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트렌드2017]④ 결정장애 공화국… 튀지 않으려 ‘평타’와 '추천'에 매달리는 사람들

  • 배정원 기자
  • 조현정 인턴기자

  • 입력 : 2016.11.30 07:00 | 수정 : 2016.11.30 08:09

    불확실성의 시대, 트렌드를 읽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전문가들은 10년 뒤 미래는 알수 없지만, 바로 당장 내년의 경제, 사회 모습은 지난 한해만 돌이켜봐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비즈는 올해 이슈를 기반으로 더치페이, 패스트 프리미엄, 뉴식스티, 긱 이코노미, 로보어드바이저, 자발적 가난 등 2017년을 지배할 총 12개의 트렌드를 뽑아 내년을 준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결정 장애는 더 이상 소수가 앓고 있는 희귀병이 아니다. 그것은 범국민적인 질환이며 일종의 신드롬이다./사진=조선 DB
    결정 장애는 더 이상 소수가 앓고 있는 희귀병이 아니다. 그것은 범국민적인 질환이며 일종의 신드롬이다./사진=조선 DB
    패션을 다루는 온라인 카페 ‘디젤 매니아’에는 추천 게시판이 따로 존재한다. ‘추천’이라는 단어를 검색만 해도 ‘추천을 부탁하는’ 게시물이 5~10분꼴로 올라오고 있다. 오늘 입을 옷에서부터, 여자친구와 주말 데이트 코스, 전주 한옥마을 맛집, 아르바이트 가기 전 듣기 좋은 음악, 심지어 입사할 회사까지 추천해달라는 다양한 글이 올라온다. 댓글에는 평타(무난하게 괜찮다는 뜻), ㅊㅊ(추천의 초성을 딴 것), 강추(매우 강하게 추천한다는 뜻) 등 추천과 관련된 신조어가 가득하다.

    추천 과잉의 시대다. 이는 범국민적인 질환인 결정장애와 떼어놓을 수 없는 현상이다. 매번 점심때 어느 식당을 가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겨우 자리에 앉게 되면 메뉴판을 보고 다시 한참을 고민하는 직장인이 수두룩하다.

    이제 더이상 “내가 결정장애가 있어서”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5000만 결정장애 국민을 위한 고민해결 상담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시작한 팟캐스트 ‘송은이&김숙 비밀보장’이 인기를 끈 것만 봐도, 바야흐로 온 국민이 한목소리로 결정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혼돈의 시대다.

    ◆ 편의점 과자, 자취방 침대, 시댁 대처법, 썸남썸녀 연애 고민도 모두 온라인상에서 추천을 부탁하는 시대

    전문가들은 ‘추천사회’와 ‘평타’는 이미 올해의 키워드로 자리 잡았지만, 사람들이 왜 결정장애를 말하지는지, 누구에게 결정을 맡기는지, 무엇을 위해 결정을 유보하는지 등 소비자 흐름을 읽을 수 있는가가 내년 비즈니스의 핵심이 되는 중요 단서라고 지적했다. 정보와 선택의 순간이 늘어나는 시대에 추천을 해달라는 요구는 결정장애자들의 넋두리가 아니라,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려는 미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화 ‘햄릿’의 한 장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에 빗대, 현대인이 수많은 선택 앞에서 겪는 결정장애를 ‘햄릿 증후군’이라고 부른다./사진=블룸버그
    영화 ‘햄릿’의 한 장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에 빗대, 현대인이 수많은 선택 앞에서 겪는 결정장애를 ‘햄릿 증후군’이라고 부른다./사진=블룸버그
    백경혜 다음소프트 연구원은 “추천은 단순히 타인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수동적인 행위이기보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현대인의 능동적인 문화”라며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점이 이제는 무능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비자들도 추천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대학생 강민구(수원 팔달구 화서동·27세) 씨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걸 구매하거나 경험할 때 그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은 두려울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더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얻으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봐요. 요즘 같은 세상에 잘 모르고 덤비다간 ‘호갱(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손님)’이 되기 딱 좋잖아요.”

    대학생 박솔(부산시 금정구 남산동·26세) 씨도 소비자들이 추천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점을 똑똑한 소비 형태라고 봤다. “같은 돈 주고 더 좋은 걸 사고 싶은 심리 아닐까요. 딱히 자기 줏대 없이 남에게 결정을 맡기는 행위라곤 생각 안 해요. 예를들어, 10만원을 써야 할 때 그 가치를 최대로 추구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검증된 정보를 통해 최대한 ‘가성비’를 따지고 싶어하는 거죠.”

    다만 추천의 정보를 맹신해선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직장인 허수민(부산 동래구 온천동·26세)씨는 실제로 인터넷 추천으로 낭패를 봤다고 말했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추천에 의지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실제로 인터넷상에서 추천받은 음식점이나 장소에 큰 실망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어요. 추천은 단지 선택을 위한 참고로 사용해야 하지 그걸 맹신하면 부작용을 낳게 되는 것 같아요.”

