여개, 약 300만원어치였다. 저우씨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물건을 사다 파는 보따리상 '다이궁(代工)'이다.

23일 오전 6시 서울 중구 롯데면세점 앞에 중국 보따리상인‘다이궁’300여 명이 줄을 서 면세점 개장(오전 9시 30분)을 기다리고 있다(왼쪽 사진). 22일 롯데면세점 12층 화장품 매장에 중국 관광객들이 구매한 면세품이 담긴 쇼핑 봉투가 쌓여 있다.

오전 9시 30분, 면세점 문이 열리자 다이궁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 화장품 매장으로 밀려들었다. 트렁크를 들고 뛰던 왕(王·27)씨는 "빨리 가서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며 "설화수와 후, 닥터자르트 번호표를 모두 받으면 3관왕"이라고 했다. 오전 11시, 250여만원어치를 모두 산 저우씨는 "혹시 재고가 있을까 해서 신세계면세점으로 간다"고 했다. 처음 간 면세점에서 쇼핑 시간이 지체되면 2차, 3차로 이어지는 '면세점 순례'에서 허탕 칠 가능성이 커진다. 다이궁의 '1차 쇼핑'은 오후 3시에 끝났다. 명동 인근 분식집에서 점심을 때운 저우씨는 동대문 두타면세점에서 2차 쇼핑을 했다. 오후 7시에야 하룻밤에 4만원짜리 숙소로 향했다. 객실 20개의 3층 모텔 복도에는 다이궁들의 여행용 가방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본지가 다이궁 4명을 2박3일 동행 취재한 결과 이들이 하루 쇼핑에 쓴 시간은 12시간 이상이었다. 관광은 전혀 하지 않았다.

◇최대 수수료 44% 챙기는 '대박 장사'

지난달 18일부터 2주간 서울 명동 일대에서 만난 수십 명의 다이궁은 모두 휴대전화에 '판뎬(返點·환급)'이라 불리는 표를 저장해놓고 있었다. 화장품과 선글라스 등 80여개 상품 브랜드마다 면세점들이 다이궁에게 제시하는 품목별 수수료율표다. 한 면세점에서는 닥터자르트와 VDL 브랜드가 44%로 가장 높았고, 네이처 리퍼블릭·잇츠스킨·더페이스샵은 42%였다. 후와 숨은 37%, 설화수는 36%였다. 한 다이궁은 "수수료 37%짜리 화장품을 1000달러어치 샀다면, 면세점 VIP 카드로 먼저 15%(150달러)를 할인받고, 나머지 22%(220달러)를 일주일 뒤 통장으로 입금받는다"고 했다. 중국에서 상품은 1100달러에 판다. 상품을 1000달러 주고 산 뒤, 수수료 370달러와 판매금 1100달러를 받는 것이다. 총 470달러를 챙기는 셈이다.

한 다이궁은 "내 위챗(중국판 카카오톡) 계정에 한국 일정을 올리면, (고객들이) 원하는 품목을 주문하고 선금도 보낸다"고 했다. 고가 명품 가방이나 시계는 금방 안 팔리면 유동성 문제로 고생해 화장품을 주로 산다. 또 다른 다이궁은 "8000위안(약 130만원)이 한도지만, 세관 감독이 허술하고 '기름칠'도 돼 있어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이궁은 개별적으로 일하는 '개인형'과 여행사 등에 소속된 '기업형'으로 나뉘어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작년 3월 사드 보복 이전까지는 개인형이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에는 기업형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아졌다"고 말했다. 기업형은 중국 여행사가 중국에서 여행자를 모집해 한국에 데려온 뒤 물건을 사게 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이들이 산 상품을 매집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면세점 관계자는 "국내에서도 일당 7만~10만원을 받는 유학생들이 미리 줄을 서면, 다이궁들이 여권을 들고 상품을 구입하는 식으로 역할이 분화됐다"고 말했다.

◇면세점 "매출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어"

사드 보복이 본격화한 이후 국내 시내 면세점에는 중국 관광객은 보기 힘든 대신 다이궁은 넘쳐난다. 지난해 방한 중국 관광객은 416만여명으로, 전년의 반 토막 수준이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면세점 매출은 17.9% 증가한 14조460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외국인 매출이 10조6400억원(73.6%), 내국인 매출이 3조8200억원이었다. 면세점 관계자들은 "매출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다이궁의 싹쓸이 쇼핑을 눈감아 주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전국 22개 시내 면세점 사업자가 여행사와 가이드 등에 준 수수료는 1조1481억원으로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2015년 5630억원에서 2년 만에 두 배로 증가한 것이다.

면세점 영업이익은 급감했다. 실제로 롯데면세점 영업이익은 2015년 3840억원에서 지난해 1~3분기 350억원에 그쳤다. 신라면세점 영업이익은 2015년 910억원에서 지난해 590억원으로 반 토막이 됐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현재 면세점 매출의 70%는 다이궁이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면세점 시장은 파행 운영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