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 야구에 명불허전인 ‘엘넥라시코(LG·넥센 간 대결)’이 있다면, 한국 게임 창업전에서는 ‘엔넥전(엔씨소프트·넥슨 간 대결)’이 주목받고 있다.
국내 게임 산업을 떠받쳐온 ‘게임 공룡’ 엔씨소프트와 넥슨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새로운 창업가를 배출, 게임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 엔씨소프트·넥슨 출신 인사가 설립한 게임회사 중 일부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또다른 스타트업에 투자하기도 한다. 두 회사가 게임 산업 생태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 트라이팟스튜디오스·시프트업…‘엔씨 키즈’가 만든 회사들
엔씨소프트 출신 개발자가 창업한 스타트업 중 가장 주목받는 회사는 트라이팟스튜디오스다. 트라이팟스튜디오스는 엔씨소프트에서 글로벌 론칭사업실장을 맡았던 김승권 대표가 지난 2015년 7월 설립한 모바일 게임 개발사다.
트라이팟스튜디오스는 아직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지 못했음에도 대규모 투자를 유치해 주목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K2인베스트먼트와 DSC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60억원을 투자 받아, 누적 투자금이 총 80억원에 달한다.
트라이팟스튜디오스의 투자 유치가 화제가 된 이유는 최근 들어 게임 업체에 대한 벤처캐피털의 투자가 전반적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벤처캐피털이 게임 업체에 투자한 금액은 총 1427억원으로 전년 대비 15.2%나 감소했다.
벤처캐피탈 업계는 트라이팟스튜디오스의 대규모 투자 유치 비결을 창업자의 이력에서 찾는다. 김 대표는 엔씨소프트의 대표작 ‘블레이드앤소울’과 ‘리니지 이터널’의 사업을 담당한 바 있다. 투자자들은 그가 두 게임을 메가 히트작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바일 게임 ‘데스티니차일드’를 만들어 흥행에 성공한 시프트업도 엔씨소프트 출신 개발자들이 창업한 회사다.
데스티니차일드는 지난해 10월 말 출시돼 닷새만에 구글·애플 앱스토어에서 게임 매출 순위 1위에 오른 게임이다. 출시 후 100일만에 누적 다운로드 횟수 150만건, 하루 최대 접속자 수 31만명을 기록했다.
데스티니차일드를 만든 시프트업의 김형태 대표는 엔씨소프트에서 ‘창세기전’ 시리즈와 블레이드앤소울의 아트 디렉터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이 회사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근무 중인 채지윤씨도 김 대표와 마찬가지로 엔씨소프트 출신이다.
모바일 게임 ‘프로젝트 TOP(가제)’를 개발하고 있는 슈프림게임즈는 엔씨소프트에서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밍 리더로 근무한 황인정 대표가 설립한 회사다. 이정규·김창현 디렉터 역시 엔씨소프트에서 각각 애니메이션 팀 리더, 게임 디자인 팀 리더로 일한 경력이 있다. 슈프림게임즈는 NHN엔터테인먼트와 케이큐브벤처스에서 총 26억원을 투자 받았다.
이 외에 ‘리니지2’ 기획에 참여했던 황석윤 대표가 창업한 엔타로쓰리, 블레이드앤소울 개발자인 강건우 대표가 설립한 블랙비어드 역시 ‘엔씨 DNA’를 지닌 신생 게임 개발사다. 엔씨소프트 유럽 지사에서 ‘길드워’ 마케티을 담당한 한국계 독일인 파하 슐츠(Paha Schulz)는 가상현실(VR) 게임 개발사인 플레이스낵을 창업했다.
◆ 슈퍼어썸·오리진게임즈는 넥슨 피 수혈…코코모는 ‘혼혈’
넥슨 출신 개발자가 창업한 회사로는 슈퍼어썸, 오리진게임즈, A-33스튜디오 등이 있다.
