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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 파워리더] 프랑스 브랜드 역수출하는 불굴의 패션맨, 루이까또즈 전용준 회장 '역발상' 경영

  • 김지수 문화부장
  • 입력 : 2017.04.22 07:00 | 수정 : 2017.04.23 19:16


    ‘흐르는 물처럼' 루이까또즈 전용준 회장의 다이내믹 ‘예술 경영’
    2006년 프랑스 오리진 브랜드 루이까또즈를 인수해서 키운 역전의 패션맨
    합리적인 매스티지 시장에서 업계 1위 고수, 2위는 닥스 3위는 메트로시티
    프랑스에서 예술공헌 훈장 받고, 강남 금싸라기 땅에 순수 문화공간 세워

    루이까또즈 전용준 회장(64세)이 논현동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플랫폼 엘’에서 루이까또즈 브랜드 심벌이 달린 문을 힘껏 밀어젖히고 있다./사진=김지호 기자
    루이까또즈 전용준 회장(64세)이 논현동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플랫폼 엘’에서 루이까또즈 브랜드 심벌이 달린 문을 힘껏 밀어젖히고 있다./사진=김지호 기자
    작년 5월 금싸라기 땅 논현동 한복판에 특이한 건물이 나타났다. 알루미늄을 새 둥지처럼 엮어올린 마름모꼴의 세련된 건물은 루이까또즈를 전개하는 패션 기업 태진인터내셔널이 세운 순수 문화 공간 플랫폼 엘((Platform L)이다.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라는 정체성답게 플랫폼 엘은 개관 기념전으로 중국의 설치 작가 양푸동의 1920년대 ‘상하이의 신(新)여성’을 소개해 오프닝부터 단번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논현동의 ‘힙한'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총면적 2,173㎡, 지상 4층에 건물 한가운데 드넓은 중정까지 갖춘 이 공간은 평일에도 전시를 보러 온 관객들로 빼곡하다.

    4월 어느 날, 플랫폼 엘을 찾았다. 장사가 될만한 해외 스타, 이제는 옆집 아저씨처럼 뻔해진 인상파 화가, 유명 미술관 소장품 기획전이 난무했던 미술계에, 동시대의 최전선에 있는 ‘진짜’ 현대 미술을 보고 싶어서였다. 플랫폼엘 지하 2층 공간에 들어서니, 7개의 초대형 스크린이 180도 각도에 다층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클로즈업과 줌업의 다각도 앵글이 현란하게 펼쳐지며 뇌세포를 가격했다.

    레이캬비크의 부동산 개발업자부터 두바이의 필리핀 가정부, 런던의 헤지펀드 매니저, 영화배우 장만옥까지 등장해 자본의 화려함과 삭막함을 증언하는 이 거대한 필름 숲에서 정신줄을 놓고 있는데, 입구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가 들어섰다. 그는 애정 어린 눈으로 잠시 영상을 지켜보더니 사라졌다. 플랫폼 엘의 기초를 세운 주인이자 루이까또즈의 CEO인 전용준 회장(64세)이다.

    며칠 후, 전용준 회장에게 만남을 청했다. 인터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소문답게 오랜 침묵 끝에 응답이 왔다. ‘명품이냐 럭셔리냐, 로컬이냐 라이선스냐’ 답 없는 명분 싸움을 벌이는 패션계에서, 2006년 프랑스 오리진 패션 브랜드 루이까또즈를 인수해 한불 양국에서 화제를 일으킨 반전의 사나이. 단발성 이벤트로 그치는 문화 마케팅을 ‘패션업'의 일부로 밀어붙인 묵묵한 예술 경영자. 깐깐하기로 유명한 프랑스가 그의 공로를 인정해 2013년 프랑스 문화예술공헌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했다.