    ◆ 튀는 건 싫고 조용히 묻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원하는 ‘평타’

    추천 사회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신조어가 평타다.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패딩 추천 좀. 코오롱, 네파 둘 다 평타 치나요? 뭐가 더 나은지 골라주세요.’ ‘남자 평타치는 코트 추천 좀 30만원 미만으로’ ‘데일리로 바를 립글로스 색깔로 로즈핑크 평타 치겠죠?’ 등 평타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평타’는 외모, 성적, 능력 따위가 평균, 보통 정도 되는 수준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평균 타율 정도는 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평균이상이면 ‘상타’, 평균 이하면 ‘하타’라고 쓰인다. 그런데 위의 질문 중 어느 누구도 상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패딩도, 코트도, 립글로즈도 모두 평타를 목표로 한다. 개성을 추구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소비만 할 것 같은 요즘 소비자가 무난한 제품, 평타를 찾는 이유가 뭘까?

     에뛰드 ‘디어달링’은 10대 소녀 사이에 ‘평타’ 제품으로 꼽힌다. /사진=에뛰드 하우스 제공
    에뛰드 ‘디어달링’은 10대 소녀 사이에 ‘평타’ 제품으로 꼽힌다. /사진=에뛰드 하우스 제공
    “‘나’는 핑크색 머리를 해도 박수갈채를 받는 지드래곤이 아닐 것이고, 셔츠를 거꾸로 입어도 트렌디하다는 탄성을 듣는 패셔니스타도 아닐 것이다. 평타를 추구하는 이들은 트렌드세터나 얼리어답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2G폰을 고수하고 대세를 거부하는 고집 있는 유형도 아니다. 그들은 유연하고, 적절하게 또래와 시대의 눈치를 살피며 현실에 타협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신간 ‘2017 트렌드노트’는 ‘평타를 찾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다. 무난한 ‘평타’ 제품은 일종의 보호색이라는 것이다. 무리 속에서 튀지 않고 주변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안정적인 아이템이다. ‘평타’라는 필터를 통해 ‘우월함’이 아닌 ‘안심’을 얻는다는 얘기다.

    대학생 이지원(동작구 상도동·26세)씨는 주변에서 욕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평타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튀는 건 싫고 조용히 묻어가고 싶은, 평범하고픈 마음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생각해요. ‘튀려고 한다’ 혹은 ‘왜 너만 다르냐’, ‘관심종자냐’ 등 부정적 인식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더 평범함에 집착하는 것 같아요. 사실 이런 현상 때문에 개개인의 개성이 점차 사라지는 것 같아요. 요즘 테니스 스커트가 유행하니깐 여대생들이 교복처럼 그것만 입잖아요. 이런 걸 보면 한국사회가 평범함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런 추천을 통해 평범한 무리에 끼고 싶은 거죠.”

    ◆ 평타를 제대로 치면 ‘국민 아이템’으로 등극

    기업은 과연 어떤 제품이 ‘평타’로 꼽히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추천 게시판에서 ‘평타는 친다’는 답변을 받은 상품은 누구나 가져야 하는 국민 아이템이 되기 때문이다.

     자취생의 국민 책상으로 거듭난 소프시스 책상/사진=소프시스 제공
    자취생의 국민 책상으로 거듭난 소프시스 책상/사진=소프시스 제공
    10대 소녀 커뮤니티에서 언급된 에뛰드 ‘디어달링’은 ‘국민 틴트’ ‘학생 틴트’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에띄드 효자 상품이다. 4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과 은은하고 자연스럽게 발린다는 입소문까지 더해 ‘학교에서 튀지 않는’ 무난함까지 검증받았다. 20대 자취방의 ‘국민 책상’으로 거듭난 가구도 있다. 바로 3만9900원의 소프시스 책상인데, 이케아적인 느낌을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구현해주기 때문에 자취생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평타에는 시대의 욕구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신수정 다음소프트 연구원은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유진 집 거실에 깔려 있는 ‘로희 매트’가 ‘국민 매트’로 인기를 끄는 것에는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과 ‘층간 소음’이라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과거 자취방의 상징과 같던 첫 옷장과 좌식 책상이 자취를 감추고 소프시스와 이케아가 자취방의 인테리어를 담당하게 된 것도 최근에 생긴 일로,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사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평타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 시대를 읽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참고도서: 트렌드 코리아 2017(미래의창), 2017 대한민국 트렌드(한국경제신문), 2017 트렌드 노트(북스톤), 라이프트렌드 2017(부키), 모바일 트렌드 2017(미래의창), 대한민국 토탈 트렌드 2017(예문)

    • 기사보내기
    • facebook
    • twitter
    • google
    • e-mail
  • Copyrights © 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