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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閑담] 전화번호 바꾼 황영기 금투협 회장을 보며

  • 전준범 기자
  • 입력 : 2017.04.21 10:45 | 수정 : 2017.04.21 11:27

    ‘제 전화번호가 변경됐습니다. 번거로움을 끼쳐 죄송합니다.’

    지난 19일 오후 3시쯤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보낸 이는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면서 연락처에 저장된 사람들에게 공지한 것입니다. 황 회장은 010을 뺀 나머지 8개 번호를 기존과 전혀 다른 숫자로 싹 바꿨습니다.

    국내 금융투자업계에서 황 회장은 욕심 많은 남자로 통합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도, 인재에 대한 욕심도 많습니다. 또 공격적이고 거침없는 사람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여느 협회장들과 달리 기자에게도 휴대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망설임 없이 쥐어주는 정도죠. 마치 “전화해. 난 겁날 게 없다”고 선포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별명이 ‘검투사’입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전화번호를 바꿔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개인 캐릭터를 떠나 황 회장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번호 변경은 매우 신중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국내 증권가에서는 별 일 아닌 듯한 이 상황의 연관 키워드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삼성물산, 장충기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등을 거론합니다. 현재 한창 진행 중인 이 부회장과 삼성그룹 수뇌부 4인에 대한 공판 과정에서 황 회장의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황 회장과 삼성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 조선일보DB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 조선일보DB
    이번 공판에서 공개된 장충기 전 사장의 진술조서에 따르면 황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찬반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15년 7월 장 전 사장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진형 한화증권 사장과 통화했다. ‘이미 한 차례 반대 의견을 냈는데 굳이 또 반대 의견을 낼 필요가 있겠느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데없는 가정으로 불필요한 소란을 만들지 말라’고 강하게 말했다.” 황 회장은 이후 이런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한화증권은 역시나 하고 싶은대로 했다(반대 의견). 미안하다. 외부에서 삼성을 돕는 사람이 많다.”

    당시 황 회장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찬성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간담회 등을 통해 “외국 헤지펀드가 한국의 자본시장을 농락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으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검투사답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게다가 삼성물산(028260)은 1975년 황 회장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직장이기도 합니다. 금투협 수장으로서 국내 자본시장을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친정(삼성물산)에 대한 애착까지 더해졌을 겁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주 전 사장에게 전화까지 건 그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당시 한화증권은 국내 기관투자자 22곳 중 유일하게 합병에 관한 부정적인 보고서를 냈습니다. 황 회장 입장에선 주 전 사장이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더욱이 한때 삼성증권에서 직속 부하직원이었고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갈 때도 데려갔던 주 전 사장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상황에 찝찝함이 남습니다. 황 회장 입장에선 옛 회사의 편한 후배에게 건 전화 한 통일지 모르지만, 국민 입장에서 보면 일개 증권사에 대한 금융투자업계 수장의 압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권사 리포트에 자율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어느 개인투자자가 그 리포트를 믿고 투자하겠습니까.

    황 회장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전화번호를 바꾼 진짜 이유를 듣진 못했습니다. 쏟아지는 전화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고, 이번 사건과 무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분명한 건, 황 회장이 남은 10개월의 임기 동안 국내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해 더 분발해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단, 새로 바꾼 전화번호로는 논란이 일지 않을 정도의 연락만 취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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