    에르메스나 까르티에 문화 재단처럼 대한민국 현대 미술의 플랫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플랫폼 엘의 세련된 외관. 태진인터내셔널이 기부금을 출자해서 세운 태진문화재단이 운영한다. 루이까또즈는 기부 금액만큼 세제 혜택을 받는다./사진 제공=루이까또즈
    에르메스나 까르티에 문화 재단처럼 대한민국 현대 미술의 플랫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플랫폼 엘의 세련된 외관. 태진인터내셔널이 기부금을 출자해서 세운 태진문화재단이 운영한다. 루이까또즈는 기부 금액만큼 세제 혜택을 받는다./사진 제공=루이까또즈
    전용준 회장은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위스콘신대에서 MBA를 받았다. 1980년부터 10년간 삼성물산에 재직하다, 1990년 37세에 자본금 5천만 원으로 태진인터내셔널을 창업했다. 현재 매출 규모는 1,400억이다. 호황기에는 2,000억을 넘어서기도 했다.

    -지금 플랫폼 L에서 전시하는 영국 필름 아티스트 아이작 줄리언은 알고 있던 작가였나? 거대한 규모의 전방위적인 비디오 작품 ‘플레이타임(PLAYTIME)’이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전염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놀랍다. 기업 하는 사람에겐 부담스러운 주제였을 것도 같은데.

    “유명한 아티스트다. 얘기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추진이 잘 됐다. 나는 예술 작품은 오로지 예술로서 존중한다. 아이작 줄리언 작품은 캐피털에 대한 시각, 자본의 흐름과 위기가 어떻게 세계 구석구석의 개인에게 침투하고 있는지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넘나들며 다각도로 보여주고 있다. 수십 번을 봤지만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온다. 신선하지 않은가.”

    -아이작 줄리언이 좌파 경제학자와 데이비드 하비와 대담하는 영상 ‘캐피탈’도 하나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역시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둘러싼 이야기라 기업인 입장에선 반감이 들지 않던가.

    “(웃으며)흥미롭다. 3층 작품 ‘레오파드'는 보았나? 캐피탈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난민 탈출을 다루고 있다. 기근과 전쟁을 피해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오다 죽기도 한다. 위험에 직면한 인간의 생존 형태를 예술 작업으로 풀어냈다. 나는 파인 아트는 있는 그대로 본다. 커머셜은 또 커머셜대로 자세가 달라진다. 그래야 공간이 고이지 않고 다이내믹해진다.”

    영국 출신의 필름 아티스트 아이작 줄리언의 비디오 설치 작품 ‘플레이타임'./사진제공=루이까또즈
    영국 출신의 필름 아티스트 아이작 줄리언의 비디오 설치 작품 ‘플레이타임'./사진제공=루이까또즈
    서울 강남 한복판에 당장 돈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순수예술 공간을 짓는다는 것은 문화에 대한 오너의 철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문화예술 후원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2008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파리 퐁피두센터 특별전을 비롯해 2011년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글로벌 미디어 아트 채널 SFE 공식 파트너, 2012년 베이징 자금성에서 열린 ‘조르주 브라크 전’, 2014년 ‘오르세미술관전', 2015년에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국내 젊은 신진작가들의 작품활동을 후원했다. 메세나 활동은 미술을 넘어 음악에도 이어졌다. 200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2013년 부산 국제영화제 및 프렌치 나이트, 2016년부터 베르사유 궁전의 오페라 홀 ‘오페라 로열' 등도 지속해서 후원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취향과 관심이 대단히 진지한 편인 것 같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 규모이면 홍콩 뉴월드 그룹의 에이드리언 쳉같은 미술적 안목이 높은 기업가가 나와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플랫폼 엘도 그렇지만, 나한테 문화 마케팅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프랑스 장인 정신이 깃든 패션 기업을 하다 보니, 그쪽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더라. 프랑스 사람들은 문화와 역사가 빠지면 사람을 우습게 본다(웃음). 그러다보니 공연, 전시, 영화제 등을 돕게 되더라. 프랑스 영화제나 전시회, 음악회, 오페라 그런 것들을 후원하다 보니, 덕분에 경영자인 나도 남다른 재미를 느끼고 있다. 전시는 전시만 하고 끝이 아니다. 그것을 또 제품에 응용해서 한정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우연한 계기였다. 삼성물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가죽 제품 공장을 하는 친구가 국내 라이선스를 찾는 프랑스 기업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마침 싱가포르에서 루이까또즈 제품이 맘에 들어서 몇 개 산 기억이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바로 시작했다. 수입과 생산을 병행했다. 15년 정도 라이선스 피를 내다가 2006년에 아예 인수했다.”

