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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거물 화상, 이호재 "미술은 ‘자격 게임'... 돈 있다고 다 살 수 없어"

  • 김지수 기자
  • 입력 : 2017.09.30 11:00 | 수정 : 2017.10.10 16:46

    30년간 그림과 돈을 이어온 황금손, 서울옥션 이호재 회장
    작가에겐 생활비 대고, 컬렉터에겐 좋은 그림 공급… 몽블랑 예술후원자상 수상
    ‘집세, 병원비 낼 돈 없다'는 화가들 편지 받으면 가슴 무너져
    재벌 인명사전 들고 기업 회장 찾아가 “그림 팔아라" 배포도
    미술은 ‘자격 게임'... 돈 있어야 사지만, 돈만 있어도 살 수 없어
    세계 시장에서 단색화, 민중미술 열풍 일으켜

    서울옥션 회장 이호재(64세). 작가 후원과 미술품 기증 등 그가 한국 미술에 끼친 공헌을 기려 26회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록펄러 재단, 극작가 로버트 윌슨, 건축가 렌조 피아노와 나란히 올라갔다. 이호재는  2000년 이미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문화예술 공헌 훈장을 받은 바 있다./사진=고운호 기자
    서울옥션 회장 이호재(64세). 작가 후원과 미술품 기증 등 그가 한국 미술에 끼친 공헌을 기려 26회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받았다. 그의 이름이 록펄러 재단, 극작가 로버트 윌슨, 건축가 렌조 피아노와 나란히 올라갔다. 이호재는 2000년 이미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문화예술 공헌 훈장을 받은 바 있다./사진=고운호 기자
    그림 앞에서 우리는 주눅이 들고 따분함을 느끼지만, 돈 앞에서는 눈이 번쩍 뜨이고 피가 빨리 돈다. 그는 고상한 화랑의 주인이기도 하고, 최고가 갱신을 주도하는 경매회사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림을 사고 파는 상인, 즉 화상이다. 서울 옥션 이호재 회장(64세)이 지난 26일 몽블랑이 주는 지난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받았다.

    에릭 에더 몽블랑 한국 지사장은 “이로써 당신은 찰스 황태자, 록펠러 재단, 극작가 로버트 윌슨, 건축가 렌조 피아노 등과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됐다"고 추켜세웠다. 시상식장에 나란히 앉은 한국의 거물 화상, 이호재의 낯빛은 희고 투명해서 트레이싱 페이퍼처럼 그의 속내가 배어 나왔다. 자랑스럽기보다 면구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소란을 싫어하는 성격임이 분명했다.

    한국 미술 시장에 미친 그의 공헌, 이를테면 서울 옥션, 가나아트문화 재단 설립하고, 30년간 돈 없는 작가에게 밥과 물감을 대고, 시장에서 한국 미술의 주가를 올리고, 공들여 모은 자신의 컬렉션을 선뜻 미술관에 기증한 일 등이 나열될 때마다 그의 표정은 더 곤혹스러워졌다. ‘필요한 일을 했을 뿐인데...'

    그림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평생 돈 걱정만 하고 살았다’는 이호재를 만났다.

    인터뷰는 30년과 함께 했던 15인의 작가들의 기념 전시회 ‘同行(동행)’ 전시장에서 시작했으나, 끝은 가을볕이 나지막이 깃든 그의 방에서 마무리됐다. 이름자의 뜻을 물어보니 흴 호(皓)에 재상 재(宰)자를 쓴다고 했다. 흰 캔버스에 벼슬이 드리우니, 필시 화상의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인 듯싶었다.

    고영훈, 임옥상, 황재형… 그가 함께했던 ‘전우'의 그림을 병풍처럼 두른 채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피판을 듣는 것처럼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청자를 데려가는, 아득하나 뼈대가 튼실한 말투였다.

