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정책

법제처 이건희 회장 차명계좌 유권해석 '파장'...자녀명의 통장 등 선의의 차명계좌도 불법

  • 김형민 기자
  • 입력 : 2018.02.13 11:37

    직장인 조준희(39)씨는 자녀명의로 통장을 개설하고 태어난 날부터 매달 10만원씩 납입해왔다. 자녀가 나중에 대학에 갈때 모인 자금을 학자금 등으로 요긴하게 쓸 목적이었다. 조씨는 본인이 돈을 넣었지만, 향후 자녀에게 줄 돈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자녀 명의로 통장을 만들었다.

    자영업자 박성태(49)씨는 지인들과 만든 테니스 동호회 운영을 위해 '동호회' 통장을 만들었다. 자신의 명의로 통장을 개설했고 20여명의 회원들이 매달 회비 2만원을 이 통장에 넣어왔다. 모임의 총무는 따로 있어 박 씨가 아닌 총무가 이 통장을 실질적으로 관리해 왔다.

    앞으로 이같은 선의의 목적으로 만든 차명계좌가 모두 불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법제처가 지난 12일 이건희 삼성 회장의 차명계좌와 관련, 계좌의 실질소유자와 자금 출연자가 다르면 모두 과징금 대상이되고 차등과세 적용 대상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법제처의 이같은 유권해석으로 금융당국이 사실상 묵인했던 선의의 차명계좌에 대한 논란 및 혼란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지난 2016년 기준 국내 차명재산은 2조1600억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주식·출자지분이 1조5300억원이며 예·적금이 5092억원에 달한다. 이는 국세청이 탈세 등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계좌를 집계한 결과다. 금융권에선 선의의 목적으로 만든 차명계좌 거래 자금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선의의 차명계좌 모두 불법 대상 될 수도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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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위는 지난해 말 법제처에 이 회장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금융실명제법 유권해석을 맡겼다. 이에 대해 법제처는 지난 12일 "차명계좌의 자금 출연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경우 자금 출연자는 긴급재정경제명령 제5조제1항 및 금융실명법 부칙 제3조에 따라 차명계좌를 그의 실명으로 전환하고, 금융기관은 같은 부칙 제6조제1항에 따라 과징금을 원천징수해야 한다”고 유권해석했다.

    법제처의 유권해석을 바탕으로 보면 자금 출연자(계좌의 실질 소유주)가 다른 사람의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면 모두 과징금 대상이 되며 실명전환의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또 계좌를 개설할 당시 시점을 기준으로 차등과세를 매길 수 있다. 차명계좌를 선의의 목적으로 만들었더라도 불법이 될 수 있으며 추가 과세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금융당국은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1993년 이후 지금까지 계좌의 자금 출연자가 다를 경우에도 통장의 명의가 실존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실정법상 예외를 인정했다. 그동안 금융실명제 법상 실명전환하거나 실명확인한 차명계좌는 과징금 징수 대상인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선의의 목적으로 이뤄지는 차명금융거래의 관행을 인정한 것도 이런 입장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장의 차명계좌 과징금 부과 논란이 국회 및 시민사회 등에서 불거진 이후에도 금융위는 법제처 해석 전까지 "차명계좌는 금융실질거래자(자금출연자) 본인이 아닌 타인의 명의라하더라도 실존하는 사람의 실명으로 전환됐기 때문에 과징금 부과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12월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삼성에 대한 차명계좌 과징금 부과는 '삼성이니까 부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현행법상 삼성에 대해서만 과징금을 부과하기 어렵고 만약 부과하면 모든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동창회 이름, 자녀 이름 등 선의로 만든 모든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할 수는 없다"며 "향후 입법할 때 이런 점을 잘 감안해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법제처의 유권해석에 따라 금융당국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금융당국은 선의의 차명계좌를 포함해 대응책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선의의 차명계좌 용인했던 금융사 혼란 우려

    은행권도 혼란스럽다는 반응이다. 그동안 금융당국의 금융실명법 운영방침에 따라 동창회 등 모임 계좌, 자녀명의 계좌 등 계좌 운영목적을 확인하면 계좌를 개설해 줬는데, 이런 관행이 불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좌 개설 이후에 고액의 자금 거래 및 탈세 혐의 등 차명계좌 악용 사례에 대해서는 은행 등이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하면 과세당국이 정보를 받아 건별로 조사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법제처의 유권해석으로 자금출연자와 계좌명의가 다르면 계좌 개설을 거부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금융당국의 사실상 허용으로 차명계좌를 튼 선의의 고객들이 자칫 과징금이나 차등과세를 물게 된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지난 12일 법제처의 유권해석이 나온 이후 김용범 부위원장 주재로 국세청, 금감원 등 관계기관과 공동 TF를 구성했다. TF는 이번 법제처 법령해석에 따라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금융실명제 실무운영상의 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겠다는 방침이다.

    정부 관계자는 "금융실명제법에 대한 금융당국의 입장과 법제처의 유권해석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며 “금융실명제에 대한 법개정이 필요해 보이는데, 우선 법개정이 필요없는 가이드라인 등을 만들어 금융시장 혼란을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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