    루이까또즈는 1980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유서 깊은 장인 가문 출신인 폴 바렛에 의해 탄생했다. 예술과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태양왕 루이 14세에서 브래드 이름을 따왔다. 전용준 회장이 1990년에 한국에 라이센스를 가져와 정식 런칭했으며, 고가 수입 명품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매스티지(Masstige)’ 시장에서 핸드백과 지갑 등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현재 중국과 UAE의 두바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등 전 세계 매장을 확대하는 중이며, 지난 3월 연 3,000만 명이 방문하는 프랑스 라파예트 백화점에 국내 최초로 정식 매장을 오픈하는 쾌거를 올렸다.

    -당시에도 지금도 한국이 명품의 본고장인 프랑스 브랜드를 인수한다는 건 파격적인 결단이다.

    “당시 프랑스가 일본,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우리나라에 라이선스를 주고 있었다. 내가 40대 초반에 사업 시작해서 15년 정도 잘했으니, 소유주가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 같다. 이런 형태의 몇몇 M&A가 다 그렇지만, 휠라나 MCM도 사업이 잘 안 되고 있으니 넘긴 것 아니겠나. 그걸 우리가 받아서 열심히 살려낸 것이고.”

    밤에 푹 잠을 잤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전용준 회장. 그는 패션은 인간 종이 유지되는 한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사진=김지호 기자
    밤에 푹 잠을 잤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전용준 회장. 그는 패션은 인간 종이 유지되는 한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사진=김지호 기자
    -국적을 바꿔 런칭할 때 어떤 전략을 썼나?

    “90년대는 니나리치가 국민 백이었다. 해외 럭셔리 제품도 하얏트 호텔에 가면 카르티에 백이나 시계 정도를 살 수 있었을까. 루이까또즈는 그에 비하면 사이즈가 작은 회사였다. 당시에 니나리치가 12~13만 원 대의 제품을 내놓았는데, 우리는 파격적으로 30만 원 대에 백을 출시했다. 좋은 가죽에 클래식한 디자인이 빅히트를 쳤다. 버건디 컬러에 베르사유 장미 문양 로고가 박힌 백으로 루이까또즈를 각인시켰다. 다행히 IMF를 거치면서 핸드백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고 성장했다.”

    -경쟁자는 누군가? 예전에 MCM을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성주 회장과는 경영마인드가 많이 다른 듯한데.

    “MCM은 해외 시장 특히 중국시장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마인드는 물론 시작부터 그분과 나는 다르다. 나는 돈도 없이 서민 출신으로 시작했다. 나에 비하면 그분은 재벌 격이다. 수완도 아주 좋다(웃음). 나는 스텝 바이 스텝으로 조금씩 왔다.”

    -경영 철학이 ‘흐르는 물처럼'이다. 얼핏 듣기엔 무리를 안 하는 것 같지만,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윤리 경영이 최고 우선 가치다. 그다음엔 물은 고이면 썩으니 계속 흘러야 한다는 혁신 경영,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사회적 책임과 약자 포용 경영,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는 글로벌 경영, 이렇게 네 가지를 기준으로 가고 있다.”

    -윗물이 맑아야 한다는 윤리 경영이나,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는 사회적 책임 경영은 리더로서 행위의 진정성이 담보되어야 하지 않나?

    “당연하다. 회사 자본에 비리가 생기면 금전적 문제뿐 아니라 직원들의 마인드가 타격을 입는다. 우리 직원들은 인성이 착하고 전문성이 뛰어나다. 그들에게 내 비전을 걸만한 곳이라는 확신을 주려고 노력한다.”

