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테마 인터뷰

[패션계 파워 리더] 핸드백 왕초, 박은관 "18만 개의 디자인, 5,800년 집념의 시간으로 세계 1위 됐다"

  • 김지수 문화부장
  • 입력 : 2017.03.11 07:00 | 수정 : 2017.03.13 18:28

    명품 핸드백 세계 제조 1위, 시몬느 박은관 회장
    명품 가방 10개 중 한 개가 시몬느 제품, 명품 ODM을 넘어 자체 브랜드 0914도 런칭
    회사명 시몬느는 아내의 애칭, 제품명 0914는 아내와 재회한 날
    바다 사나이의 집념으로 땀과 시간을 담은 핸드백 만들어

    명품 핸드백 제조 세계 1위,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63세). 인천 수산해운업체 1위 기업이었던 ‘황해수산'을 경영하던 부친에게 사업가의 피를 물려받았다./사진=이태경 기자
    명품 핸드백 제조 세계 1위,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63세). 인천 수산해운업체 1위 기업이었던 ‘황해수산'을 경영하던 부친에게 사업가의 피를 물려받았다./사진=이태경 기자
    2012년 7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 길에 세계에서 가장 큰 핸드백이 등장했다. 지하 5층, 지상 5층의 거대한 핸드백 모양의 이 건물은 사실 핸드백 제조 회사 ㈜시몬느 SIMONE 가 건립한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Bagstage’다. 백스테이지는 세계를 통틀어 최초이자 유일한 핸드백 박물관이다.
    뉴욕타임스는 ‘서울에 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할 곳’으로 이곳을 소개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핸드백에 바쳐진 성전’이라 칭송하며 이곳의 개관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왜 세계 최초의 핸드백 박물관이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아니라 대한민국에 만들어진 것일까?

    ◆ 1년에 2천 만개, 명품 핸드백 만든다

    백스테이지를 만든 사람은 시몬느의 회장 박은관이다. 해외 패션관계자들은 그를 세계 명품 핸드백을 지휘하는 히든 마에스트로라고 무른다. 현재 그가 이끄는 시몬느는 핸드백 제조 분야에서 매출액 세계 1위. 핸드백 수출로 매년 10억 달러 이상, 소비자가 7조 원에 이르는 매출을 달성하고 있다. 1년 생산 제품만 2천 만개, 유럽산 명품 핸드백의 10%, 미국산 명품 핸드백의 30%가 시몬느 제품이다. 즉, 지금 길거리에 여성들이 들고 다니는 명품 핸드백 10개 중 한 개는 시몬느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은관 회장이 가로수길에 세운 전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 건물 자체가 핸드백 조형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가면 핸드백의 기원이 되는 제품부터부터 시가 1억 원짜리 에르메스 ‘버킨백’까지 다양한 백을 볼 수 있다.
    박은관 회장이 가로수길에 세운 전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 건물 자체가 핸드백 조형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가면 핸드백의 기원이 되는 제품부터부터 시가 1억 원짜리 에르메스 ‘버킨백’까지 다양한 백을 볼 수 있다.
    박은관이 명품 스토어가 즐비한 도산공원 앞에 시몬느의 플래그십 빌딩 부지를 확보한 스토리도 유명하다. 2012년 당시, 이 건물 부지는 법원 감정가만 228억 5,600만 원, 이면도로 단독주택에 사상 최고가의 가격이라 삼성계열 제일모직이 인수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설로 제기됐다. 경매 뚜껑을 열어보니, 제일모직과 시몬느의 격차는 컸다. 제일모직의 입찰가는 266억 1,116만 원, 시몬느의 입찰액은 287억 원이었다. 언론은 ‘돈으로 삼성을 이긴 기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애처가인 박은관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꼭 아내와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적인 판단에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덜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모범답안을 찾아내곤 했기 때문이다. 30년 전, 시몬느 창업 당시 “시작하고 싶으신 것 아닌가요?” 반어적인 미소로 동의해주었던 것처럼, 아내는 시몬느의 플래그십 경매에서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글쎄요, 꼭 갖고 싶은 것 아니에요?”

