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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세계문학 고전(古典), 더 이상 읽은 '척' 하지마세요"

  • 김지수 기자
  • 입력 : 2017.09.16 07:00 | 수정 : 2017.09.18 07:48

    세계문학 고전(古典) 축역본(remaster edition) 낸 진형준 교수
    2500페이지 고전도 시집 사이즈 1권으로, 축역본(縮譯本)의 정본(正本)시대 열까
    읽지 않는 고전은 의미 없어… 10년간 기획, 총 100권 중 20권 먼저 선보여
    빅토르 위고는 잔소리의 대가, ‘레미제라블' 원전은 프랑스인도 못 읽어
    18살 영국 소녀가 쓴 '프랑켄슈타인'은 로봇 바라보는 현대인의 우화

    “내 조카이자 아들인 햄릿, 너는 왜 아직도 구름에 덮여있느냐?" “아닙니다. 전하. 저는 전하의 성은에 덮여있습니다.’’-셰익스피어 비극 ‘햄릿' 중에서(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 컬렉션 11권)

    “주님, 우리 내기할까요? 제가 슬며시 그자를 제 길로 끌어들여도 될까요? 전 그놈을 주님에게서 빼앗아올 자신이 있습니다.” “그가 지상에서 사는 한, 네 마음대로 하는 걸 막지 않겠다. 노력하는 인간은 헤매기 마련이니까.”-괴테 ‘파우스트' 중에서(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 컬렉션 19권).

    손에 잡히는 고전 축역본(縮譯本)낸 진형준 전 홍대 불문과 교수(65세). 총 100권 중 20권을 먼저 출간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손에 잡히는 고전 축역본(縮譯本)낸 진형준 전 홍대 불문과 교수(65세). 총 100권 중 20권을 먼저 출간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책 한 권 읽고 아득히 몽상에 젖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청소년기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때 읽었던 도스트옙스키의 ‘죄와 벌'이니 카뮈의 ‘이방인'을 자양분 삼아 평생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문학은 덜 여문 우리의 골수를 쪼개 새겨넣었다. 인간은 그리 간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삶의 갈피마다 오만과 탐욕과 질투로 찢기는 존재가 인간이며, 그리하여 인생에는 행복과 기쁨보다 불행과 슬픔이 더 많을 거라고. 기실 세계 문학의 고전이 내게 보여준 것이 ‘에덴'이 아니라 ‘지옥'이었으나, 그것은 어설픈 ‘희망'보다 나았다. 삶이 동화구연처럼 명랑할 수 없다는 것은, 동화책만 읽는 유치원생도 다 안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문학이라는 예방주사를 맞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컸다. ‘복잡성'을 포용하는 사이즈가 다르다고나 할까. 오이디푸스니 돈키호테니, 로빈슨 크루소 같은 기이한 ‘친구'를 가까이 두고 사귄 사람이라면, 타자와 세상을 향한 그 ‘헤아림'의 깊이가 오죽할까.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진형준 교수는 이를 일컬어 ‘문학이란 개인에게 배달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그렇기에 상상력이란 것도 경천동지할 창조력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세상과 사람이 되어보는 힘'이라고.

    그가 얼마 전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 컬렉션(살림)'을 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부터 조지 오웰의 ‘1984’까지,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세계 문학 명작 중 총 100권을 추려 다시 썼다. 한국문학번역원장을 지냈던 이력을 바탕으로, 자칫 장황하고 지루할 수 있는 고전을 짧고 쉽고 깊게 ‘축역'했다.

    시집 크기로 먼저 나온 20권을 보니, 축역은 완역의 에피타이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메인 디쉬다. 이를 두고 영문학자 채수환은 ‘원작의 정신은 생생한데, 글조차 쉽고 유려한 것은 오랜 문학공부로 작품을 장악하는 그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실로 베토벤이나 바흐의 곡을 완벽하게 변주해낸 연주자처럼, 쉬운 문장에도 깊은 격조가 드리워져 있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가을, 진형준을 만났다. 홍대에서 불문과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인터뷰가 있기 불과 며칠 전(8월 31일)에 정년 퇴임했다. 36년 넘게 다닌 직장이라고 했다. 퇴임식 날 아침에도 그는 어김없이, 새벽 2시에 일어나 글을 썼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다.