    -어떤 리더인가?

    “덕장이냐 용장이냐 묻는데, 막장만 아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웃음). 망하는 회사를 보면 CEO 성격이 아주 특이하다. 나는 리더가 높은 데서 군림한다는 생각을 경계한다. 직원들을 믿고 위임하는 편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안 하고 방임하면 호통을 친다. 중요한 건 일관성이다. 말이 수시로 바뀐다거나 중간 체크를 하지 않고 흐지부지되는 일이 잦으면 직원들은 헷갈린다.”

    -프랑스에서 슈발리에 훈장을 받을 때는 기분이 어땠나?

    “나라에서 받은 훈장이 두 개다. 하나는 우리 정부에서 정직하게 세금 낸다고 준 상이고, 또 하나가 프랑스에서 준 명예 훈장이다. 슈발리에 훈장은 외국에서 받은 문화 훈장이라 그런지 더 각별했다.”

    오르세 미술관 전시를 후원하고 그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나온 루이까또즈의 한정판 가방./사진제공=루이까또즈
    오르세 미술관 전시를 후원하고 그 이미지에 영감을 받아 나온 루이까또즈의 한정판 가방./사진제공=루이까또즈
    -사업적으로 어려웠을 때는 언제였나?

    “IMF 때는 오히려 쉽게 극복했다. 요즘이 힘들다. 경제가 다운되고 유통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진통을 겪는 중이다.”

    -패션 시장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나?

    “얼마 전에 미국의 유명 마케팅 컨설팅 회사에서 자문을 받았다. 지금 패션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다. 하이 패션 시장은 좋지 않고, 상대적으로 합리적 명품이라고 불리는 매스티지 시장은 유지가 되고 있지만, 저렴한 매스 시장에서 시장 참여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체 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신진 개인 디자이너, 개미 군단, 온라인 플랫폼 등으로 진입 장벽은 낮아졌는데, 핸드백 시장의 파이는 커지지 않고 있다. 현재 백화점 유통은 시들해졌기 때문에, 면세점과 온라인 플랫폼 등 새로운 유통 라인을 만드는 게 큰 숙제다.”

    -어떤 타개책을 세우고 있나?

    “상생이 답이다. 힘을 합쳐야 한다. 백화점은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말로만 상생을 외치기 때문에, 협력사들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우리 브랜드만 혼자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령 얼마 전에 문구 브랜드 모나미 볼펜, 출판사 미메시스와도 협업을 했고, 슬로우파머시라는 작은 조경업체와도 백화점 매장에서 팝업스토어를 했다. 다양한 업체들과 적극적으로 공동마케팅(Co-Marketing)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가죽 이외의 다른 머티리얼과 협업했다면 이제는 범위를 탄력적으로 넓히고 있다.”고 그가 덧붙였다. 루이뷔통, 샤넬 등의 명품도 매출이 부진한 매장을 철수하는 등 전 세계적인 패션 불황 속에서 전용준 회장이 내놓은 출구 전략은 ‘각자도생'이 아닌 ‘함께 살자'다.

    루이까또즈의 베스트셀러 및 스테디셀러 아이템.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프렌치 시크 스타일을 표방한다./사진 제공=루이까또즈
    루이까또즈의 베스트셀러 및 스테디셀러 아이템. 심플하고 고급스러운 프렌치 시크 스타일을 표방한다./사진 제공=루이까또즈
    국민 볼펜을 만들어 내는 필기류 회사, 신개념 미술품 렌털 컴퍼니, 심지어는 전구 업체 등 10개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이들의 상품과 함께 자연스럽게 핸드백을 진열하자, 천편일률적인 핸드백 매장이 품격 있는 ‘아트 스튜디오'의 꼴을 갖게 됐다. 혁신적인 발상이다. 아트 플랫폼을 넘어 컬처 플랫폼으로의 상생과 도약. 백화점 내 컬처 플랫폼 전략으로 루이까또즈 매장은 점점 패션 잡화 매장이 아닌 라이프스타일 라이브러리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아트와 커머셜은 서로 등 돌리고 있는 것 같아도, 잘만 소통하면 놀라운 융합에너지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이미지 호객만 하다 끝날 수도 있다. 루이까또즈의 문화재단은 그렇지 않을 자신이 있나?