    박대성의 ‘만월(2008)'. 이호재가 월 30만원을 주고 첫 계약을 맺었다.
    박대성의 ‘만월(2008)'. 이호재가 월 30만원을 주고 첫 계약을 맺었다.
    “제가 1983년에 가나 화랑을 오픈했어요. 만 스물아홉이었어요. 당시 그림을 파는 화상 중에 저보다 어린 친구는 한 명도 없었죠. 젊은 작가가 상업 화랑과 관계를 맺고 화단에 진출하는 일도 없었어요. 저는 나이가 어려서 명함에 사장 대신 상무라는 직함을 파고 다녔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 덕에 좋은 고객도 만나고 이윤을 남겼으니, 그걸 좋은 일에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 한편에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닌데, 전공하지도 않은 미술 분야에 들어와서 돈을 번다는 게 죄송하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름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를 지원해보자고 결심을 했지요. 내 뒤에 있는 저 그림이 경주 남산을 그린 거예요. 박대성이라고 저와 첫 인연을 맺은 작가입니다. 저처럼 정규 미술대학도 안 나왔고 몸도 불편한 친구였죠. 그 젊은이에게 월 30만 원을 주기로 계약을 맺었어요.

    제가 요구한 건 하나였죠. 한 달에 그림 3점 보여주고, 그중 1점을 선택해서 가나화랑에서 갖겠다. 저쪽에 그림은 박영남이라는 화가 작품이에요. 붓으로 안 그리고 손으로 직접 물감칠을 해요. 1984년 뉴욕에서 만났는데 월 500불을 주기로 하고 계약을 했어요. 그렇게 한 명 한 명 작가를 만나서 인연을 만들고 여기까지 왔어요. 작가는 내 인생의 동반자였고, 선배였고 친구였어요. 화실에 가서 얼굴을 보면 이 친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딱 알죠. 그 세월이 30년이에요.”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해야 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개척이라든가 소명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그저 시작했으니 감당해야 할 ‘업(業)’으로 정리가 됐다.

    “처음이니까 ‘가나다라' 한글 배우듯 하겠다고, 화랑 이름을 ‘가나'로 지었어요. 이름 덕인지 항상 미술계에서 ‘처음’을 도맡게 됐지요. 사람들은 성공만 추켜세우지만, 실패도 많았어요. 새로운 미술 유통 시장을 잡겠다고 IMF 직후인 1998년에 서울옥션을 세웠어요. 내가 은퇴하면 나와 관계했던 작가들의 작품이나 기록이 소외될까 걱정돼서 2014년엔 가나아트문화재단을 만들었지요.”

    돈과 명성 대신 그림과 인연을 좇았던 심플한 상인. 그 자신, “35년 전 겁 없던 청년 이호재가, 참 새롭다’고 회고했다.

    -호재라는 이름의 한자가 어떻게 됩니까?

    “내 이름이 흴 호에 재상 재 자를 써요. 비즈니스 하는 사람에겐 안 어울리는 이름이죠. 그 이름 쓰면 사기당하고, 손해 입는다고 개명하라는 사람도 많았어요. 점쟁이가 호재라는 이름은 단명한다고, 이름의 액땜을 하려면 좋은 일 많이 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름 액땜 하려고(웃음), 살았어요.”

    박영남 작가의 ‘달의 노래(2017)' 앞에 선 이호재.
    박영남 작가의 ‘달의 노래(2017)' 앞에 선 이호재.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많은 화상을 찾아다니며 교분을 쌓았다. 뉴욕의 전설적인 화상인 레오 카스텔리의 주선으로 1991년 미국의 대표적인 팝 아트 작가 재스퍼 존스와 리히텐슈타인 전시를, 스위스의 거물 화상 바이엘러의 도움으로 1993년 색면 추상의 대가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

    “화랑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는 바이엘러한테 배웠어요. 어느 날 바이엘러의 그림 창고에 갔더니, 안젤름 키퍼 작품(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이 있어요. 당신은 근현대 인상파 전문 화상인데 왜 젊은 화가 작품을 갖고 있느냐고 했더니 “비싼 거 팔면, 그 돈으로 뜨지 않은 젊은 작가들 것을 사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때 들은 말이 내 경영 철학이 됐어요.”

