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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칼럼] 혁신 성장, '립서비스'로 끝나나

  • 조선비즈 논설주간
  • 입력 : 2017.11.14 04:00

    [김기천 칼럼] 혁신 성장, '립서비스'로 끝나나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며 수십년전 법과 싸우고 있는데 늘 미래보다 과거가 이긴다. 오래 전부터 규제 완화에 대한 목소리가 높지만 필드에서 느끼는 온도 변화는 아직 없다.”

    카풀(자동차 같이 타기) 서비스 스타트업인 ‘플러스’의 김태호 대표가 지난 7월 스타트업 관련 정책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규제와 관행이 혁신적 창업을 가로막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김 대표 자신이 ‘과거’에 치여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사태를 맞았다. 서울시가 최근 플러스를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수사의뢰한 것이다. 플러스가 지난 6일 도입한 ‘출·퇴근 시간 선택제’가 빌미가 됐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81조는 사업용 자동차가 아닌 자가용 자동차를 유상으로 제공·임대·알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다만 ‘출·퇴근 때 승용자동차를 함께 타는 경우’에는 가능하다고 돼있다.

    플러스는 이 예외조항을 근거로 오전 5시~오전 11시 출근시간대와 오후 5시~오전 2시 퇴근시간대에 카풀 영업을 하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출·퇴근 시간에 대한 상세 규정이 없는 점을 이용해 시간대를 넉넉하게 잡았다. 조금 아슬아슬한 전략이었다.

    그러다 최근 운전자가 자신의 출·퇴근 시간을 각각 4시간씩 자유롭게 설정해 카풀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예를 들어 오후 1시에 출근하는 직장인도 카풀 영업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실상 24시간 카풀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유연근무제, 탄력근무제 도입 등으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워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법률·행정 시스템은 이런 부분에서 융통성이 별로 없다. 서울시는 새 서비스가 도입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에 고발했다. 명시적인 규정은 없지만 24시간 카풀 영업은 법 취지에 어긋난다고 했다. 2년전 서울시가 우파라치(우버+파파라치)까지 도입해 우버를 내몰았던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강경 대응이다.

    ‘카오스 멍키(chaos monkey)’라는 소프트웨어가 있다. 인터넷 사이트의 프로세스와 서버를 갑자기 다운시킨 뒤 사고에서 얼마나 빨리 회복하는 지를 확인하고 취약점을 찾아내는 데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다. IT 전문가인 안토니오 마르티네즈는 이 소프트웨어 이름을 빌린 책에서 “데이터센터에서 케이블 뽑고, 서버 부수며, 난동 피우는 원숭이”에 비유했다.

    마르티네즈는 실리콘밸리 창업 경험과 페이스북 재직 때의 일화를 엮은 책에서 “IT업체 창업자는 사회의 카오스 멍키이고, 실리콘밸리는 카오스멍키를 가둬두는 동물원”이라고 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파괴적 혁신’을 통해 기존 체제와 기업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의미다. 일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곱씹어 볼 만한 대목이다.

    실리콘밸리가 세계 최고의 혁신센터로 군림하고 있는 비결은 카오스 멍키들의 ‘난동’을 용인하는 데 있다. 기성 질서와 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거의 무제한 허용된다. 파격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일수록 더 많은 돈과 지원을 받는다. 대다수 카오스 멍키는 실패하지만 적자생존의 정글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원숭이들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한국은 정반대다. 실리콘밸리를 부러워하면서도 카오스 멍키를 용납하는 문화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눈에 띄는 대로 재갈을 물리고 족쇄를 채우기 일쑤다. 난동이 아니라 약간의 소란도 봐주지 않는다. 관련 법 규정이 없으면 행정지도를 통해서라도 기득권에 대한 위협을 제거한다. 국민 안전과 사회 질서 등 핑계는 얼마든지 있다.

    정부는 혁신을 위한 규제 완화보다 모험과 도전을 억누르는 규제 도입에 더 적극적인 듯하다. ‘혁신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아닌 ‘규제의 퍼스트 무버’다. 정부가 잘 모를 때는 새로운 시도, 과감한 도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외국의 앞선 사례에 대한 ‘빠른 추격(fast follow)’조차 힘들어진다.

    핀테크 스타트업 ‘모인’이 전형적인 케이스다. 모인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한 해외송금 서비스를 개발해 작년 9월 창업경진대회에서 금융감독원장상을 받았다. 지난 9월말에도 모 언론사에서 주관하는 핀테크대상의 해외송금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하지만 해외송금 서비스는 현재 중단된 상태다. 올해 개정된 외환거래법에 따라 일정 요건을 갖춰 기획재정부에 등록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기술에 대해 정부가 없던 규제를 새로 만들고 진입장벽을 세운 것이다. 세계 100대 핀테크 기업 중 한국 기업은 하나도 없는 이유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달 4차 산업혁명위원회 1차 회의에서 ‘혁신 친화적 창업국가’를 이야기 했다.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창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플러스, 모인 같은 사례가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이 정부의 혁신성장론도 립서비스(lip service)로 끝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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