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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 개혁 3.0]② 재벌개혁 20년 ‘실패의 역사’…유명무실한 선진제도

  • 정재형 금융증권부장
  • 이승주 기자

  • 입력 : 2017.02.06 06:01 | 수정 : 2017.02.06 11:34

    1981년 정부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을 시행했다.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과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막고, 담합 및 불공정거래 행위를 규제해 자유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지금 500여명의 공정거래위원회는 당시 경제기획원 산하 75명의 공정거래실에 불과했을 정도로 역할이 미미했다.

    이후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 등이 문제되면서 정부는 1987년 대기업집단 지정, 상호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시행했다. 1992년에는 동반부실과 금융대출의 재벌 편중을 막기 위해 계열사간 채무보증제한을 도입했다.

     1990년 5월 3일 공정거래위원회 현판식. 공정위는 이때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독립해 별도 부처로 만들어졌다. /사진=e영상역사관
    1990년 5월 3일 공정거래위원회 현판식. 공정위는 이때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독립해 별도 부처로 만들어졌다. /사진=e영상역사관
    재벌 정책이 획기적으로 바뀐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였다. 외환위기의 큰 원인 중 하나가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과 과잉중복투자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부문 구조조정을 추진했고 기업 구조조정은 중요한 분야로 인식됐다.

    당시 재벌 개혁은 크게 ▲공정거래법상 조치 ▲상법상 조치 ▲자본시장 관련 조치 등 3가지 틀에서 진행됐다. 공정거래법에서는 계열사간 채무보증을 전면금지했고 계열사간 부당 내부거래를 대거 적발해 과징금 부과 등으로 처벌했다. 1998년 이후 부당내부거래 122건에 대해 47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또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유도했다.

    상법에서는 상장법인 전체 이사 중 4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도록 의무화했고 소액주주의 소송권, 장부 열람권, 이사 및 감사 해임권한 등 권리를 강화했다.

    자본시장과 관련해서는 기업 인수합병(M&A)을 자유화해 적대적 인수를 허용하고, 외국인 주식보유 규제를 철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 또는 강압에 따라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한 것이다. 또 투자신탁과 은행펀드에 편입돼 있는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기관투자가에게 인정해 기업 경영을 견제할 수 있도록 했다.

    이같은 변화는 ‘자본시장 개혁 2.0’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소액주주 운동이 벌어졌고, 재벌들의 무분별한 차입관행과 계열사 동반부실 가능성도 차단됐다. 지주회사로 전환한 대기업들도 많아져 계열사간 지분구조가 단순하게 정리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계 또한 존재한다. 사외이사제를 도입했지만 오너 일가가 임명하는 사외이사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기관투자가들은 의결권이 있어도 이사회에서 대부분 경영진이 올린 안건에 ‘찬성’했다. 여전히 오너의 독단적 경영에 대한 견제장치는 거의 없다. 오너 일가를 위해 회사를 쪼개고 붙이는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의 이익은 침해받고 있다. 오너 일가의 지분이 많은 회사에 ‘일감 몰아주기’를 하는 등 사실상 횡령으로 볼 수 있는 일도 많았다.

    미국 등 선진국들의 제도를 들여와 형식적으로 시행은 했으나 제도의 취지대로 실질적인 개선이 이뤄지지 못했다. 1997년 이후 최근까지 재벌개혁 20년은 실패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 ‘거수기’ 전락한 사외이사…오너에게 잘 보여야 생존

