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108년 패배주의 깬 리더십

  • 이혜운 기자

  • 입력 : 2016.11.12 03:05

    두 개 저주 풀고 '야구 대통령'된 테오 엡스타인 시카고 컵스 사장
    선수 아닌 '인간'을 스카우트… 팀 존중하는 인재 영입해 키웠다

    테오 엡스타인

    "우리는 뉴욕 양키스가 아니다. 양키스의 성공 방식은 무시하라. 그리고 우리만의 성공 방식에 집중하라."

    2002년 말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에 지명된 테오 엡스타인(Epstein·43·사진)은 선수들 앞에서 이같이 말했다.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는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었다. 아메리칸 리그에서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에 번번이 패하며 열등감이 높았다. '밤비노의 저주'에 걸려 80년 넘게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들어보지 못했다. 밤비노의 저주란, 보스턴 레드삭스가 1920년 밤비노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간판선수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에 넘긴 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단장의 게임'이다. 단장을 '야구의 건축가'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국·일본과 달리 단장이 선수단 구성과 팀 운영 전권을 행사한다. 신인 선발부터 트레이드, 자유계약선수(FA) 영입도 단장 몫이다. 이 때문에 각 구단은 능력 있는 단장을 영입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가 염두에 둔 1순위는 영화 '머니볼'의 실제 주인공인 빌리 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그러나 그가 거절하면서 엡스타인이 단장을 맡게 됐다.

    당시 엡스타인의 나이는 29세. 미 메이저리그 사상 최연소 단장이었다. 경력이라고는 변호사 자격증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잠깐 일한 것이 전부였다. 레드삭스를 위해 태어난다고 말하는 보스턴 시민들이 보기엔 탐탁지 않은 애송이었다.

    그는 2년 뒤 그러나 86년 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물리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게 된다. 그리고 시카고 컵스 사장으로 옮겨 메이저리그 내 가장 오래된 저주인 '염소의 저주'를 깨고 108년 만의 우승도 이끌었다. 염소의 저주란 시카고 컵스 홈구장인 리글리필드에 한 관중이 염소를 데리고 입장하려다 거절당하자 "다시는 이곳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으리라"고 말한 것을 뜻한다.

    이 두 저주가 엡스타인 손에서 풀리자 미 언론들은 그를 '저주 파괴자(curse breaker)' '퇴마사(exorcist)'라고 부르고 있다. 엡스타인의 리더십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패배주의와 열등감에 휩싸였던 팀원들을 우승으로 이끌었을까.

    “난 오늘 테오 엡스타인에게 투표했다.”

    미국 대선이 치러진 9일(현지 시각) 페이스북 등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에는 이 같은 인증글들이 올라왔다. 미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나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아닌 엡스타인 시카고 컵스 사장을 적었다는 것이다. 미 언론들은 이런 SNS 반응에 엡스타인 사장의 정계 진출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미 야구단은 하나의 거대 기업이다. 경제지 포브스가 책정한 시카고 컵스의 가치는 22억달러. 스포츠전문채널 ESPN은 우승 전인 지난 9월 엡스타인 사장을 올해의 경영인으로 선정했다. 매년 30개 구단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미 메이저리그에서 그는 뛰어난 인재 운용과 과감한 혁신, 빅데이터의 활용 등으로 팀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 컵스
    1 잠재력 있는 인재를 발굴하라

    선수 한 명을 영입하는데 몇억달러씩 쓰는 미 메이저리그에서 엡스타인 사장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숨은 인재를 찾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영입해 키워서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22세에 불과한 애디슨 러셀부터 하비에르 바에즈, 크리스 브라이언트 등 젊은 선수들은 싼값에 데려와 키웠고, 존 레스터, 벤 조브리스트, 제이슨 헤이워드 등 꼭 필요한 인재들은 거금을 들여서라도 잡았다. 명장(名將) 조 매든 감독을 영입한 것도 그의 작품이었다.