    참고로 기업 이름인 ‘시몬느’는 그가 아내 오인실을 부르는 애칭이며, 건물 이름인 ‘0914’는 그가 헤어졌던 아내와 재회한 날(9월 14일)이다. “아내는 간단하지만 맞는 말만 하지요.” 꼭 갖고 싶은 곳이라면 사실 금액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현재 랄프로렌과 에르메스 사이에 있는 ‘0914’ 건물은, 붉은 벽돌과 흰 외벽의 기하학적 돌출 디자인으로 독특한 한국적 기품을 발하고 있다.

    박은관의 이런 로맨틱하고 와일드한 경영 방식은 창업 초기부터 드러났다. 1987년, 서른 두 살에 잘 다니던 청산이라는 핸드백 제조업체를 나온 그가 뉴욕의 도나카란을 찾아간 일화는 유명하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은관의 답은 간단하다.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된다는 것.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나 카란 뉴욕 컬렉션을 표적으로 삼았다. 그가 처음 한 일은 백화점에 직접 가서 하나에 2,000~3,000달러나 하는 도나 카란 브랜드 핸드백 일곱 개를 사서 분해한 일이다. 분해하면 다시 조립하고, 조립이 완료되면 또다시 분해했다. 박은관은 이탈리아에 가서 똑같은 가죽과 장식을 구입해 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샘플 핸드백 10개를 들고 도나 카란 뉴욕 컬렉션 본사에 불쑥 찾아갔다

    ◆ ‘메이드 인 이태리’가 ‘메이드 인 코리아’가 된 사연

    “이 가방을 보세요. 내가 만든 가방입니다. 이 가방을 유럽보다 30~40% 저렴한 가격에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내게 일을 맡겨 보세요.” 제품에는 감동했지만, ‘메이드 인 이태리'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로 라벨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이 돼보자"고 도나카란 임원들을 설득한 그는 다음날, 240개의 첫 주문을 따냈다. 비로소 명품 생산 라인이 아시아로 이주하는 첫 관문이 열렸다.

    도나 카란이 유럽의 공방에서 대한민국 서울 영등포에 있는 시몬느라는 작은 회사로 생산 공장을 바꾸었다는 소문은 미국 패션업계 전역에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자연스럽게 랄프로렌, 오스카 드 라렌타, 캘빈 클라인 컬렉션 등의 담당자들이 시몬느의 문을 두드렸다. 2000년대부터는 루이뷔통, 셀린, 로에베, 지방시, 크리스찬 라끄르와, 버버리 같은 유럽 브랜드들도 시몬느를 찾아왔다.

    30년이 지난 지금, OEM(주문자 상표 부착)을 넘어 명품 핸드백 ODM(제조자 개발생산)업체로 시몬느가 그간 만들어온 제품은 코치,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콥스, DKNY, 겐조, 지방시, 버버리, 셀린, 로에베 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 힘들다.

    찬 바람이 귓전을 때리는 2월 어느 날, 의왕시에 있는 시몬느 본사를 찾았다. 가로수길의 핸드백박물관 백스테이지, 도산공원에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 0914와 마찬가지로, 시몬느 본사는 한국 건축대상을 받은 건물로 외관은 물론 내부 설계까지 빼어났다. 오피스 캠퍼스라는 별칭답게 곳곳에 실내 정원과 미술품이 자리 잡고 있고, 복도에는 에스프레소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회장실은 테이블부터 바닥까지 각종 핸드백이 가득했고,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최근까지 대통령에게 받은 산업 훈장과 트로피가 의기양양하게 도열해 있었다.

    37년을 핸드백과 함께 한 남자. 박은관은 시몬느를 창업하기 전 중저가 핸드백 제조업체인 ‘청산’에서 7년 동안 해외영업을 담당했다. 유럽과 미국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고, 명품 핸드백 시장이 아시아 벨트로 넘어올 것을 예견했다./사진=이태경 기자
    37년을 핸드백과 함께 한 남자. 박은관은 시몬느를 창업하기 전 중저가 핸드백 제조업체인 ‘청산’에서 7년 동안 해외영업을 담당했다. 유럽과 미국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고, 명품 핸드백 시장이 아시아 벨트로 넘어올 것을 예견했다./사진=이태경 기자
    미술 컬렉터이기도 한 그는 특히 공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실내 정원이 5개나 있습니다. 사무실 어디서든 녹지와 가든으로 나갈 수 있죠. 구글과 나이키가 이런 식의 오피스 캠퍼스로 유명하지만, 사실 80년대 초반에 캘리포니아에 있던 패션 중소기업들이 그 오리지널이에요. 녹지와 산책로, 아웃도어 카페테리아, 자전거 도로, 자유로운 복장….”