    -정년 퇴임 후에도 쓸쓸할 시간이 없겠습니다.

    “얼마 전 대학 총장님이 그러더군요. ‘끝이 아니라 이어갈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맞아요. 퇴임식 날 아침에도 9시 40분까지 쓰다가 나간 걸요(웃음).”

    -고백하건대, 저도 처음 읽은 책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읽은 척하느라 힘들었어요(웃음).

    “아무도 안 읽었어요(웃음). 나도 문학평론을 시작하기 전까진 오히려 책을 많이 읽었어요. 정작 평론을 하니 독서가 ‘무상의 기쁨'이 아닌 ‘소출 행위'가 되니 더 못 읽겠더라고. 그런데 이번에 다시 돌아가 ‘무상의 기쁨'으로 읽으려 해도, 고전이 너무 두껍고 어려워서 ‘야, 이건 폭력이다’ 그랬어요. ‘세계 명작이 좀 재밌냐? 제발 책 좀 읽어라'던 내 말이 결국 다 사기였다는 걸 알았어요. 고전을 직면하기엔, 나도 세상도 너무 많이 바뀐 거예요.”

    ‘문학은 개인에게 배달된 사람의 마음'이라는 신념을 지닌 진형준./사진=이태경 기자
    ‘문학은 개인에게 배달된 사람의 마음'이라는 신념을 지닌 진형준./사진=이태경 기자
    -100권의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4차 산업 혁명 세대를 위한’ 기획이라고 했습니다. 다들 ‘4차 산업 혁명'을 떠드니, 이미 그 말 자체가 고전이 된 느낌입니다만(웃음).

    “그건 순전히 아이들 생각해서 나온 말이에요. 미래는 소수의 일하는 사람과 다수의 빈둥대는 사람이 나눠진다잖아요. 부모들 마음이, 내 자식만큼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죠. 그런데 지금처럼 애들 교육하면 되겠어요?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오든, 거기서 사유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줘야하는데, 그 힘은 무조건 읽는 데서 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떠냐? 읽어야 할 고전은 많은데, 읽히는 고전은 드물다는 거예요.”

    -20권 먼저 나온 책은 일단 청소년 대상으로 나왔습니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데카메론' ‘돈키호테' ‘파우스트' ‘적과 흑'...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어, 성인이 읽어도 읽는 맛이 있던데요. 독자를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안 그래도 초·중·고 학생들, 일반인, 동료 교수들, 전문가들에게 읽어보라고 모니터링을 했더니, 그 비슷한 평가가 나왔어요. 친구 교수 한 명은 “햐~ 이건 문학 선생이나 작가 지망생 청년들이 읽어야겠다” 그래요. 그 친구가 ‘파우스트' ‘레미제라블'을 세게 가르치는 문학순교자거든(웃음). 이제까지 읽으라고 협박만 했는데, 세계 문학을 읽을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더군요.”

    -즐거운 사명감이 들겠습니다.

    “신도 나고 겁도 나지요. 100권을 계획했는데, 이걸 혼자서 어떻게 다하나 싶었어요. 2007년부터 기획했는데, 쓴 시간은 햇수로 5년 정도예요. 20권이 먼저 출간됐고, 현재 46권째 썼어요. 절반쯤 온 셈이죠.”

    -1년에 10권 남짓, 한 달에 한 권씩 썼다는 말인가요? 굉장한 속도인데요.

    “네. 내가 읽고 쓰는 속도가 빨라요. 자랑 같지만 남보다 10배 정도는 빠르죠(웃음).”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중독되면…(웃음) 이 나이 되면 잠도 없고, 어쨌든 매일매일 한다는 신념을 지키려고 했어요. 밤 10시 전에 자서 새벽에 2~3시쯤 일어나서 책상에 앉는 거죠. 점심 먹을 때까지. 대신 오후엔 일을 안 하려고 해요. 그런데 장기간 글을 쓰려면 체력도 필요해서 오후엔 산에 가는데, 어느 날은 날씨가 별로라서, ‘놀면 뭐하냐?’하고 책상에 도로 앉거든요. 옆에서 보던 집사람이 그럽디다. “당신, 꼭 컴퓨터 게임에 빠진 청소년 같다"고(웃음).”