    엠엘비닷컴(mlb.com)은 7일 엡스타인 사장이 잘한 10대 트레이드를 발표하며 "그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완벽에 가까운 트레이드를 이끌어 냈다"며 "상대팀에 비해 일방적인 이득을 취한 나무랄 데 없는 결정이었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엡스타인의 인재 기용에 대해 "그의 목표는 팀을 스카우트와 선수 육성을 동시에 해내는 기계와도 같은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인재를 선호할까. 시카고 컵스의 포수 데이브 로스는 "엡스타인은 야구에 대한 기본 실력은 물론이고, 야구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굉장히 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선수들에게 어떻게 자라왔는지 묻고, 동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찰한다는 것이다. 결국 엡스타인 사장은 '선수가 아닌 인간을 스카우트하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엡스타인 사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스카우트 원칙에 대해 한 번 밝힌 적이 있다. 그는 '실패를 대하는 자세'를 본다고 했다. 그는 "나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유심히 본다"며 "최고의 타자도 열에 일곱은 실패한다는 말처럼 야구는 실패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 팀을 리빌딩하라

    엡스타인 사장은 인재를 중시하지만, 팀의 균형을 해치는 선수는 스타플레이어라도 언제든 내보낸다. 스타를 통한 경기 운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승할 수 있도록 팀 자체를 리빌딩(rebuilding·재건)하는 것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 시절에도 팀의 간판이었던 노마 가르시아파라를 방출해 당시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결국 이를 통해 저주를 풀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타보다 팀을 우선시하는 건 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보스턴에서 밤비노의 저주를 풀었을 때도, 시카고에서 염소의 저주를 풀었을 때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언제나 뒤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돌렸다.

    시카고 컵스가 우승한 직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엡스타인 사장은 "난 이 구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정말 영광이다. 나는 진짜 운이 좋았다. 내 뒤에는 100명이 넘는 직원들이 팀의 우승을 1순위 목표로 두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지난 7일 두 개의 저주를 풀어버린 공으로 미 스포팅뉴스가 그를 올해의 구단 임원에 선정했을 때도 "월드시리즈 우승 뒤에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뤄지는 수천 명의 노고와 수천 개의 희생이 있다"며 공을 돌렸다.

    제드 호이어 시카고 컵스 단장은 "그는 항상 자신을 위해 일하는 직원들에게 존중을 표한다.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들어주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가능한 많은 사람이 참여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말했다.

    3 新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엡스타인 사장은 구단을 경영할 때 신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이에 대해 "두 개의 렌즈를 통해 봄으로써 초점을 정확히 맞춘다"고 설명했다.

    그가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에 취임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창고 경비원 출신인 야구 저술가 빌 제임스를 고문으로 앉히고 그가 개발한 '세이버 메트릭스'를 선수 스카우트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세이버 메트릭스란,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를 통계·수학적으로 분석해 선수의 재능을 평가하는 것이다.

    제임스가 이 방법을 개발한 건 1970년대였지만, 명문 구단에서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고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엡스타인 사장은 이 방법을 과감히 활용했고 보스턴 레드삭스를 '고비용 저효율'에서 '저연봉 고효율' 시스템으로 바꿔놨다.

    시카고 컵스로 옮긴 후에는 '빅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먼저 선수들의 동작을 미 3D(차원) 영상업체 키나트랙스의 '마커리스 모션 픽처' 기술로 모두 촬영했다. 이 기술은 영화 '아바타' 등에서 사용된 모션 픽처 기술에 스포츠 생체 공학을 결합한 것이다. 영화에서 사용한 모션 픽처는 배우들에게 부착된 표시장치를 통해 동작이 기록된다. 하지만 키나트랙스의 기술은 표시장치 없이 선수들의 동작을 촬영할 수 있다.

    이렇게 촬영된 3D 영상은 인도의 영상분석 전문 소프트웨어 회사인 아이메리트로 보내 분석된다. 아이메리트는 이런 영상들을 다양한 모형으로 분류한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를 선수의 기량을 끌어올리거나 부상을 방지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수의 성적이 부진할 경우와 가장 좋았던 경우를 비교해 문제점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뉴욕 옵저버는 "엡스타인은 이 기술을 통해 상대팀 투수의 약점을 분석하고 자기팀 선수들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데 적극 활용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테오 엡스타인 시카고 컵스 사장이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테오 엡스타인 시카고 컵스 사장이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4 긍정의 힘을 불어넣어라

    스포츠는 멘탈 게임이다. 징크스나 저주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엡스타인 사장은 "세상에 깨지지 않는 징크스는 없다"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오랜 저주로 팀을 뒤덮고 있는 패배주의를 걷어내야만 우승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열린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도 10회 초를 앞두고 비가 와 경기가 중단됐을 때 엡스타인은 클럽하우스를 찾아 선수들을 격려했다. 그는 선수들과 함께 "우리는 해낼 것이다", "가서 점수를 내자"며 외쳤다. 당시 경기는 동점으로 연장전에 들어간 상황이었지만, 시카고 컵스는 추가 점수를 내며 우승했다.