    그가 오피스 캠퍼스를 구상한 것은 아버지에게 1억 원을 빌려서 창업했던 영등포 공장 시절이다. “87년에 15명이 창업했는데, 그때 직원들과 소주 한잔 마시며 그랬죠.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오피스 캠퍼스라는 꿈같은 기업을 보고 왔다. 열심히 해서 잘 되면 우리도 언젠가 그런 건물 지어 일해보자.”” 일하는 공간에 대한 그의 애착은 비단 서울 본사에 머물지 않는다. 중국 광저우에 있는 생산 공장의 컨셉도 팩토리 파크다. “부지가 4만 평이라 150년 된 나무도 있어요. 능선을 따라 나무를 베지 않고 친환경적으로 지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자랑스러움이 배어 있다.

    ◆ 원양업 하는 아버지 따라 10대 시절부터 배 타고 바다 누벼, 해외 비즈니스는 천직

    라운드 스웨터에 진을 입은 이 검소한 차림의 중년 사내는 여자의 마음을 담은 핸드백에 미쳐 37년을 보냈다. 로맨틱하면서 와일드한 그의 인생 스타일은 어떻게 자리 잡게 된 걸까?
    “제 부친이 원양 어선업을 하셨어요. 아버지 배를 타고 나가 바다를 배웠지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 때까지. 학창 시절엔 보충 수업도 빼먹고 한 번에 길게는 6주씩 배를 탔어요. 서해 5도부터 백령도, 연평도, 어청도, 흑산도, 남중국해, 북태평양 바다까지 갔습니다. 바다에 나가 파도에 굴하지 않는 어부들과 펄떡이는 물고기, 넓은 물 위로 해가 지고 뜨는 모습을 보고 많은 걸 배웠어요.”

    바다는 청년에게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 두려움에 대항하는 용기와 더불어 겸허함도 가르쳤다.

    -그런데 왜 굳이 핸드백이었습니까?

    “첫 직장이 핸드백 회사였어요.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이라 해외 업무가 많다고 해서 끌렸지요. 그 뒤로 핸드백이 내겐 캔버스가 됐어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칠하고 싶은 색을 마음껏 칠할 수 있었지요. 이 일로 세상을 배우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여행도 다니면서 재미있게 살았어요.”

    시몬느를 창업했을 당시 32살의 박은관 회장(왼쪽에서 네번째). “나와 손을 잡으면 당신들은 아시아 시장에서 핸드백 라인을 처음으로 시작한 개척자가 되는 겁니다.” 열의에 찬 말로 도나카란 뉴욕 컬렉션 담당자를 설득했다.
    시몬느를 창업했을 당시 32살의 박은관 회장(왼쪽에서 네번째). “나와 손을 잡으면 당신들은 아시아 시장에서 핸드백 라인을 처음으로 시작한 개척자가 되는 겁니다.” 열의에 찬 말로 도나카란 뉴욕 컬렉션 담당자를 설득했다.
    연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박은관은 졸업 후 중소기업 청산에 들어갔다. 가업인 수산업에 뛰어들어 입사와 동시에 임원이 되는 대신, 전혀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부친에게는 “3년만 다른 회사에 다니면서 사회를 배우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 길이 37년 핸드백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간 뉴욕만 230번 넘게 오갔고, 하늘에 쌓인 KAL 마일리지만 470만 마일이다.

    -전체 자산 규모는 어느 정도 됩니까?

    “회계 매출이 연 1조 1천억 원 정도 됩니다. 시몬느 인베스트먼트, 시몬느 자산 운용 등 금융 자회사도 있고 해외 부동산도 많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핸드백에 관련해서는 지금 0914라고 자체 브랜드를 런칭했고, 브랜드 M&A와 브랜드 인큐베인팅도 진행하고 있지요.”

