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컨트롤 타워 없애고 계열사 자율경영, 60년 만에 '낯선 길'
재계 "재판, 핵심 증거 없이 평행선…여론에 영향받을까 걱정"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급적 빼놓지 않고 참석하는 해외 행사 중 하나가 매년 7월 초 미국 북서부 아이다호주(Idaho 州) 선밸리에서 열리는 ‘선밸리 미디어 콘퍼런스’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005930)경영기획팀 상무보 시절이던 2002년에 국내 인사로는 처음으로 초청받은 후 2011년을 제외하고는 작년까지 매년 이 행사에 참석했다.
선밸리 콘퍼런스는 정보기술·미디어·투자 분야의 유력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다. 이 부회장은 이곳에서 고(故)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팀 쿡 애플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래리 페이지 구글 CEO 등을 만나며 권위나 허례허식보다 실속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 비주력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삼성을 내실 있는 회사로 바꿔 가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작년 10월 27일 열린 삼성전자 임시 주주총회에서 등기이사로 선임돼 책임경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도 보여줬다.
이 부회장은 작년 12월 국정농단 관련 청문회에 참석해 “미래전략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또 경영과 관련해서는 “제 일은 저보다 우수한 분을 찾아서 모시는 것이며 우수한 분이 있으면 (경영을) 넘기겠다”며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올해 2월 구속되면서 삼성은 준비가 덜 끝난 상황에서 새로운 체제를 맞이하게 됐다. 그룹의 컨트롤 타워였던 미래전략실은 해체됐고 계열사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 재판이 반환점을 도는 동안 특별검사팀이 핵심적인 물증을 내놓지 못하자 “처음부터 여론을 의식해 무리하게 구속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도 특검의 논리를 부술만한 증거를 내놓지 못해 재판은 줄곧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 재계 “핵심 증거 없어 무죄 시 무리한 구속 비판받을 것”
주요 경제단체들은 이 부회장이 2월 17일 구속되자 “특검이 왜 구속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한국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당시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공식 입장 발표를 통해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제조업 전체 매출액의 11.7%, 영업이익의 30%를 차지하는 대한민국 대표기업”이라며 “삼성의 경영 공백으로 인한 불확실성 증대와 국제 신인도 하락은 가뜩이나 어려운 우리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작년 하반기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한 조사가 시작된 후 삼성은 잔뜩 움츠린 모습이다. 대규모 투자 소식도 없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사실상 총수 역할에 나섰던 2014년부터 작년까지 2년 동안 세계적인 전장(電裝·전자 장비)업체인 미국의 하만(Harman)을 국내 기업의 해외기업 인수·합병(M&A) 사상인 80억달러(9조4000억원)에 인수하는 등 크고 작은 20여개 업체를 사들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공격적인 M&A 전략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공격 경영이 멈춰선 실정이다.
재계는 이 부회장 재판이 재벌개혁과 맞물려 인민재판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재판의 핵심 중 하나는 삼성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지원한 400억원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지원을 바라고 내놓은 ‘뇌물’인가이다. 미르·K스포츠재단엔 삼성 외에 현대차(128억원), SK(034730)(111억원), LG(003550)(78억원), 포스코(49억원), 롯데(45억원), GS(078930)(42억원) 등도 출연했지만 이들 기업은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출연금이 다른 그룹보다 많긴 하지만, 다른 후원금을 낼 때도 그룹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며 “대가성이 있었는지는 재판에서 밝혀지겠지만, 재판이 여론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서른 몇 차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검이 핵심적인 물증을 내놓은 것이 없고 처음에 만들었던 프레임(Frame·틀)에서 조금도 벗어난 게 없다”며 “이 부회장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면 여론을 의식해 무리하게 구속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 총수 없는 4개월…체제 전환 과도기 겪는 삼성
삼성은 이 부회장이 구속되고 나서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고 있다. 삼성은 2월 말에 짤막한 보도자료를 냈다. 보도자료의 내용은 ▲미래전략실 해체 ▲각 사 이사회 중심 자율 경영 및 그룹 사장단 회의 폐지 ▲대관업무 조직 해체 ▲외부 출연금, 기부금 일정기준 이상은 이사회 승인 후 집행 등이었다.