    세계문학 컬렉션 18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
    세계문학 컬렉션 18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
    -20권의 문학 작품이 시간순으로 유기적인 맥락을 갖는 것도 놀라웠지만, 퀄리티가 고르게 유지된 것도 신기하더군요.

    “중학생인 내 조카 손녀가 읽는다, 고 상상을 하며 썼어요(웃음). 초등학생, 중학생 자녀를 둔 후배가 있어요. 그 친구가 자기 아이들은 외고 과학고가 목표가 아닌 아이로 키우고 싶대요. 그래서 웬만한 창작동화와 ‘먼나라 이웃나라'까지 줄기차게 책을 읽어줬는데, 어느 순간 ‘고전'의 문턱에서 턱 막히더랍니다. 그래서 책이 한 권씩 마무리될 때마다, A4지 상태로 그 집에 보냈어요. 아이들이 신이 났답니다. ‘일리아스' 읽고 식탁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전투 장면을 얘기하면서 놀더래요.”

    -단테의 ‘신곡'은 아이들에게 좀 어렵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론 ‘파우스트' ‘셰익스피어 비극'과 함께 ‘신곡'이 가장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아니요! 놀라운 건 아이들이 제일 재미있게 읽은 게 단테의 ‘신곡'이랍니다. 호기심은 인간의 지극한 본성이에요. 어렵다는 건 어른들 착각이죠. 죽음 이후의 ‘지옥'과 ‘연옥'에 대한 지적인 여행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궁금증이 무한대인 거죠.”

    -어쨌든 선생의 이번 고전 축역본을 통해 ‘번역이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다시 이슈화될 것 같습니다. 가령 김종건 교수는 제임스 조이스 연구에 일생을 바치며 ‘율리시스’를 완역하는 데 평생 공을 들입니다. 데버러 스미스는 한강 작품을 의역해서 맨부커상을 받기도 했죠. 한때 ‘어린 왕자’ 붐이 일 때는 번역의 오류가 지적돼서 말도 많았어요. 좋은 번역의 모범이 있습니까?

    “직역 주의자와 의역 주의자의 싸움은 늘 있었어요. 역사도 공이 있으면 과가 있듯이, 각자가 선호하는 번역 작업이 있고 모두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율리시스'를 완역하는 데 평생을 보내는 일만큼, 나처럼 10년 동안 100권의 책을 번역하는 일도 흉내 낼 수는 없는 일이라고 봐요. 번역가는 징검다리예요.”

    그는 “과거의 오류투성이 나쁜 번역이라 해도 묘하게 전해지는 감동이 있더라”고 했다. ‘번역은 반역이다'라고 한 롤랑 바르트의 선언을 뛰어넘는 장르가 문학 번역이라고.

    -이번에 ‘햄릿’의 독백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번역했지요? 햄릿의 갈등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이냐'라는 마음의 드라마라고 하면서요. 선생의 번역 작업이 음표를 재해석하는 지휘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죠. 문학이 뭐냐? 개인에게 배달되는 마음이에요. 마음을 이해하는 게 독서 훈련의 전부지요. 문학으로 다른 시대 다른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건 작가가 창조한 타인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그 마음이 되어보는 기회를 얻는 거예요.

    번역자로서 나는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데 최선을 다했어요. 단테의 ‘신곡'을 쓸 때는 당시의 정치적 격변기를 떠나서 그가 지금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 했죠. 어쩌면 내 해석대로 연주한 셈이에요. 나만의 영혼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고 그래서 ‘리마스터’라는 타이틀을 달았고요.”

    세계문학 컬렉션 7권 ‘데카메론'. 근대 소설의 선구작으로 평가받는 14세기 작품.
    세계문학 컬렉션 7권 ‘데카메론'. 근대 소설의 선구작으로 평가받는 14세기 작품.
    -어쨌든 원전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문화 속에서 ‘축역'은 대단히 과감한 결정입니다.