    -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조각가 최종태 씨에요. 1985년에 만났는데, 당시 화단에서 돈 되는 작가로 유영국과 최종태가 양대 산맥이었죠. 파리에서 열린 아트페어 피악(FIAC)에 처음 최종태와 인연을 맺었어요. 그런데 그분은 나를 참 별나게 도와준 분이었어요(웃음).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많아 그분 작품 하나 팔면 다른 작가 1년 생활비를 대줄 수 있었죠. 그분 이름값으로 이름 없는 작가들이 세상에 나왔어요. 이번에 ‘동행' 전에 최선생 작품을 모시면서, 내가 후원한 작가들 모인 자리인데, 그분 자리가 여기가 맞나, 아리송하더군요(웃음).”

    이호재의 말을 들으니, ‘동행’이란 두 글자가 새롭게 다가왔다. 잘 나가는 최종태의 조각을 팔아 가난한 작가들 물감을 사주었으니, 그들은 미술 시장이란 광야에서 함께 발을 묶고 걸어간 셈이다.

    “서양화가 박영남도 참 잊을 수가 없어요. 영남이 형은 재작년 금호미술관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참 이상한 건 작품 반응은 좋은데 영 팔리질 않아요. 내가 화랑 은퇴하기 전에 영남이 형 그림 잘 팔리는 걸 한번 보고 싶다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반전이 일어났어요. 홍콩 컬렉터가 산 게 알려지면서, 그때부터 불티나게 팔렸어요. 30년 동안 판 것보다 1~2년 사이 판 금액이 더 높아요.”

    작가들은 캔버스 앞에서 돈 생각을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러니 결국 작가도 화상도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고, 그가 다짐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뉴욕의 아트 딜러들이 자본과 미술을 결합시키기 위해 작가들에게 시장에게 ‘먹힐만한' 이상야릇한 현대 미술품을 주문했던 일화를 알고 있다. 작가들은 작가들대로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요구하며 딜러들을 파산에 이르게도 한다. 화상과 작가는 그렇게 미술 시장에서 판돈을 건 위험한 파트너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뻔뻔하지 못했어요.” 그가 휘파람 불듯 단숨에 말했다. 화상이기에 중간에 화가들의 가난을 통역하고, 자본가들의 안목의 욕망을 응원해야 했던 이호재.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그림은 잡초같은 돈더미를 헤치고 캔버스에서 들꽃처럼 피어났다.

     최종태 ‘서있는 형상(1983)
    최종태 ‘서있는 형상(1983)
    -어떤 작가를 좋아합니까?

    “작가다운 작가를 존경해요. 유영국 선생은 오로지 자기 수련의 자세로 평생 추상 작업만 했어요.
    작품 면에서 존경스러워요. 이응노 선생은 모든 삶이 작품으로 밀집되고 수렴이 됐어요. 대전 교도소 계실 때는 밥풀과 젓가락으로 작업을 했고 구두 공장에 집을 얻어 신발 가죽 콜라주 작품도 만들었죠. 심지어 덮고 자는 이불로도 작업했어요. 그런데 젊은 작가들과 재료비 얘기할 때 이응노 선생 예를 들면 날더러 옛날 사람이라더구만. 허허.”

    가장 보람 있었던 전시회도 1988년 1월 10일에 했던 고암 이응노 선생의 회고전이었다. ‘문자 추상'과 ‘인간 군상' 등으로 파리 미술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추상의 대가 이응노는 정작 한국에서는 입국 금지였다. 남북 분단의 현대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유럽을 떠돌던 노작가는 행여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전시회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다.

    “파리에서 처음 뵀을 땐 날 중앙정보국에서 왔나 의심하시더라고(웃음). 내가 샤갈 전시회한 걸 보여드렸더니, 어떻게 한국에서 샤갈 전시회를 했느냐고 놀라며 그제야 믿어주셨어요. 그날 전시회 오픈이 오후 5시였는데, 2시경에 연락을 받았어요.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시 반정부 계열의 화가들과 교류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위에서 다들 걱정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어요. 고암 선생이나 민중 미술 화가들이나 그들이 그려야 할 걸 그린 분들이죠. 미술에는 좌우가 없어요. 정치적으로 나는 보수에 가깝고, 철저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사업하는 사람이지만 그림은 달라요. 소외되고 의식주가 곤궁했다면 나도 그런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결국 당신이 지원했던 단색화가와 민중미술 화가가 미술 시장을 이끌며, 고가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의도했든 안 했든 말입니다.