    -사업 환경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지요?

    “핸드백은 지난 30년간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어요. 몇 년 전부터는 너무 많은 제품과 브랜드가 경쟁을 벌이고 있어요. 지금 패션 시장이 좋지 않고, 그래서 더 혁신이 필요합니다.”

    -시몬느를 추격하고 있는 경쟁 기업은 없습니까?

    “전 세계 핸드백 제조업체로 현재 2위는 홍콩의 시토이 그룹인데, 시몬느의 ⅓ 수준입니다.”

    -독보적인 1위군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웃음). 1999년까진 LVMH와 9가지 브랜드를 했고, 2007년도까지 유럽 프리미어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선택과 집중으로 라인을 정리해서 미국 브랜드 17개 정도를 합니다. 10억 불 정도죠.”

    도산 공원 랄프로렌과 에르메스 사이에 있는 시몬느의 플래그십 스토어 0914. 미국과 유럽 명품 기업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국적인 기품을 발하고 있다.
    도산 공원 랄프로렌과 에르메스 사이에 있는 시몬느의 플래그십 스토어 0914. 미국과 유럽 명품 기업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국적인 기품을 발하고 있다.
    -유럽과는 OEM과 미국과는 ODM 시스템을 병행한 것은 일종의 유연화 전략이었습니까?

    “그렇지요. 시몬느가 유럽과 미국 럭셔리 양쪽 모두와 일할 수 있는 플렉스블하고 유일무이한 플랫폼이 됐어요. 유럽의 제품은 그들이 보내준 샘플대로 만들어줬습니다. 유럽 럭셔리도 1980년대 후반부터는 장인이 부족했는데, 그걸 한국의 숙련된 기술로 채워주는 식이었죠. 좀 더 오픈마인드인 미국과는 ODM을 넘어서서 IDM으로 갔어요. 가령 코치나 마이클 코어스와는 서로 깊이 지혜를 공유하는 관계예요. 우리는 그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메시지, 컬러, 디자인의 일부, 마케팅 세일즈를 배우고 그쪽은 우리에게 자재 소싱, 제품 개발, 생산, 품질 관리를 배우죠. 수평적인 파트너예요.”

    18만 개의 핸드백 패턴과 아카이브가 세계 1위의 힘

    -서로 믿음이 중요하겠습니다.

    “맞습니다. 가령 DKNY와는 29년이 됐는데, 그 첫 아카이브를 우리가 갖고 있어요. 미국의 3대 디자이너로 3개 브랜드를 꼽아요. 창조성은 마크 제이콥스, 상징성은 도나 카란 뉴욕, 상업적인 성공은 마이클 코어스죠. 그런데 그 3대 디자이너 회사의 제품을 다 시몬느가 런칭했어요. 미국 럭셔리 회사 입장에서는 핸드백 전문성에 관한 한 우리 플랫폼을 이용하는 게 훨씬 유리해요. 조직이나 원가 부분에서요. 그들은 세일 채널을, 우리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겁니다. 위스키와 싱글몰트를 섞는 것 같은 블렌디드 기법이죠.”

    -세계 핸드백 시장 1위의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우리 회사 최대의 자산 목록은 5,800년입니다. 본사에 350명이 있어요. 우리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핸드백 장인 중에는 환갑 넘은 분이 14명이 있어요. 50년 넘은 그분들의 시간, 그리고 37년이라는 나의 경력, 3개월도 안 됐지만 패기 넘치는 젊은 친구들의 시간… 350명의 지혜와 경험을 합치면 5,800년이 돼요. 현재 이태리나 프랑스에도 없는 시간이에요.

    5,800년의 세월로 18만 개의 핸드백 패턴과 아카이브를 만들었어요. 1년에 우리가 개발하는 디자인이 7천 개지요. 함께 일하는 해외 명품사들이 스케치 100개를 보내와도 98개는 우리가 해온 18만 개 중의 하나이거나 그 변형이에요. 핸드백은 사이즈와 길이가 있어서 기본에서 모티브를 따서 가지치기할 뿐이거든요. 삼성의 휴대폰이나 현대 자동차는 모델 하나를 개발해서 전 세계에 팔잖아요. 우리는 18만 개 디자인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스트럭처, 컬처가 축적돼 있어요. 시몬느 플랫폼의 저력이 그거예요. 서양 애들은 그래서 저희를 팩토리라고 부르지 않고, 풀 서비스 컴퍼니라고 불러요.”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대한민국은 전 세계 유일의 핸드백 박물관을 가진 나라가 됐으니까요. 결론은 대단해 보이지만, 럭셔리 거래처의 믿음을 얻기까지 쉽지 않았겠습니다.