    “중요한 건 원전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요약하면 작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주요 부분 발췌만 했다면 짜깁기 누더기가 되죠. 나는 어떤 부분은 과감히 없애고 어떤 부분은 완전히 새로 창작해서 썼어요. 고전이 왜 읽기 힘든 줄 아세요? 모든 문장이 다 의미 있을 거라는 강박 때문이에요.

    그런데 당시 작가들도 원고료 때문에 쓸데없이 늘려 쓰는 일이 많았어요.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가들은 묘사의 취지랍시고 몇 페이지에 걸쳐 장황하게 디테일을 늘어놓기도 하죠. 빅토르 위고는 가르치겠다는 계몽 의지가 강해서 잔소리가 지나치게 많았어요.”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잔소리는 어떻게 하셨어요?

    “돼지 꼬리(문장을 덜어낼 때 쓰는 교정 용어)로 처리했어요(웃음). 그런데 빅토르 위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칼을 들었다...

    “아무리 위대해도 읽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위고의 ‘레미제라블' 원작은 500페이지 5권이예요. 그건 프랑스놈들도 못 읽어요. 장발장을 교화시키는 미리엘 주교 이야기가 1권의 3/4이야(웃음). 위고가 자기 종교관을 죄다 늘어놓은 거죠. 그걸 200자 원고지 1200매로 쳐냈어요. 2권으로 축역한 건 훨씬 재밌어요. 5권 원작 읽어본 교수 친구가 원작보다 낫다, 더구만. 허허.”

    -가장 재밌게 작업한 작품은 뭐죠?

    “알렉산드로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에요. 뒤마는 최고의 이야기꾼이에요. 위고 작품은 가차 없이 돼지 꼬리를 썼는데, 뒤마 작품은 같은 500페이지 5권이라도 그럴 수가 없었어요. 섣불리 뺐다가는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오는 뒷얘기를 감당 못 해요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신문 연재소설이었어요. 복수의 드라마로 알려졌지만, 응징만이 아닌 용서의 드라마예요. 쓰면서 몇 번 뭉클했고 멈춰서 눈물도 흘렸어요.”

    세계문학 컬렉션 5권 ‘열국지'. 오직 이 책만 원전이 아닌 번역본을 보고 작업했다.
    세계문학 컬렉션 5권 ‘열국지'. 오직 이 책만 원전이 아닌 번역본을 보고 작업했다.
    -반대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요?

    “중국 춘추전국 시대 영웅호걸과 진시황의 천하 통일 이야기를 다룬 ‘열국지(5권)'였어요. 다른 책은 전부 원전을 읽고 번역했는데, 이 책은 중국어라 신동준 씨가 옮긴 ‘실록 열국지' 3권을 바탕으로 새로 썼어요. 말로만 듣던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를 깊이 알게 됐죠. 무엇보다 쓰면서 동양과 서양이 제국을 형성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는 기쁨이 컸어요.

    ‘열국지(5권)' 시대 배경이 그보다 먼저 썼던 로마제국 건설 이야기인 ‘아이네이스(4권)'와 일부 겹치거든요. ‘아이네이스'는 베르길리우스라는 고대 로마 서사시인이 쓴 작품인데, 동서양에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로마 제국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진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은 극과 극으로 다릅니다.”

    -동서양의 정복사가 어떻게 다르던가요?

    “로마제국은 시선이 밖에 있어요. 주변국을 침범해서 점점 확장해 나가죠. 중국은 영토를 넓히는 게 아니라 명분을 세우는 게 중요해요. 진제국의 영웅들은 흩어진 가운데 새로운 중심이 되기 위해 싸웠어요. ‘열국지'를 쓰면서도 그랬지만, 문학사에서 세계사의 맥락이 맞춰지는 건 정말 놀라움이에요.”

    -특별히 저는 단테의 ‘신곡'에서 주인공인 나를 사후 세계로 데려가는 안내자로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등장한다는 게 놀라웠어요. 다 연결이 돼 있더군요.