    “30년이고 15년이고 나와 인연을 맺은 작가들이 다 민중미술과 단색화만 그린 작가들이었을까요? 아니에요. 더 많은 작가를 상대했지만 많이 사라졌죠. 나는 작가들에게 ‘전업’을 요구했어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려면 누가 돈을 대줘야 해요. 작가는 항상 돈이 아쉽고 화상은 그 돈 걱정을 맡아서 해요.”

    평생 돈 걱정하며 살았다는 말이 명치에 걸렸다. 화가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받을 땐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집세고 병원비고 살면서 돈 들 일은 끝이 없잖아요. 그러면 작가도 화상도 돈 앞에서 유혹을 받아요. 그걸 이기고 딴짓 안 하고 온 분들이 그분들이죠. 최종태, 박대성, 박영남, 임옥상, 황지형… 팔리든 안 팔리든 귀한 작가들이에요.”

    그는 고암 이응노 선생과 민중 미술 화가들과 깊이 교류했다. 그림에는 좌우가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임옥상의 ‘여기, 노란꽃'./사진=고운호 기자
    그는 고암 이응노 선생과 민중 미술 화가들과 깊이 교류했다. 그림에는 좌우가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임옥상의 ‘여기, 노란꽃'./사진=고운호 기자
    화상의 일은 첫 째도 둘 째도 좋은 그림이 손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화랑을 시작했을 땐 누가 좋은 그림을 가졌는지 몰라 무작정 ‘한국현대미술 전집’이라는 책을 사전처럼 들고 작가들을 찾아다녔다. “그럼 그 그림을 또 누구한테 파느냐? 연합통신에서 나온 재계인사록을 들고 고객을 찾아 나섰죠. 만나기가 어렵지 한번 만남이 성사되면 결정은 또 심플했어요.”

    -심플하다니, 어떤 면에서요?

    “좋은 그림 가진 분들은 큰 분들이에요. 재산도 명망도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런 큰 고객일수록 참 단순해요. 본인이 필요하냐? 그렇지 않으냐? 결정이 아주 쉽죠. 큰 작가도 그래요. 최종태 작가도 큰 화랑, 큰 고객들이 많았는데 나를 믿고 맡긴 후, 두 말이 없었어요.”

    그는 한국미술을 유지한 건 화상이 아니라 컬렉터라고 했다. 작가에게 베푸는 사랑만큼, 컬렉터에게 갖는 리스펙트가 대단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고객이 있다면요.

    “첫 고객으로는 황석연 변호사가 기억이 나요. 누나 황윤석 판사와 함께 남매 법관으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그분한테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아가서 그림을 팔았어요. 박동선 회장(로비스트이자 범양상선 기업일가로 유명하다)에겐 그림을 사러 찾아갔어요. 열 번 스무 번 찾아가서 처음 뵀는데, 그분 말씀이 “나한테 그림 사러 오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다" 그래요(웃음).

    -재벌 회장에게 찾아가 ‘나한테 그림 팔아라'고 말할 배포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그 그림의 운명이 이젠 세상으로 나와야 할 때라고 저는 본 거죠. 컬렉터는 존경받아야 해요. 결국은 미술도 돈이 있어야 유지가 돼요. 저도 돈이 있어야 작가를 지원하는데 그 스폰서를 컬렉터가 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 분위기는 그림 사는 걸 쉬쉬해요.”

    -그림 로비라든가 한편에서는 기업의 돈세탁으로 쓰인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지요.

    “컬렉터의 위상이 허약하면 그림 시장도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상당수의 컬렉터가 괜찮은 분들이에요. 작품을 샀던 분이 계속 사죠. 중국 거부들은 작품 사면 그 다음날 언론에 인터뷰를 해요. 원하던 작품이 경매에 나오면 내가 사겠다고 언론에 공표도 합니다. 바스키아 ‘무제' 작품을 1250억 원에 산 일본인 컬렉터 마에자와 유사쿠도 그 경우에요.”

