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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 개혁 3.0]⑥ 정권눈치, 전문성없는 국민연금...역할 제대로 할 수 있어야

  • 연지연 기자
  • 입력 : 2017.02.10 06:00

    - 국민연금으로부터 기금운용공사 분리 독립시켜야
    - 스튜어드십 코드, ‘큰손’ 국민연금부터 채택해야

    “주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결정이다.”

    2015년 7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글로벌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국민연금이 ‘왜 합병비율을 문제 삼지 않고 찬성표를 던지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평가가 다수를 이뤘다.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논리로 접근했을 것’이란 추측도 나왔다. 이런 시선 속에서 두 회사는 합병에 성공했다.

     조선일보DB
    조선일보DB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삼성그룹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렸다. 두 회사의 합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국민연금은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고, 문형표 국민연금 이사장은 합병에 찬성하라는 청와대 외압이 있었다고 실토한 뒤 구속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세계 3위 연기금인 국민연금에 대해 실망감을 표시하고 있다. 서스틴베스트 류영재 대표는 “특히 기업지배구조에 관심이 많은 유럽계 연기금 관계자들이 ‘국민연금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고, 실망스럽다’고들 한다”며 “궁극적으로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는 말도 많이 들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금융·증권시장 관계자들은 기관투자자들의 책임투자를 강조하는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자율지침)만 제때 도입됐더라면 한국 자본시장이 국제적으로 망신을 살 일은 없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은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은 2015년 금융위 업무계획에 포함돼 있었는데 너무 진척이 늦었다”고 말했다.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5년 논의가 시작돼 지난해말 제정됐다. 그러나 처음 논의에서 후퇴해 구체적 가이드라인 없이 7가지 원칙만 정했고 제정된지 한달이 넘었는데도 이를 채택한 기관투자가는 아직 한 곳도 없는 상황이다.

    ◆ 주주권익 침해 막으려면 기관투자자 역할 중요

    주주가 분산돼 있는 기업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회사라면, 기관투자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경영진은 회사 전체를 위해 일하지만,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상황도 있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은 큰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주에게 불리한 안건을 주총 결의사항으로 올리면 의결권을 행사해서 이를 저지하고, 더 나아가 상법에 명시된 주주제안권이나 이사 해임청구권 등을 통해 기업가치를 올리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는 “기관투자자의 활발한 활동이 올바른 기업 지배구조를 만드는 3대 축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는 주주권은 커녕 의결권 행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대신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30일 기준으로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코넥스시장 상장사 649개사의 올해 정기주총 안건 1만8345건을 분석한 결과, 기관투자자가 의결권을 행사해 반대의견을 개진한 것이 401건(2.2%)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게다가 이 중 152건(38%)은 외국계 투자자들이 낸 것이었다.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국내 증시에서 기관투자자의 비중은 높지 않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기관투자자의 주식시장 비중은 17.1% 수준이다. 미국 증시(47.1%)의 3분의 1 수준이다. 일본 증시(21.4%)보다도 낮다(2013년 기준).

    또 자산운용업계에서 독립 자산운용사가 드물고 은행이나 증권, 대기업그룹 자회사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기관투자자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자산운용사가 대기업 지배주주에 반하는 쪽으로 의결권을 행사했을 때 증권사나 은행, 또 다른 그룹사가 에둘러 피해를 볼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의결권 행사가 어렵다는 것이다. 주진형 한화투자증권 전 사장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반대 보고서를 낼 때도 외압을 여기저기서 받았다”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 국민 노후자금 600조원 무게 잊었나…제대로 역할 못하는 국민연금

    금융·증권 전문가들은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큰 형님, 국민연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민연금은 국민 노후 자금 600억원을 운용하는 큰 손이다. 2016년 3분기 기준으로 국민연금은 100조원 넘는 금액을 국내 증시에 투자하고 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국내 10대 그룹과 그 계열사에 투자돼 있다.