    엡스타인 사장은 패배주의를 걷어내기 위해 팀뿐 아니라 시카고 전체에도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불어넣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두 번의 우승을 이루고 시카고 컵스로 이직할 때, 일각에서는 그가 이뤄놓은 평판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이에 대해 그는 "더 큰 도전을 하고 싶다"며 우려를 일축했다. 시카고의 한 시민은 그에게 "제 아버지는 87세입니다. 그는 일생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아버지에게 비타민을 잘 챙겨 드시라고 하세요. 몇 년 안에 우승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보스턴글로브는 엡스타인 사장의 성공 비결로 "지성과 호기심, 비전의 명확함, 대담함과 창의력, 디테일에 대한 집중" 등을 꼽기도 했다.

    5 끊임없이 혁신하라

    엡스타인 사장의 혁신은 팀 밖에서도 진행됐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이던 그는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군 후 홈구장인 펜웨이파크를 전면 개·보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관중석 통로를 확장하고 외야 좌석을 1000석 정도 늘리는 작업이었다. 우승으로 입장객이 훨씬 늘어날 테니 좌석을 늘려 수익을 높여야 한다는 경영상 판단 때문이었다. 관중이 늘어나면 선수단 분위기도 개선되고, 수입 증가로 구단 전체의 전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러나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반발했다. 겨우 '밤비노의 저주'를 극복했는데, 그 '성지(聖地)'에 대공사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미신이니 저주니 하는 말들이 통할 리 없다"며 "빈틈없는 계획으로 팀 전력을 극대화한 뒤 수익을 최대화하는 것은 프로 야구단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말했다.

    그는 뉴욕 양키스처럼 새 구장은 짓지 않고, 보스턴 레드삭스가 기존에 구사하던 '소형 경기장, 고가 입장권' 전략은 유지하도록 했다. 티켓이 귀할수록 열성팬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입장권 가격이 올라간다는 점을 노린 전략이었다.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도 엡스타인 단장 시절 보스턴 레드삭스가 미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가장 적은 좌석을 보유하면서도 입장료 수입은 뉴욕 양키스에 이어 항상 2위를 기록할 정도로 장사를 잘하는 것에 대해 "고객을 흥분시켜 소비를 촉발하고, 티켓 희소성을 높여 가격을 올리며, 경기 외에 '체험'을 파는 '경영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테오 엡스타인은

    테오 엡스타인 시카고 컵스 사장은 1973년 미국 뉴욕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필립은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카사블랑카’의 각본을 썼고, 아버지 레슬리는 소설가로 보스턴대에서 창작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여동생인 안야또한 ‘강력살인’ 등 미국 유명 드라마의 각본에 참여한 바 있다.

    엡스타인 사장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야구와 인연이 없었다. 교내 야구부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 1991년 예일대에 입학한 후 교내 신문인 ‘예일 데일리 뉴스’에서 스포츠 담당 부장을 맡으며 야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이는 대학 졸업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의 홍보부에 취직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일하면서 샌디에이고대 로스쿨을 다니고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이곳에서 메이저리그 경력을 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멘토 래리 루치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사장(현 보스턴 레드삭스 사장)을 만났다.

    루치노 사장은 프린스턴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아이비리그 출신의 변호사였다. 엡스타인의 성공은 메이저리그 내 젊은 단장의 전성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밤비노의 저주

    밤비노의 저주
    /조선일보 DB
    미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 보스턴 레드삭스의 간판스타였던 그는 1920년 구단의 재정난 때문에 헐값에 뉴욕 양키스로 이적됐다.그의 별명은 어린아이를 뜻하는 ‘밤비노’.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하는 ‘밤비노의 저주’에 걸렸다.

    염소의 저주

    염소의 저주
    /조선일보 DB
    1945년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에서 자신이 기르는 애완 염소를 끌고 입장하려다 저지당하는 빌리 시아니스. 그는 염소의 표까지 두 장을 구입했다며 입장을 요구했지만, 관중들은 염소의 냄새가 심하다며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결국 퇴장당한 그는 “다시는 이곳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으리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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