    쇼핑몰로 큰돈을 번 젊은 사업가 마에자와 유사쿠는 작품을 산 이후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리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자신이 ‘바스키아의 새 주인'을 전 세계에 천명했다.

    -부러우신가요?

    “컬렉션도 흥미로운 현대 미술 활동이에요. 그걸 파티처럼 즐기는 문화가 있으니 좋죠. 우리나라에서도 IT 벤처로 돈 벌어서 그림 샀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어요.”

    -작년엔 이우환, 천경자 위작, 조영남 대작 문제로 미술계가 시끄러웠습니다. 화랑 입장에서는 신뢰에 타격을 입은 불편한 상황이었을 텐데요.

    “시장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봐요. 위작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계속 회자되어 왔어요. 그걸 너무 사건사고나 해프닝으로 몰고 가는 건 좀 아쉽죠. 그림도 고미술도 큰돈이 되다 보니 위작이 많고, 진짜처럼 만든 가짜 마켓도 큽니다. 이런 상황을 O X 개념으로 가지 말고 문화적인 관점으로 보면 좋겠어요.”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3100만홍콩달러에 낙찰되며 한국 현대미술 작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19-Ⅶ-71 #209’. 2017년엔 65억으로 또 최고가를 갱신했다.
    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3100만홍콩달러에 낙찰되며 한국 현대미술 작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19-Ⅶ-71 #209’. 2017년엔 65억으로 또 최고가를 갱신했다.
    -화상이라는 직업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미소 지으며)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죠. 좋은 컬렉터 뒤에는 늘 좋은 화상이 있다는 걸. 컬렉션을 어떻게 끌고 갈 지, 어떤 가치를 부여할지 화상의 입김이 커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매는 무엇이죠?

    “2015년 10월 경매예요. 중국인 고객이 김환기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어요. 소장자 입찰 방식이어서 그분께 한국 미술을 밖에 알릴 기회니 좀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안 팔리면 헛소리였을텐데, ‘푸른 점화' 작품이 그때 47억인가에 낙찰이 됐어요.(그 경매에서 박수근의 ‘빨래터'의 45억 기록이 8년 만에 깨졌다). 그 뒤로 계속 국제 시장에서 김환기를 비롯해 박서보, 정상화 같은 근현대 작가들의 탑 레코드가 만들어졌죠.”

    -해외에서는 투자 회사가 미술품을 많이 구매합니다. 여전히 국내외에 유동 자산이 풍부한데 미술품은 투자 상품으로 매력적입니까?

    “그럼요. 한때 서울 옥션 대표도 미술 전문이 아닌 금융 전문가에게 맡겼어요. 부자의 이상적인 코스가 결국 그림 컬렉션이에요. 부자면서 그림 안 사는 사람 없어요. 그림을 사면 삶이 풍부해지고 즐거워지죠. 그런데 또 돈 있다고 다 그림을 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컬렉터들 특징이 가정이 다복하고 성품이 깐깐하세요. 남자가 그림에 빠지면 아내한테도 보석 대신 그림을 사줘요(웃음).”

    미술작품도 주식이나 부동산처럼 경기가 좋지 않으면 가격이 떨어지지만 예술품 투자는 독특한 점도 있다. 다른 상품은 싸게 사야 현명하지만, 예술작품은 비싸게 살수록 좋다. 높은 가격에 사는 사람이 뛰어난 수집가다. 10만 달러 짜리 그림은 5만 달러로 가격이 내려갈 위험이 있지만 100만 달러짜리를 구매하면 언제든 최소 100만 달러에 다시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예술품 투자로 단기간에 큰 수익을 내려 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호재는 그림을 사는 것을 ‘자격 게임'이라고 했다. “아무나 못 사요. 돈으로 그림을 사는 건 맞지만, 돈 있다고 다 살 수 없는 게 그림인 거죠.”

    -어떤 그림을 사야 합니까?