    “창업하고 바로 도나카란 뉴욕을 찾아갔던 건, 적의 가장 높은 심장부를 강타하는 킹핀 전략을 구상했기 때문이에요. 그때 도나카란 담당자가 “한국에서 만들었어? 이탈리아보다 30% 싸?”하면서 신나하더니, 다음날, 계약하자니까 웰웰(well, well) 이러면서 천장만 봐요.”

    -못 믿겠다는 거죠.

    “이런 비즈니스 예전에 해본 적 있냐고 묻는데, 처음이라니까 문전박대하더라고요. 잔뜩 기대하고 있을 한국 직원들 얼굴 생각하니 물러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어요. 이제 시장이 아시아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득했죠. 나는 MBA도 안 했고, 인문학 전공했지만,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상품의 3대 요소는 배웠다고. 웰디자인 웰메이드 웰프라이스. 디자인 좋고 품질 좋고 가격 좋으면 되는 거 아니냐. 디자인은 너희들이 한 거니, 만듦새와 가격이 이 정도면 좋지 않냐고요. 그래서 처음에 120개, 600개, 2,400개 이렇게 조금씩 늘려서 주문을 받았어요. 두 시즌 지나니까 제품 개발해보라고 디자이너를 보내더라고요.”

    시몬느는 현재 ODM(제조자 개발 생산)을 넘어 IDM(Innovative Development Manufacturing)혁신 기업으로 가고 있다. 박은관은 자신을 핸드백 공장 왕초라고 불러달라고 했다./사진=이태경 기자
    시몬느는 현재 ODM(제조자 개발 생산)을 넘어 IDM(Innovative Development Manufacturing)혁신 기업으로 가고 있다. 박은관은 자신을 핸드백 공장 왕초라고 불러달라고 했다./사진=이태경 기자
    -명품 시장은 품격 싸움인데,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 탁월합니다. 비결이 뭔가요?

    “내가 아닌 상대방이 결론을 내도록 늘 열어두었어요. 분위기는 이끌어가지만, 마지막 결정은 상대의 몫으로 남겨두는 거죠. 젊을 땐 내가 결정해야 힘이 있어 보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돼요. 상담이 잘 끝났다는 건, 쌍방이 고마운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거죠.”

    ◆ 세상에 돈으로 못 사는 건 사람, 사랑 그리고 시간... 0914 독자 브랜에도 긴 시간이 필요

    -어쨌든 2015년부터는 자체 브랜드 0914를 런칭했는데, 이게 양날의 검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명품사 입장에서는 내 핸드백을 만들던 회사가 럭셔리 시장에 들어와 같이 경쟁하겠다니, 경계할 듯도 싶고요. 독자 브랜드는 욕망인가요? 필연인가요?

    “둘 다 지요. 내가 처음 이 시장에 발을 디딜 때, 패션업계에는 3개의 커넥션이 있었어요. 프렌치커넥션, 이탈리안 커넥션, 브리티시 커넥션. 그런데 얼마 전에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터인 수지 멩키스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한 얘기가 있어요. 이젠 코리안커넥션 시대가 열릴 거라고요. 도쿄와 상해를 거쳐 차세대 글로벌 패션 도시는 서울이고, 서울은 창의성과 역동성 면에서 충분히 성숙해있다는 거죠. 만약 아시아 세계적 상표가 나온다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 될 것이고, 그 첫 주자로 시몬느가 적절하다고 힘을 실어 주더군요.”

    -루이까또즈나 MCM은 해외 브랜드를 인수해서 한국화에 성공했는데요.

    “네. 너무들 잘하고 있죠. 우린 더 힘들고 좁은 문을 택했어요. 더는 패션의 근원이 런던이나 밀라노, 뉴욕, 파리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서울의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가 나와야 할 시점이고, 시장이 요구가 그렇다면 그 여정이 힘들더라도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0914’가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잘 안착할 수 있을까요?