    “플랫폼 엘은 강남에 있지만, 나는 주로 동대문 신설동 본사에 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웃음). 열심히 벌어서 문화재단으로 기부금 형태로 출자하고 있다. 그걸 통해서 우리 국민이 문화적 혜택을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 새로운 작가가 이곳을 통해 데뷔하고 해외 무명작가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싶다. 학교 짓고 고아원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잘하는 건 문화 사업이니까. 탤런트가 있는 젊은이들을 돕고 싶다.”

    -패션 기업가들은 업종의 성격상 판타지를 추구하는 데 전 회장은 마인드가 많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는 게 환상을 심어줄까 봐서다. 솔직담백한 게 좋다. 기업가에 대해 대책 없이 환상을 심어줬다가 실망을 안겨준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 대표적으로 ‘성공시대' 같은 방송 프로는 웬만한 기업가들은 다 출연했지만, 대부분 부도나고 그중에 지금 살아남은 회사는 얼마 없다.”

    -자부심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표면적으로는 한국이 프랑스 브랜드를 인수했다는 것. 실제적으로는 좀 다르다. 처음 직원 세 명과 자본금 5천만 원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계속 벌어서 잉여금이 생기고, 직원들이 늘어나고, 그들이 결혼하고 가족의 생계를 부담하고 있다. 협력사까지 포함하면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기업으로 함께 먹고살고 있다는 게 참 뿌듯하다.”

    클래식과 다이내믹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용준 회장./사진=김지호 기자
    클래식과 다이내믹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용준 회장./사진=김지호 기자
    -얼마 전 파리 오페라 지역에 있는 120년 전통의 라파예트 백화점 1층에 입점했다. 높은 문턱을 어떻게 뚫었나?

    “굉장히 힘들었다. 2014년부터 팝업스토어를 여섯 번이나 했다. 중요한 건 매출이다. 같은 공간에 있던 루이뷔통 그룹의 로에베보다 매출이 높게 나왔다. 프랑스 문화를 전파했던 일이나 슈발리에 훈장, 플랫폼 엘도 좋은 레퍼런스가 됐다.”

    -영향받은 기업인이 있다면?

    “우리 아버지가 내복 공장을 하셨다. 6.25 직후였으니, 나는 주로 아저씨들이 먹고 자는 작업장에서 자랐다. 기계 밑에서, 실더미 위에서 놀았다. 요즘엔 아버지 밑에서 일하시던 아저씨들이 자주 생각나고 만나고 싶다. 어떤 유명한 기업가들보다 그 공장 기술자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나?

    “아버지에게는 이성적인 꼼꼼함을 받았다. 반면 어머니에게는 감성적인 대담함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좌뇌와 우뇌를 고루 쓸 줄 알게 됐고, 지금 같은 문화 사업을 하게 된 것 같다. 기업 하면서 화려하진 않지만 내실 있게 꾸려가는 분들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그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아들 중 한 명은 미술관 사업을 돕고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재산도 먹고살 만큼만 물려줄 계획이라고 했다. “오버하면 망치는 길이다.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평범한 가운데 생활이 조금 더 나은 정도가 좋지 않은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내가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손가락질받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기업을 경영하고, 욕심이 있다면 지금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죽고 싶다. 살아서 누린 영화는 죽으면 다 소용없다. 사실 루이 14세도 죽은 후 동상 빼고 누가 그 사람을 기억하겠나(웃음). 돈 벌어서 무덤에 넣고 갈 것도 아니고, 부를 좀 더 유지할 수 있다면 체계적인 도네이션 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다음 세대나 후배들이 우리 세대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아버지보다 낫다는 얘길 들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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