삼성은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 시절부터 이름을 바꿔가며 60년 가까이 그룹의 컨트롤 타워를 유지해 왔다. 계열사가 늘어나면서 효과적으로 그룹을 관리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병철 회장이 1959년 비서실을 만든 게 시초다. 이후 비서실은 구조조정본부(1998~2006년), 전략기획실(2006~2008년), 미래전략실(2010~2017년)로 이름을 바꿨다.
컨트롤 타워는 계열사 정보를 취합해 세밀한 기획안을 만든 뒤 다시 계열사로 하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역할을 해왔다. 미래전략실의 기획력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전문 경영인의 실행과 함께 삼성 성공신화의 삼각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실체 없는 조직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자 이 부회장은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고 계열사 자율경영 체제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으로서는 낯선 길을 가는 셈이다. 계열사 자율경영 체제를 선언하면서 삼성 특유의 일사불란함은 사라졌다. 기존에 그룹이 일괄적으로 발표한 계열사 임원 인사는 이제 각 회사가 발표하고 하반기에 예정된 신입 공채도 계열사별로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삼성 관계자는 “과거에는 다른 계열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미래전략실이 확인하고 중복되는 부분이 있으면 정리를 해 줬는데, 지금은 누구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며 “말 그대로 계열사가 각자도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경영대)는 “(삼성은 지금 상황을)그룹 컨트롤 타워가 사라진 상황에서 경영 정상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다만 “세계 경영 트렌드가 신속한 의사결정이어서 이사회를 따라가는 방식을 계속 고수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박상인 서울대 교수(행정학)는 “삼성이 이사회 경영을 강화하는 건 옳은 방향이라고 본다. 삼성이 독립적인 이사회를 꾸려서 중진을 모으는 형태로 간다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재판 후 삼성, 어떻게 달라질까
이 부회장 재판이 반환점을 돌면서 시장의 관심은 재판이 끝난 후 삼성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로 쏠리고 있다. 우선 계열사 자율경영 원칙을 천명한 이상 계열사 스스로 살길을 찾고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는 가차 없는 구조조정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임원에 대한 신상필벌도 더 확실해질 전망이다.
삼성SDI 인사가 단적인 예다. 이 부회장은 ‘옥중 인사’ 1호로 2월 말에 삼성SDI(006400)사장을 전영헌 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으로 교체했다. 삼성SDI가 작년에 갤럭시 노트7 배터리 발화 사고, 중국 전기차 배터리 인증 탈락 등으로 9263억원의 영업손실을 낸 책임을 물은 것이다. 조남성 전 사장은 상근고문으로 물러났다.
앞으로 ‘돈이 되는 사업’에 집중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특검에 따르면 이 부회장과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 김종중 전 삼성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은 2015년 7월 7일 홍완선 전 국민연금관리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인위적으로 (삼성을) 장악하거나 다음 세대로 넘겨주기 위한 행위는 하지 않겠다. 애플처럼 돈을 잘 버는 사업구조로 삼성을 변화시키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과 만난 자리니 수익을 많이 내 주주에게 보답하겠다는 의미 아니겠냐”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그동안 삼성이 국가 정책에 발맞춰온 것은 사실인데, 앞으로도 국가 경제를 우선시 해 무리한 판단을 할 것 같지는 않다”며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사업부는 남겨두고 수익성이 낮은 사업부나 제품군은 앞으로도 구조조정을 계속 진행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했다.
삼성이 미래전략실을 해체했지만, 상장사 시가총액이 500조원 안팎에 달하는 삼성그룹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계열사 간 역할을 조율하는 기구가 생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른바 ‘삼성 저격수’로 불린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기업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진 게 없어서 여러 추측이 나오고 있지만, 모든 일은 이 부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다음에 벌어질 일들”이라며 “이 부회장이 유죄를 받으면 삼성의 혼란은 상당 기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