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 시장 판매량이 눈에 띄게 감소한 현대·기아차에 또다시 악재가 불거졌다. 최근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가 강세를 보이면서 수출의 가격경쟁력 및 수익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원·달러 환율은 올해 초 1200원을 웃돌았지만 10월 이후 빠르게 하락하면서 1100원 밑으로 떨어졌다. 달러 약세-원화 강세는 대표적인 수출 업종인 자동차 산업엔 치명타나 다름없다. 같은 금액의 달러를 원화로 계산하면 원·달러 환율이 하락한 만큼 줄어들어 수출 수익성이 악화된다.
주력 모델의 노후화로 미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내년에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중심으로 다양한 신차를 출시해 실적 회복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최근의 원화 강세 흐름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수익성이 악화되고 ‘엔저(低)’를 앞세운 일본 자동차업체들에 비해 가격 경쟁력도 약해져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상도 한국 자동차 업계에 부정적인 요인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 현대·기아차, 美 판매량 10.4% 감소…원화 강세 악재까지 겹쳐
27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올들어 10월까지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판매량은 119만934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4% 감소했다. 현대차 판매량은 65만193대로 전년동기대비 13.1% 감소했고 기아차의 경우 54만741대로 7.1% 줄었다.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판매 부진은 최근 들어 심화되고 있다. 지난달 현대차는 미국에서 전년동기대비 15.2% 줄어든 5만3010대를 판매하는데 그쳤고, 기아차의 판매량은 4만4397대로 9.4% 줄었다. 두 회사의 합산 판매량은 9만7407대로 전년동기대비 12.6%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화 강세는 현대·기아차에 또다른 ‘암초’로 떠올랐다. 외환시장에 따르면 지난 23일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3.7원 하락한 1085.4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2015년 5월 6일 1080원을 기록한 이후 약 2년 6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최근 7거래일간 하락 폭은 32.7원에 이른다.
올해 초 1208원으로 시작한 원·달러 환율은 5월까지 1100원대 초반으로 하락했다가 6월 이후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따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면서 다시 1150원대를 넘어섰다. 원·달러 환율은 9월말까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며 불안한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북한의 무력도발이 잠잠해지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 이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우려가 점차 줄어들면서 원·달러 환율은 빠르게 하락했다. 최근 국내외에서 잇따라 한국의 경기회복 전망이 나온 점도 원화 강세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 15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3.0%에서 3.2%로 상향 조정했다.
◆ 엔화 약세로 일본 자동차와 경쟁 '고전 우려'…현대차 비해 기아차 타격 더 클 듯
원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일본 엔화는 약세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도 최근 며칠간 하락했지만 원·달러 환율에 비해선 하락 폭이 훨씬 적은 편이다.
올들어 23일까지 원·달러 환율은 1208원에서 1085.4원으로 10.1% 하락했다. 반면 엔·달러 환율은 116.8엔에서 111.2엔으로 4.8% 떨어졌다. 10월 이후 원·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도 엔·달러 환율은 110원대 초반을 유지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수익성에 비상등이 켜진 한국 자동차 업체들에 비해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는 셈이다.
지난 2013년 이후 일본 정부가 엔화 가치를 절하해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 이른바 ‘아베노믹스’를 가동하면서 일본 자동차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발판삼아 해외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2013년 1월 80엔 수준을 기록했던 엔·달러 환율은 2014년 이후 100엔을 돌파했고 올들어 계속 110엔을 웃돌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판매량이 크게 감소한 현대·기아차와 달리 일본 업체들은 지난해 수준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올들어 10월까지 스바루의 미국 시장 판매량은 6.4% 증가했고 닛산·미쓰비시의 경우도 2% 늘었다. 도요타와 혼다도 각각 0.6%, 0.3% 증가하며 선전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달러화 약세 속에서도 일본 정부의 일관된 엔화 절하 기조를 통해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있다”며 “원화 강세 흐름이 장기화할 경우 일본과 경쟁하는 현대·기아차가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원화 강세 흐름 속에선 현대차(005380)에 비해 기아차가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기아차는 현대차에 비해 해외생산 비중이 낮아 환율 변동에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판매량을 기준으로 보면 현대차 전체 판매대수 219만7689대 중 해외공장 생산차량이 133만3908대로 60.7%에 이른다. 반면 기아차 전체 판매량 131만8596대 중 해외공장 생산차량은 55만6560대로 42.2%를 기록했다.
◆ 신차 앞세워 美 판매실적 개선 전망 우세…원화 강세 지속 여부가 변수
자동차 업계와 증권 시장에서는 현대·기아차의 내년 미국 시장 판매량이 올해보다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원화 강세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내년 출시 예정인 신차가 많아 올해보다 판매량이 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현대·기아차는 내년에 미국 시장에서 SUV를 포함한 다양한 신차를 출시해 판매실적 개선에 나설 예정이다. 현대차는 올해 국내 시장에서 출시한 소형 SUV 코나와 함께 싼타페 완전변경 모델과 벨로스터 2세대 모델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기아차도 세단 차종인 K3와 K9 완전변경 모델을 출시한다. 또 미국 시장 전략용 차종인 대형 SUV 텔루라이드도 판매할 계획이다. 제네시스도 지난 9월 국내 시장에서 선보인 중형세단 G70을 내년에 미국에 수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화 강세 흐름이 계속 이어질 경우 미국 등 주요 수출지역의 실적 개선은 예상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부에서는 경기회복 기대감,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원화 가치의 강세 흐름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성현 삼성증권 연구원은 “최근 경기회복의 온기가 미국에서 다른 해외시장으로 확산되면서 달러화 가치가 점차 하락하고 있는 반면 신흥국 통화는 동반 강세를 보이고 있다”며 “한국 역시 주요 경제지표가 개선되고 통화정책도 정상화 단계 진입을 앞두고 있어 당분간 원·달러 환율 1100원 안팎의 ‘저환율 환경’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