    # 지난 2015년 5월 26일. 사내이사 5명과 사외이사 6명으로 구성된 옛 삼성물산 이사회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이사회에는 사외이사 6명 중 3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합병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합병 비율이 1대 0.35로 삼성물산에 불리하게 책정됐다는 논란이 일고 있었지만, 사외이사 중 이를 문제 삼았던 인사는 없었다. 2015년 한 해 동안 삼성물산의 사외이사 7인은 이사회에 참석했을 때 단 한 차례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삼성물산은 2015년 7월 17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승인했다. 사진은 당시 주총 의장이었던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사진=삼성물산 제공
    삼성물산은 2015년 7월 17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승인했다. 사진은 당시 주총 의장이었던 최치훈 삼성물산 사장. /사진=삼성물산 제공
    # 지난 2014년 9월 현대자동차가 10조5500억원에 매입해 논란이 일었던 한국전력 삼성동 부지 매입 건을 살펴봐도 그렇다. 당시 한전 부지의 감정가는 3조3346억원으로, 현대차는 감정가보다 3배 이상 비싼 가격에 부지를 매입했다. 당장 주주들 사이에서는 ‘지나치게 비싸다’는 불만이 나왔다. 그럼에도 현대차 사외이사 5명은 모두 부지 매입에 찬성표를 던졌다. 매매계약 승인을 위한 이사회에도 5명 중 4명이 참석해 전부 찬성했다.

    사외이사 제도는 대주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 대학교수와 변호사, 공인회계사 등 일정 요건을 갖춘 외부 전문가들을 이사회에 참여시켜 오너와 경영진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제도 도입 후 20년 정도 지났지만, 사외이사에 신뢰의 눈길을 보내는 주주들은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조선일보DB
    조선일보DB
    소유와 경영이 일치하는 우리나라는 기업의 오너나 경영진이 사외이사를 뽑는다. 사외이사의 임기 제한도 없다. 안상희 대신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오너의 경영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가 오너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채워진다면 견제 기능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느냐”며 “사외이사를 오래 하다 보면 오너 일가와 형, 동생하는 사이로 발전할 수 있는데 그런 관계에서 제대로 견제 기능이 작동하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은 지난해 1월 사외이사들에게 대규모의 보수 이외에 주식을 무상증여했다. 한미약품의 한 사외이사는 1년에 5~6번 이사회에 참석하고 1억2000여만원의 보수를 챙겼다. 한미약품의 사외이사들은 재임 기간 동안 이사회 결정에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었다.

    ◆ 미국은 주주 자본주의, 유럽∙일본은 가족기업...우리나라는?

    기업 지배구조의 모델은 지분의 분산 구조에 따라 나뉜다. 영미권에서는 기업의 주식이 주로 기관투자가에게 분산돼 있다. 기관투자가들은 주주로서 최고경영자(CEO)를 선임해 경영을 맡긴다. 즉, 기업의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다. 주주들이 경영자의 전횡을 견제하는 독립 사외이사들을 선임하고 이사회 내에 여러 위원회를 둔다. 또 소액주주들이 권익을 침해당했을 때 소송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법으로 보장한다. 기업의 소유주인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구조여서 ‘주주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기업의 지분이 가족(가문) 등 주요주주에 집중돼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주요주주=오너’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또 기업에 대출하는 주거래은행이 기업 지분을 보유하기도 하고 유럽에서는 노동자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하기도 한다. 채권단(은행), 노동자, 거래기업, 소비자, 정부, 지역사회에 이르기까지 이해관계자 모두를 신경쓰기 때문에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경영진은 주주 뿐 아니라 노동자대표, 채권단 등의 견제를 받는 구조다.

    예를 들면 폴크스바겐 이사회 구성원 20명은 주주 대표 10명과 노동조합 대표 10명으로 구성된다. 주주 대표 10자리 중 다섯 자리는 지분 52.5%를 보유한 포르셰와 피에히 가문 몫이며 지분 20.0%를 보유한 니더작센 주(州) 정부와 지분 17.0%를 보유한 카타르 국부펀드가 각각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 자리는 회사와 지배주주로부터 자유로운 이사로 지난 2015년에는 아니카 팔켄그린 SEB은행 최고경영자(CEO)였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일본식 기업지배구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0년대까지는 가족 기업 성격이어서 가족들이 대부분 지분을 보유했다. 이후 1970년대부터는 기업 강제 상장 과정에서 순환출자가 용인되면서 오너 일가가 계열사 지분을 통해 경영권을 지배하고 있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본시장 전면 개방 등으로 외국인 기관투자가들이 대거 주식시장에 참여하고 국민연금이나 펀드 등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규모가 커지면서 주요 대기업들은 형식적으로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 성격도 많이 가지게 됐다.

