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운영하는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최근 전남 나주에서 문을 열었다. 한전은 앞으로 5년간 200억원을 투입해 에너지 분야 벤처기업 300개를 육성할 계획이다. 신재생에너지와 전력 사물인터넷(IoT) 등과 관련한 신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 나주 빛가람창조경제혁신센터는 19번째 혁신센터다. 경기 창조경제혁신센터가 2015년 3월 전국에서 18번째로 문을 연 이후 거의 2년만이다.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지 않고 기업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자율형 센터로는 포스코의 포항센터에 이어 두번째다.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의 상징이고 핵심사업이다. 명분은 나무랄 데 없지만 처음부터 정부 주도 사업 추진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혁신센터가 계속 운영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더욱이 작년 하반기 최순실 사태 이후 상당수 혁신센터가 개점 휴업 상태다. 이른바 ‘비선(秘線) 실세’들이 창조경제 사업에 손을 댄 흔적이 드러나면서 혁신센터 이미지가 더 곤두박질쳤다.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자체들이 혁신센터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거나 크게 줄였다. 억지로 사업을 떠 맡았던 대기업들도 혁신센터를 끌고 갈 의욕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래서 이번 빛가람센터 개소식이 조금 뜬금없다는 느낌이다. 아무리 공기업이라도 탄핵정국에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물러나는 대통령의 관심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막차를 타는 것도 피해야 할 판에 난파선에 올라탄 꼴이 돼버렸다고 할 수 있다.

빛가람센터는 원래 광주에 있는 전남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제2센터로 추진됐다. 그런데 최순실 사태로 작년 11월초에 열릴 예정이었던 개소식이 무기 연기됐다. 그 이후 혁신센터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정부가 완전히 손을 떼고 예산과 운영권을 한전에 떠넘겼다. 한전이 덤터기를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혀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빛가람센터는 나주 한전 본사에서 불과 300m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운영기업과 혁신센터의 밀착도에서 ‘억지 춘향’식 지역 연고를 근거로 한 다른 센터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전은 2014년 나주 혁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한 이후 전남 지역을 에너지 신산업 중심지로 키우기 위한 에너지밸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관련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을 추가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일 수 있다. 지역 사회 공헌 차원에서 한전은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 비슷한 사업을 하게 됐을 것이다.

물론 정권이 바뀐 뒤 빛가람센터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뒤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전(前) 정부의 흔적과 잔영(殘影)을 지우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모두 그렇게 해왔다. 새 정부 역시 마찬가지라면 혁신센터가 그 타깃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스타트업 육성·지원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는 못할 것이다. 신산업 육성과 창업 생태계 조성·활성화 등 ‘창조경제’의 핵심 아젠다는 새 정부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부각될 게 분명하다. 혁신센터의 문을 닫는 대신 이름만 바꾼 비슷한 사업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굳이 혁신센터를 없앨 이유가 없다. 잘못된 추진 방식과 시스템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 19개 혁신센터를 모두 끌고갈 수도 없다. 옥석을 가리거나 헤쳐모여 하거나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빛가람센터는 정부가 무리하게 만들어낸 다른 센터들과 다르다. 한전이 하기에 따라서는 혁신센터의 새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안희정 충남지사를 주목할 만하다. 안 지사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새로운 경제정책을 따로 내놓지 않겠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계속 살려나가야 한다”고도 했다. 일부 야권 지지자들은 뜨악했겠지만 곰씹어 볼 가치가 있는 발언이다.

정권마다 자기 브랜드 사업에 욕심을 부리지만 정권 임기와 함께 그 수명도 끝나는 게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다. 정권과 무관하게 장기 비전을 갖고 추진할 국가적 의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임기내 가시적 업적에 매달리다 미래로 가는 큰 흐름을 놓치기 일쑤다. 그로 인한 정책 헛발질과 낭비, 근시안적 행태가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여(與)든 야(野)든 한국이 혁신주도형 경제로 가야한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이견(異見)이 없다. 창조경제혁신센터 문제도 그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개선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전 정권의 간판 사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률적으로 내칠 일이 아니다.

빛가람센터는 난파선이 아니라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마리아호처럼 신세계 탐사선이 될 수 있다. 차기 정부가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