슈퍼어썸의 창업 멤버 다섯명은 모두 넥슨에서 ‘마비노기’와 ‘카트라이더’를 개발한 경력을 갖고 있다. 넥슨에서 마비노기실장 및 신사업본부장을 맡았던 조동현 대표를 비롯해, 카트라이더 개발에 참여한 차승규 기술디렉터·안형태 프로젝트디렉터, 마비노기 기획파트장으로 근무했던 강근영 게임디렉터와 이종문 아트디렉터가 회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슈퍼어썸은 아이디벤처스에서 10억원을 투자 받았으며, 지난 7일에는 크라우드펀딩 업체 와디즈에서 모바일 게임 ‘럭키스트라이크’에 대한 펀딩을 진행한지 4시간만에 목표 금액(5000만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슈퍼어썸은 이달 중 럭키스트라이크를 정식 출시한 뒤 일본, 중국 등 해외에 수출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지스타에서 모바일 게임 ‘크로커스’를 선보인 오리진게임즈도 전체 인력 중 약 40%가 넥슨 출신 개발자로 이뤄진 회사다. 넥슨에서 ‘메이플스토리’ 라이브개발팀 파트장을 맡았던 고정환 PD 및 ‘던전앤파이터’ 개발 인력이 대거 포진했다. 오리진게임즈는 미국계 벤처캐피털 알토스벤처스를 비롯해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대성창투 등으로부터 총 30억원을 투자 받았다.
NHN엔터테인먼트와 케이큐브벤처스로부터 총 27억원을 투자 받은 A-33스튜디오 역시 넥슨 출신 개발자들이 만든 회사다. 넥슨에서 개발2본부장을 맡았던 김동선 대표를 비롯해 프로그래머 정수용·김영준씨가 넥슨 출신이다.
모바일 게임 ‘좀비버스터즈’를 만든 모글루게임즈는 메이플스토리 개발 멤버인 박세희 대표가 설립한 회사다. 박 대표는 앞서 엔클립스를 창업해 2010년 넥슨에 매각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 외에 넥슨아메리카 부사장을 지낸 채은도 대표와 넥슨 자회사 넥슨지티에서 게임 디렉터로 근무한 신용 이사가 설립한 씨웨이브소프트, 이성학 대표 등 넥슨 출신 6명이 공동 창업한 몬스터플래닛 역시 ‘넥슨 핏줄’이 흐르는 스타트업으로 꼽힌다.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피가 모두 흐르는 업체도 있다. ‘오버로드’ 개발사인 코코모는 ‘리니지2’ 개발실장으로 근무한 남궁곤 대표를 비롯해 허재호·김정하 디렉터가 엔씨소프트 출신이며, 이동현 디렉터는 넥슨코리아 출신이다. 코코모는 LB인베스트먼트와 케이큐브벤처스 등으로부터 총 75억원을 투자 받았다.
◆ ‘넥슨 DNA’ 물려받은 네시삼십삼분, 또다른 스타 벤처 키운다
엔씨소프트와 넥슨 출신 개발자들이 창업자로 변신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중견 기업이 된 네시삼십삼분, 코스닥시장에 입성한 썸에이지 등이 좋은 선례를 남긴 바 있다.
네시삼십삼분을 설립한 권준모 이사회 의장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넥슨의 대표이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권 의장은 넥슨 대표 뿐 아니라 한국게임산업협회장, 경희대 교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넥슨의 DNA를 수혈한 네시삼십삼분은 많은 후배 기업에 투자해 게임 산업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다. 네시삼십삼분의 외부 투자 금액은 700억원이 넘는 수준이다. 팩토리얼게임즈와 썸에이지 등은 경영권을 인수해 자회사로 두고 있다.
지난해 5월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썸에이지는 ‘서든어택의 아버지’ 백승훈 대표가 설립한 회사다. 백 대표는 넥슨의 자회사 넥슨지티에서 서든어택의 개발을 총괄한 인물이다.
넷게임즈를 창업한 박용현 대표 역시 엔씨소프트 출신이다. 박 대표는 ‘리니지2’ 프로그래밍을 총괄한 경력을 갖고 있다. 넷게임즈는 모바일 게임 ‘히트’를 만들어 지난해 대한민국게임대상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오는 3월 6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