    “30년간 명품사들과 핸드백을 런칭했지만 나는 브랜드 전문가가 아니에요. 제조업자지요. 내 재킷에는 아직도 기름 냄새가 나요. 우리의 핵심 가치는 손의 힘과 땀의 가치예요. 다른 건 없어요.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좋은 품질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앞으로 15~20년 정도 후에야 이 프로젝트가 빛을 발할 거라고 봐요. 기나긴 여행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게 시간이에요. 5,800년의 시간이 지금의 경쟁력이듯이, 앞으로의 시간이 ‘0914’의 경쟁력이 될 거예요.”

    시몬느의 독자 브랜드 0914 제품.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는 간결하고 소박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터 수지 멩키스는 시몬느가 한국에서 나온 첫번째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시몬느의 독자 브랜드 0914 제품. 시간의 결을 느낄 수 있는 간결하고 소박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보그 인터내셔널 에디터 수지 멩키스는 시몬느가 한국에서 나온 첫번째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시간이 경쟁력이라… 파트너사인 명품 기업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웃으며)그들도 축하해줍니다. 저희는 만용을 안 부려요. ODM으로 10억 불 하고, 장사도 잘되는 데 왜 우리가 조급하게 문제를 만들겠어요? 조용히 다음 세대 프로젝트라고 명명하는 하죠. 그리고 실제로 하나의 브랜드가 무르익는데, 시간은 중요합니다. 제 아버지가 정원에서 소나무를 옮겨심으실 때, 제가 물었어요. “아버지, 내년엔 더 멋있어지겠네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그러세요. “세상에 돈으로 못 사는 게 많다. 사람, 사랑 그리고 시간이다. 소나무도 한번 뿌리 내리는 데 3년이 걸리고, 새순이 나고 모양이 잡히고 소나무 바위 밑에 이끼가 끼고 제대로 운치가 나려면 10년이 걸린다.”고요. 브랜드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0914’를 넥스트 제너레이션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치죠.”

    -가장 어려울 때는 언제였습니까?

    “메이드 인 코리아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로 바꿀 때였죠. 명품사들이 중국을 못 믿을 때, 우리가 멍에를 지고 같이 풀어줬어요. 핸드백은 신발이나 옷보다 훨씬 기계화가 어려워요. 손 정성이 정말 중요하죠. 그걸 중국 기술자들한테 전부 전수했습니다. 망치도 30가지가 넘고, 페인팅이나 건조 방식도 표준화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3일간 자연 건조하는 것을 5분간 처리하는 컨베이어 벨트로 개발한다든가, 손바느질로만 할 수 있는 마무리 처리를 컴퓨터 프로그래밍 화하도록 공장 흐름을 만들었어요.

    표준화란 측면에서 밖에서는 놀랍다고들 했지만, 내부에서는 매일 호떡집에 불난 것 같았지요. 지금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에서 3만 6천 명이 그 공정에 맞게 일을 해요.”

    -시몬느 초봉이 5,500만 원으로 꽤 높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 청산이라는 회사에 입사할 때 회장 면접에서 대뜸, “나는 회사에서 넥타이를 매지 않을 것이며, 애연가이니 사무실에서 담배 피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만약 그런 직원이 시몬느에 지원한다면 뽑겠습니까?

    “제 사수가 청산의 정흥덕 회장인데, 그 양반이 참 멋쟁이셨어요(웃음). 물론 저도 그런 직원을 뽑을 겁니다(웃음). 저는 면접 볼 때 이력서를 안 봐요. 언제 울어보았는지, 뭐할 때 신나는지 그런 걸 묻습니다. 경영자는 생각이 열린 직원들의 지갑과 머리와 가슴을 채워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전 직장 사장에게 경영 윤리 기본 배워, 회사 나와 독립할 때도 지원 아끼지 않아

    -비슷한 경영철학을 가진 사람이 국내 기업인 중에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웃음). 저는 1년에 6개월을 해외로 출장 다니고, 활동이라야 미술 컬렉터 모임과 국립박물관 이사회 정도거든요. 다른 사람이나 기업에 신경 쓸 틈이 없어요. 주변에서는 벨트나 신발 같은 것으로 품목을 확장해보라고 권해도, 저는 오로지 가방에만 매달려요. 가방은 지금 거의 설치 미술 형태로까지 나아가고 있어요. 이것만 해도 전문성을 높이려면 숨이 턱에 찹니다(웃음).”