    “하하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를 보고 감명을 받은 거죠. ‘아이네이스'에 지옥 경험을 묘사한 부분이 나오거든요. 그러니 지옥의 안내자로 베르길리우스를 적임자로 내세운 거예요. 그런데 베르길리우스는 또 그걸 ‘오디세이아(1권)'의 지옥 묘사 부분을 보고 썼어요. 그 시간 차이가 각각 700년이나 나요. 고전을 쓴 작가들도, 우리처럼 수백 년 전의 고전을 곁에 두고 읽고 썼다는 게 놀랍죠.”

    -쓰면서 발견한 즐거움을 조금만 더 나눠주시죠.

    “프랑스의 사실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가 어떻게 다른가도 재미있었어요. 예컨대 플로베르의 ‘보봐리부인'과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어떻게 다른가. 달라도 정말 달랐어요. 프랑스는 사실주의라도 내가 빠져있어요. 프랑스인들의 객관은 나를 제외한 객관이죠. 그래서 관념적이에요. 반대로 영국의 경험주의는 내가 뛰어들어가 경험한 객관이에요.”

    -동감합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누벨 바그 전통을 지닌 영화감독들이 많이 나왔고, 영국은 조지 오웰을 비롯해 뛰어난 르포르타주를 쓴 저널리스트들이 많아요. 그 모든 게 문학에서도 드러난다는 게 신기합니다.

    “그렇죠. 맥락을 갖고 읽는다는 게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이제까지 나온 세계문학 전집이란 게 어떠냐? 정리도 안 한 채 마구잡이식으로 슈퍼에 던져놓은 꼴이었어요. 시대별로 읽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일단 나는 기원전 8세기 작품인 ‘일리아스'에서 시작해서 1960년대 알베르 카뮈 작품까지를 목표로 잡았어요.”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세계문학 고전(古典), 더 이상 읽은 '척' 하지마세요"
    -‘맥락의 맛’을 위해 소설이 발표된 시간 순서대로 쓰고 있다는 거죠?

    “그렇죠. 유럽 고전을 먼저 썼고,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갔다 현대 작품으로 와요. 내가 읽은 것도 추리고, 각계 전문가들에게 추천을 받아서 열심히 목록을 만들고 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작가가 가장 천재적이라고 느껴지던가요?

    “고딕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예요. 그녀가 우리 나이로 20살, 영국 나이로 18살에 그 소설을 썼어요.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끔찍한 괴물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괴물이 처음부터 괴물이었냐, 아니거든요. 험하고 생기고 몸집은 컸지만 선량했어요. 그를 괴물로 만든 건, 겁에 질려 도망간 보통 사람의 시선이었어요.

    나는 그게 지금 벌어지는 AI와 우리의 이야기 같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이세돌이 알파고에 지고 나니, 사람들이 분해서 막 울어요. AI를 맞서야 할 괴물로 보는 거예요. 프랑켄슈타인이 자기 창조물을 괴물로 보듯이.

    AI는 연산 능력이 뛰어난 어린아이와 같아요. 그러니 잘 보호하고 갈 길을 잡아줘야지 괴물로 보면 진짜 괴물이 돼요. 그런 예지적 이야기를 18살 소녀 메리 셸리가 썼으니, 천재지요.”

    -‘프랑켄슈타인'이 그토록 현대적인 작품이라니요! 한편으로 이 모든 고전의 이야기가 마치 ‘어린 왕자'처럼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어린 왕자'를 20년 동안 강의 교재로 쓰는데, 여전히 매번 새로운 걸 발견해요(웃음).”

    -상상력을 전공했고, 한국 상상력 학회장으로 있는 거로 알고 있어요. 상상력이란 게 대체 뭐지요?

    “하하하. 그게 여러 사정으로 학회 활동을 안 한 지는 한 10년 됐어요. 쉽게 말하면 상상력이란 ‘어떻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할까’예요. 그걸 학생들한테도 떠들고 기업의 창조 경영 강의에도 불려 다니며 전파했는데, 다들 졸기만 해서 내 상상력만 커졌네, 그려. 허허.”