    하지만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기 위한 주주로서의 활동은 미진한 편이다. 이사·감사 해임청구권이나 회계장부 열람권 등을 포함한 주주권 행사는 전무한 상황이고, 의결권 행사도 적극적이지 않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주요 상장사의 민감한 이슈에 대해 찬성표만을 던지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업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민연금의 2016년 주총 의결권 행사 내역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해 586개사 3344건의 의안 중 반대 의견을 낸 안건은 320건(9.6%)에 불과했다. 의결권 미행사는 20건(0.6%), 기권 9건(0.3%), 중립 1건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한 것에 청와대 외압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결권 행사에 대한 독립성이 침해됐다는 의심도 피할 길이 없어졌다.

    당장 드러난 국민연금의 문제점은 정권의 입김에 자유롭지 못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으로 있다보니 국민연금이 정부의 눈치를 보며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게다가 전문성도 없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연금 전체를 총괄하는 자리라는 이유로 복지나 연금 전문가가 맡았지, 투자나 자산운용 전문가가 맡은 적이 없다. 실무부서인 기금운용본부장만 투자 전문가였는데 국민연금의 투자 관련 사안도 대부분 투자에 문외한인 이사장이 총괄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를 독립 공사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례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이 바로 미국 최대 공적연금 캘퍼스(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다. 캘퍼스는 그 어떤 공공기관에도 속해있지 않은 독립기관이다. 의결권 행사는 가이드라인에 따르면서 외부 자문기관을 적극 활용한다. 또 분기마다 의결권 행사 내역을 13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사후 보고하는 형식으로 독립성을 지켜가고 있다.

    네덜란드 공적연금(ABP)은 2008년 기금에 대한 독립성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기금 운용을 담당하는 자회사 APG(All Pension Group)를 따로 두고 있다. APG는 ABP의 감독과 행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돼 자산 운용에만 전념한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필요…국민연금부터 앞장서야

    금융·증시 전문가들은 지난해 12월 발표된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이 국민연금의 독립성 논란을 잠재워줄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꼽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국민연금과 같은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가들을 위한 의결권 행사 지침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유럽연합(EU)과 영국, 일본 등 11개 국가가 도입을 완료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기관투자가 어느 곳도 스튜어드십 코드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 2014년 도입 후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 GPIF(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를 비롯해 신탁은행,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212개 기관투자가들이 이를 채택해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 7개 항목 중 가장 눈여겨 볼 것은 5번째 ‘의결권 행사와 그 사유 공개’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기관투자자가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해 기업 대주주의 전횡을 막고, 계열사에 대한 편법 지원 등 불투명한 경영을 견제해야 한다는 취지다. ‘기관투자자는 고객과 수익자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행동할 의무가 있다’는 스튜어드십 코드 2번째 항목도 국민연금이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만약 스튜어드십 코드를 국민연금이 진작 도입했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이 쉽게 찬성표를 던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시장 개혁 3.0]⑥ 정권눈치, 전문성없는 국민연금...역할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특히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제기됐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빠른 2014년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뒤 외국인 자금이 밀려들어오는 효과를 누렸다. 더재팬인게이지펀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로부터 받은 자금이 전체 운용자산의 절반 가량 되는데, 주주관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덕분에 운용자산이 41% 정도 늘었다. 노무라자산운용의 백경원 실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주주 친화적인 정책을 펴는 기업이 늘면서 일본 증시에 외국인 자금과 펀드 자금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스튜어드십 코드가 만능은 아니지만 국민연금이 이를 도입할 경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문제로 국제적인 망신을 살 일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민경 기업지배구조원 연구원도 “민간 중심으로 권고사항일 뿐인 스튜어드십 코드이지만, 기관투자자들에게 의결권 행사의 지침과 명분을 줬다는 점에서 잘만 돌아간다면 기관투자자의 역할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큰 힘이 될 수 있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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