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가상화폐 관련 규제를 수립하지 못한 가운데, 당장 회계처리를 해야 하는 가상화폐 관련 업계를 중심으로 ‘회계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가상화폐 정의부터 세부적인 회계 처리 방식까지 다양한 의견이 엇갈리면서 논의는 공회전을 하고 있다.
22일 한국회계기준원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가상통화 회계처리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이에 대한 논의를 폈다. 이한상 고려대 교수와 김대현 한국회계기준원 수석연구원이 발제를 맡았고 김영진 비티씨코리아닷컴 이사, 송민섭 서강대 교수, 이경호 삼일회계법인 부대표, 이만우 고려대 교수, 이상현 동부증권 차장 등이 토론 패널로 참석했다.
이날 발제를 맡은 이한상 고려대 교수는 가상화폐의 기능에 대한 정의가 선행돼야 회계기준 제정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가상화폐와 암호화폐는 다른 개념이며 이 둘을 화폐와 동일하게 볼 수 있을 지 여부가 기준 제정에 있어 핵심 질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화폐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경우 ‘화폐’ 또는 ‘외화’와 유사한 회계처리를 하되 준화폐 분류의 판단 기준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화폐적 기능이 없는 경우 생산·유통·소멸의 생애주기 및 화폐의 재무·투자·영업 등 기능별 역할에 따라 거래 당사자 별로 금융자산, 무형자산, 재고자산에 준하는 회계 처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가상화폐 회계기준 둘러싼 시각차… “신중해야” vs “전향적으로 마련해야”
이날 패널 토론은 가상화폐 회계기준을 현재 상황에서 마련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이견이 엇갈렸다. 현재 호주, 미국 등 일부 국가의 회계기준 수립 기관이 연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이다. 유일하게 일본회계기준위원회가 이달 초 최종본을 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상화폐 거래소가 IFRS가 아닌 일반회계기준을 따르기 때문에 IASB(국제회계기준원)와의 논의없이 자체 회계 기준을 개발해 적용할 수 있다.
이경호 삼일회계법인 “암호화폐 시장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이 제일 먼저 기준서를 만드는 나라로 가는것도 의미가 있지만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암호화폐에 대한 정의를 충분히 논의하고 메커니즘을 제대로 알아야 본질을 생각할 수 있으며 관련 법규 정비가 된 이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만우 고려대 교수 역시 “중개업자(가상화폐 거래소)가 고민해야 할 영역까지 기준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고 중개업자는 스스로 판단해서 회계 처리 할 수 있다”며 “모든 질문에 다 답을해서 만들었는데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누가 질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가상화폐 업계와 회계법인 등 업무 담당자들은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김영진 비티씨코리아닷컴(빗썸) 이사는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 시장에서 한국의 비중은 30%를 차지한다는 통계가 있고 지난 1월 기준으로는 코스닥시장과 규모가 같을 만큼 큰 시장”이라며 “선진적인 사례를 찾아 규정을 만들기보다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규정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청중으로 참석한 한 회계법인 대표는 “재무제표는 피감사인이 작성을 해서 감사인에게 제시를 해야 하는데 제대로 작성을 하지 않으면 한정의견을 내야 한다”며 “가상화폐 관련 회사는 감사를 기피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회계기준원이 공정가치에 대해 좀더 전향적으로 정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외감법 대상 거래소, 기준원 ‘질의회신’에 촉각
당장 자산규모가 급증해 외감법 대상 법인으로 지정된 가상화폐 거래소들은 회계 기준이 부재한 가운데 회계기준원의 ‘질의회신’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올해 외감법 대상으로 선정된 가상화폐 거래소는 빗썸, 코빗, 코인원 등 3곳으로 감사보고서 공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 외에도 2018년 회계연도에 외감법을 적용받는 가상화폐 거래소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거래소는 회계기준원 측에 ▲회사의 가상화폐에 적용하는 회계 기준은 무엇인지 ▲회사가 결산시점에 가상화폐를 공정가치로 평가할 수 있는지 ▲회사가 보관하는 회원의 가상화폐를 회사의 자산으로 인식해야 하는지 등 3가지 질의를 접수했다.
먼저 기준원은 가상화폐가 ‘자산’의 정의와 기준을 충족할 경우 취득 시점에 가상화폐를 얻기 위해 제공한 대가의 공정가치를 측정해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만약 가상화폐를 현금으로 구입했다면 해당 현금이 곧 자산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또 가상화폐의 가격이 공개돼 이용가능한 시장이 있는 경우에는 매 보고기간 말에 해당 시장에서 평가된 가격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게 했다. 만약 그 가격이 떨어지면 평가 손익을 당기순이익에 반영하도록 했다. 활성화된 시장이 없는 경우에는 취득 원가로 평가하고 회수할 수 있는 금액이 취득 원가보다 낮은 경우에는 손상 처리하도록 했다. 투자자가 가상화폐 거래소에 위탁한 가상화폐 역시 ‘자산’의 정의와 기준을 충족하는지를 검토해 자산으로 편입할 지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