    -상상력이 가르쳐서 될 일인가요?

    “상상력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을 서로 맺어주는 공통분모라는 거예요. 그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세상을 봐야 유기적인 사고를 할 수 있거든요.”

    -결국 상상력의 자원이 문학인 셈이네요.

    “그렇지요. 나는 문학 비평도 상상력의 관점에서 했어요. 내가 가진 현학적인 이론으로 작품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 작가를 이해할까?’. 상상력을 발휘해서 철저히 작가의 입장이 돼보려고 했지요. ‘나와 다른 사람 되어보기'라는 관점을 문학으로 풀었으면 작가가 됐겠지만, 나는 평론으로 풀었죠. 그랬더니 시인 정현종이 평론을 읽고 “어이! 형사 나리" 그래요. “어찌 그리 내 속을 다 읽었냐?”고. 나는 그걸 공감의 비평이라고 합니다. 다 상상력에서 나온 거죠.”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가 어떤 식으로 셰익스피어니 스탕달이니 세계적인 대문호들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마음을 탐험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글을 쉽게 쓰는 건 선생의 타고난 재능입니까?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많이 읽어서지요. 어린 시절 정음사와 을유문화사의 깨알 같은 세계문학 전집을 읽었어요. 아마 아버지가 외판원한테 속아서 산 책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부모들한테 그래요. 당장 안 읽어도 좋으니 문학 전집을 애들 방에 꼭 가져다 놓으라고(웃음).”

    서울대 불문과 72학번. 한국 번역문학계의 대가인 김석희와 동문수학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서울대 불문과 72학번. 한국 번역문학계의 대가인 김석희와 동문수학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쉽게 쓰는 구체적인 훈련은 어떻게 했나요?

    “뻔하긴 해도 일기를 꾸준히 썼고요. 학창 시절에 어젯밤 읽은 단편 소설을 노트에 내 식으로 다시 옮겨 써서 쉬는 시간에 애들한테 읽어줬어요. 요거 내가 쓴 소설이다, 사기 치면서요(웃음).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이미 어린 시절 훈련을 했던 거죠.”

    -서울대 불문과 72학번이죠? 한국 번역문학계의 대가인 김석희 선생과 동문수학했는데,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도 합니까?

    “Nothing. 전혀요. 오로지 술만 마시죠(웃음). 그 친구는 소설가가 꿈이었어요. 요즘도 소설을 쓰고 있고. 청년 시절의 아이덴티티를 알고 있으니… 술 취하면 겨우 ‘너 번역 잘한다' 한마디 해줄 정도예요(웃음).”

    -35년 6개월 동안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보람이 있다면요.

    “딱 하나에요. 나는 아이들과 비교적 술을 많이 먹었어요. 대학 선생 중 나만큼 제자들과 술 많이 먹은 사람 없을 거예요(웃음). 제자들에게 그래요. 너희들이 나한테 배운 최대의 소득은 서로 간의 ‘사귐'이다. 앞으로 인생에서도 그 의미를 지켜가거라. 허허허.”

    진형준은 세계문학 ‘축역' 작업을 하기 위해 한평생을 달려온 것 같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으로 지냈던 기나긴 시간이 지금 이 일을 위한 훈련이 아니었나 싶다고. “청소년기에 읽은 책 한 권이 평생 가슴에 남으니, 이 얼마나 중대한 일이냐"고,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답하라. 수의를 입고 입관한 시신이 왜 그 수의를 찢었는가? 왜 조용히 누워있던 무덤에서 다시 나왔는가? 무슨 뜻으로 죽은 시체가 완전무장하고 이렇게 나타났는가? 왜 이곳으로 다시 찾아와 밤을 온통 공포로 물들이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인가?”-‘햄릿’ 중에서.

    축지법으로 걸었다 해도, 진 교수의 손을 잡고 맨눈으로 뚜벅뚜벅 읽어나간 문학의 대륙은 광활하고 신비했다. 옛사람들은 반딧불이를 등불 삼아 책을 읽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홀로 베갯머리에 엎드려 고전의 책장을 펼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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