    시몬느는 박은관이 그의 아내 오인실을 부르는 애칭. 삶에도 비즈니스에도 사랑과 낭만이 흐른다./사진=이태경 기자
    시몬느는 박은관이 그의 아내 오인실을 부르는 애칭. 삶에도 비즈니스에도 사랑과 낭만이 흐른다./사진=이태경 기자
    -본인을 뭐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웃으며)저는 불도저처럼 살았지요.”

    -본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은가요?

    “(한참 생각하더니)공장 사장이죠, 뭐. 핸드백 공장 왕초. 기름 냄새나는 재킷 입은 핸드백 공장의 왕초. 중국 광저우에서 명예 시민권을 주면서 그럽디다. 명품을 끌어와서 공장을 세워주고 기술을 가르쳐 줬으니, ‘따거'라고. 큰 형님이라는 뜻인데, 아시아 시장에서 내가 왕초 역할을 한다는 거죠. 저는 더도 덜도 말고 핸드백 공장의 따거, 큰 형님이고 싶습니다(웃음).”

    -가방 공장 왕초의 아내는 어떤 핸드백을 멥니까?

    “앙리 베글린 같은 투박한 듯하면서 시간의 결이 느껴지는 그런 걸 좋아해요. 시몬느의 0914 제품도 좋아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아마 전 세계에서 핸드백이 제일 많은 사람일 거예요(웃음).”

    -꿈이 무엇입니까?

    “제가 세운 핸드백 박물관 이름이 백스테이지예요. Bag Stage도 되고 Back Stage도 돼지요. 저는 핸드백이라는 무대 뒤에서 몸으로 살아온 사람이에요. 단 하나 꿈이 있다면 제가 아닌 다음 세대에라도 한국에 100년이 지속하는 패션 기업이 나왔으면 하는 거죠. 제조에서 시작했지만 그게 브랜드가 된다면 아시아 패션 플랫폼으로 더 바랄 게 없겠어요.”

    조각가 양문기의 작품. 양문기는 루이비통이나 샤넬 등 명품 핸드백을 돌로 만들어 내는 조각가로 유명하다. 왼쪽이 시몬느의 0914제품.
    조각가 양문기의 작품. 양문기는 루이비통이나 샤넬 등 명품 핸드백을 돌로 만들어 내는 조각가로 유명하다. 왼쪽이 시몬느의 0914제품.
    개인적으로는 멋쟁이 아내인 시몬느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긴 여정이라고 불린 독자 브랜드 0914는 그의 딸 박주원이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가방은 사소하고 사치스러운 삶의 하위 품목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숙고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알 수 없는 무게가 생긴다. 박은관은 인터뷰 내내, 시간이나 땀, 여행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먹거렸다.

    ◆ 기억하고 기념하고, 기다릴 줄 아는 아는 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휴대폰으로 찍은 거대한 돌을 보여주었다. “이게 핵석이예요. 8백만 년 된 마그마가 굳어서 거대한 돌로 남은 거죠. 돌 하나가 200톤이에요. 이걸 조각가(김창곤 교수)에게 사주고, 자연을 살린 작품을 만드는 장기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어요. 그걸 개인이 소유한다는 건 만용이고, 완성되면 조각 공원을 만들어 서울시에 기부하려고요.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배를 타서 그런지, 100년을 살다가는 인간은 바다, 나무, 돌… 그런 자연 앞에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제가 만드는 가방도 그 일부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끝내고 그는 회사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었다. 회사 강의실에는 그의 어머니가 물려준 근사한 자개장이 전시되어 있었고, 유리창 너머 실내 정원엔 배롱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로비엔 아내와 딸과 여행 중에 찍은 긴 그림자 사진이 걸려 있다. 삶이나 비즈니스가 로맨틱한 동시에 와일드할 수 있다는 건, 보기 드문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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