    “컬렉션의 방향을 정하는 게 중요해요. 재산을 모으겠다면 비싼 그림을 사야죠. 하지만 비싼 그림이 좋은 그림이냐는 또 다른 문제예요. 시작하는 분이면 전문가 조언을 듣는 게 제일 좋아요.”

    이호재는 미술 거래를 주도했지만, 스스로 그림을 사랑해서 모은 컬렉터이기도 했다. 정작 그가 사들인 서예와 민중미술, 이중섭 작품 등은 미술관에 전부 기증했다.

    -정성껏 사서 절정에 이른 컬렉션을 기증할 때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던가요?

    “비싼 건 사실 고객에게 다 소개했고요(웃음). 저는 가치가 있는 데 대우를 못 받는 그런 걸 주로 샀어요. 나중에 값이 올라간 경우죠. 저는 여러 가지를 사기보다 한 분야에 집중해서 그 소장품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모았어요. 그게 ‘서예’와 특정 미술이었어요. 추사관이나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 서울시립 미술관에 민중미술을 기증할 수 있었던 것도, 컬렉션 내용에 흐트러짐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가령 글씨를 산 건 이응노 선생 때문이었어요. 1986년 이응노 선생을 뵙고 “이게 추상화입니까? 구상화입니까?” 물었더니 “내 그림은 글씨에서 온다" 그래요. 글씨가 동양의 모든 철학을 담고 있다는 거죠. 이응노 선생은 파리에서 서양인들에게 추상을 가르쳤어요. 그 근본이 글씨였어요. 정작 한국에 왔더니 글씨 시장이 없어서 내가 사 모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예술의 전당에 서예관이 작품이 부족해 다른 관과 합쳐질 처지에 놓였다고 해서, 또 그 작품들을 기증했죠.”

    한진섭의 조각 ‘호랑이' 옆에 선 이호재. 평생 돈 걱정하고 살았다는 거물 화상의 얼굴이, 욕심 없이 순하다./사진=고운호 기자
    한진섭의 조각 ‘호랑이' 옆에 선 이호재. 평생 돈 걱정하고 살았다는 거물 화상의 얼굴이, 욕심 없이 순하다./사진=고운호 기자
    -화랑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파리에서 가장 큰 화상 말링규를 찾아간 일이나 IMF 때 최초의 경매 회사인 서울 옥션을 만들고,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홍콩 미술 시장에 진출한 일 등 ‘첫 시도'에 주저가 없습니다. 혼돈의 순간에 점프해버리는 그 동력은 무엇입니까?

    “혼돈은 항상 있어요(웃음). 실패는 더 많았고요. 판화 공방이나 아트숍도 잘 안됐어요(웃음). 인터넷사업도 일찍 시작했죠. 가나아트닷컴을 1998년도에 열었는데 너무 일러서 실패했어요. 잘된 것보다 안된 게 많았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사업적 마인드로 할 일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점에 미술계에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돈을 벌면 다행인 거죠. 돈이 우선이었다면 유혹을 이기기 힘들었을 거예요.”

    -돈이 아니라면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요?

    “2015년에 우리 매출액이 1000억 원을 넘었어요. 돈 잘 버는 중소기업에 비하면 적은 숫자죠. 크리스티도 온라인 미술품 거래만 2000억이 넘어요. 우리나라는 모든 미술 시장 거래를 다 합쳐도 4000억이에요. 규모는 작지만 우리는 한국 작가와 작품을 남겨요. 인생을 같이 산 거죠.

    지난 2~3년간 한국의 단색화가 해외에 많이 소개되면서 최고가 갱신을 많이 했어요. 생각해보면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 미술 작가의 역량은, 우리가 그들을 대우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었어요. 돈 벌어서 서울 옥션 조직이 커지는 것보다 한국인으로 글로벌 뮤지엄 아티스트가 나오면 그게 더 의미 있는 일인 거예요, 저는.”

    -침대 머리맡에는 어떤 그림이 있습니까?

    “13년째 고영훈 작가 그림이 걸려있어요. 한 번도 뗀 적이 없어요.”

    누구보다 미술의 환전성을 신뢰하며 또한 미술의 순수성을 믿는 사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호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돈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나왔는데, 이상하게 돈 냄새가 안 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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