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8일 정오.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감시국은 1조300억원의 과징금을 미국 정보통신(IT) 공룡기업 퀄컴에 부과했다. 공정거래위원회 출범 이후 30년만의 최대규모이며, 퀄컴의 라이선스 사업모델을 세계 최초로 제재했다. 2014년부터 시작된 논란 끝에 공정위가 던진 것은 예상을 초월한 강수였다.

퀄컴측은 대형로펌만 3곳에 쟁쟁한 변호인단만 15명이었다. 채규하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을 비롯한 5명의 직원들은 2년 넘게 사건에 매달렸다. 2015년에는 정보통신기술(ICT) 전담팀까지 새로 꾸렸다.

곧 퀄컴에 보낼 공정위 의결서를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채규하 시장감시국장을 지난 12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집무실에서 만났다. 서류더미로 가득한 그의 책상에서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하얀색 책 한 권이었다. 제목은 ‘남자란 무엇인가.’ 그는 마초(권위적 남성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럴때도 있고 아닐때도 있다”고 웃으며 답했다.

가수 김연우를 연상케 하는 편안한 인상이지만, 지난 28년 그의 공직생활 업무결과만 놓고보면 그는 마초에 가깝다. 퀄컴 건에 대한 과감한 결정도 그렇지만, 과거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분을 정리시킨 주인공도 그였다.

채규하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이 지난 12일 오전 집무실에서 시감국의 역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퀄컴 제재 ‘모래밭에서 바늘찾기’”...법과 경제 모두 공부한 ‘열공파’

그는 퀄컴 제재 과정을 ‘모래밭에서 바늘찾기’에 비유했다. 퀄컴 사건은 지난 2014년초 공정위 신년 업무보고부터 시작됐다.

채 국장은 정보통신기술(ICT) 특허 분야가 앞으로 무한히 커질 것으로 보고 관련 산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제조업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바뀌는 시점에서 공정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해외 특허사례를 찾아봤는데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을 팔 때마다 칩셋을 만드는 퀄컴이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더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음을 알게됐다.

“ICT산업이 발전할수록 퀄컴의 몫이 커지는 비즈니스 모델인데도 막강한 글로벌 공룡기업을 아무도 못 건드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거 재밌네? 한 번 자세히 파보자’는 생각으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죠.”

채 국장은 심사관 단계의 조사를 마무리하고 퀄컴이 불공정행위를 하고 있다고 판단, 이후 2015년 11월 퀄컴에 3200페이지에 달하는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평상시의 8배 분량이었다.

채 국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후 프랑스파리1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치면 학업을 중단하는게 보통이지만, 그는 귀국 후 방송통신대학에서 법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채 국장이 이번 사건 해결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채 국장은 “첫 심의때 피심인측 변호사의 첫 발언은 ‘잘 쓰여진 소설’이었다”며 “그날 저녁 직원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한 직원이 그간의 노력을 소설로 깎아내린 데 허탈해 하면서도 ‘잘 쓰여진’에 주목해 ‘우리가 잘 만든 게 아니냐'며 농담을 한 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조사부터 제재까지 꼬박 3년이 걸린 퀄컴 사건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빅이슈로 떠올랐다. 퀄컴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채 국장은 “원칙대로 처리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반박한다.

채규하 공정위 시장감시국장이 지난 12일 오전 집무실에서 퀄컴 제재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다.

◆ 현대차와 현대그룹 지분정리시킨 ‘상남자’

채 국장은 지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우리나라 대기업시책을 주도하는 공정위 기업집단과에 있었다. 그곳에서 사무관, 서기관, 과장 시절을 보냈다.

가장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은 2000년대 초반 기업집단과에서 해결한 현대그룹 ‘왕자의 난’ 사건이다. 2000년초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본인이 지배하는 현대건설 등 25개 비자동차부문을 건설그룹으로 계열분리하겠다고 공정위에 신청했다.

그러나 채 국장은 “본가가 집을 나가는 경우(역계열분리)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몽구 회장이 지배하는 현대자동차그룹에 대한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현대건설측 지분을 모두 처분하게 했다.

채 국장은 "결국 현대차그룹은 대북사업 등에 연계되지 않아 튼실한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그 과정에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 서명의 진위여부에 대해 옥신각신하는 등 여러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당시에는 현대측의 여러 압력으로 결정이 매우 어려웠지만, 원칙대로 처리한 결과 지금은 현대차그룹 사람들이 농담으로 '우리를 살려줘서 고맙다'고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하기도 한다"며 웃었다.

◆ “하이트진로와 한화그룹 총수일가 사익편취 조사결과 발표할 것”

1965년 전주에서 태어난 채 국장은 행정고시 33회로 과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에서 정책기획과, 위원장 비서 등을 거친후 공정위 기업집단과 사무관, 서기관, 과장을 거치며 출자총액제한제도 보완, 지주회사체제로의 전환 촉진을 위한 제도 개선 등 대기업시책 개편을 주로 담당했다. 이어 카르텔총괄과장 시절에는 은행 및 보험, 카드사의 담합행위를 제재했으며 소비자정책과장도 지냈다. 이어 대변인, 기획조정관을 역임한 후 시감국장을 맡았다. 2017년 2월 상임위원으로 승진했다.

시감국장을 역임하면서 현대·한진·CJ 등 굵직한 대기업의 부당한 내부거래 관행 및 총수일가의 사익편취 행위를 적발·시정했다. 올해는 하이트진로와 한화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공직 동기중 송상민 공정위 서울사무소장, 김영삼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정책관, 손병두 금융위원회 상임위원, 심화석 조세심판원장, 안도걸 기획재정부 복지예산심의관과 친하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중에서는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강석훈 청와대 경제수석, 오규석 대림산업 사장, 이용우 카카오뱅크 대표, 채명길 세틀뱅크 대표와 가깝게 지낸다.

그의 좌우명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다. 채 국장은 “대부분의 갈등은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이 원인이다. 열린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다”고 설명했다. 존경하는 선배로는 이동규 김앤장 고문(전 공정위 사무처장)을 꼽는다. 그는 “일보다는 사람을 먼저보는 이 선배의 자세와 지시하기 전에 경청하는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는 스타일을 본받고 싶다”고 했다.

채 국장은 특별한 취미는 없지만, 세종으로 이사한 후 집 근처 영화관에서 가끔 혼자서 영화를 본다. 주량은 소주 두병이다. 2015년 금연시작 후 올해는 뱃살빼기가 목표다. 일주일에 책한권 읽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공정위는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다. 업무는 과중하지만, 피해를 본 사람들의 목소리를 진정성 있게 듣고 내 가족의 일처럼 생각해야 한다. 국민들로부터 더 신뢰받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