    ◆ 소액주주운동을 시민단체가?…기관투자가들은 주주권 행사 거의 안해

    1994년 설립된 시민단체 ‘참여연대’는 1997년 소액주주운동을 시작했다. 시민단체가 소액주주운동을 추진한 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후 소액주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많은 소송을 제기했지만 승소한 것은 3건에 불과하다. 주주대표소송, 증권 관련 집단소송 등 소송제도가 제한적으로 허용돼 있고 법원도 경제문제에서 보수적인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004년 2월 27일 삼성전자 제35회 정기주주총회. 당시 송호창 변호사가 삼성전자의 직원윤리규정을 들며
    2004년 2월 27일 삼성전자 제35회 정기주주총회. 당시 송호창 변호사가 삼성전자의 직원윤리규정을 들며 "불법정치자금과 연루된 경영인을 징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진행요원이 마이크와 차트를 빼앗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지며 송 변호사 옆에 있던 여성 주주가 얼굴을 맞았고, 당시 박근용 참여연대 경제개혁팀장은 멱살을 집히기도 했다./사진=참여연대 제공
    1997년 3월 소수주주 모집운동으로 주주권을 위임받아 제일은행 주총에 참석해 한보그룹 부실 대출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고 법전에만 규정돼 있을 뿐 실제 활용된 적이 없는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1998년 9월에는 ‘재벌개혁을 위한 국민 10주 갖기 운동’을 시작했으며 2005년에는 이건희 회장과 삼성전자 이사들을 상대로 뇌물제공과 회사자산 저가매각 관련 7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승소했다. 2003년 1월 LG화학 이사들에게 회사 자산을 LG그룹 지배주주에게 저가매각해 회사에 끼친 손실을 배상하라는 주주대표 소송도 3년여의 소송 후 2006년 승소했다.

    1996년 삼성에버랜드는 전환사채(CB)를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전무에게 저가에 발행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큰 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2008년 ‘삼성 X화일’ 사건으로 특검 수사를 받게 됐다. 삼성 특검은 일련의 행위가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전무에게 삼성그룹을 승계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과 이건희 회장 등이 배임 혐의로 기소됐지만, 최종적으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1996년에 있었던 사건은 10년이 더 지난 2012년에 최종 판결이 났고, 심지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까지 났는데 그때까지 버틸 소액주주가 얼마나 되겠느냐”며 “당시 이슈에 대해 제대로 된 판결이 났으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이 문제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 4월 26일 참여연대는 이재용씨의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인수과정에서의 탈세사실을 제보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사진=참여연대 제공
    2000년 4월 26일 참여연대는 이재용씨의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인수과정에서의 탈세사실을 제보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사진=참여연대 제공
    시민단체가 소액주주운동을 벌인 것은 기관투자자들이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기관투자자들이 주주로서 경영진을 견제했다면 굳이 시민단체가 나설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큰손’인 국민연금은 기업 경영진을 감시, 견제할 의욕이 없다. 주총 의사결정에서 오히려 정치권의 외압에 휘둘려 재벌 기업 오너에 유리한 표결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 기관투자자들의 경우 국민연금 등 연기금을 제외하면 대부분 투신사나 자산운용사, 보험사들인데, 이들은 대부분 재벌의 계열사로 사실상 주주권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담합 구조가 형성돼 있다.

    대신경제연구소가 지난 2015년 상장기업 주주총회 의안별 반대비율을 검토한 결과 국민연금 이외 기관투자가의 반대 비율은 2.21%에 불과해 국민연금(9.11%)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척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안상희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배당 성향이나 배당 수익률이 낮은 편”이라며 “주주 가치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기관투자가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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