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전국민은 부모의 사랑조차 느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신원영(당시 7세)군의 가슴 아픈 소식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계모 밑에서 자란 신 군은 수 년간 굶주림과 구타 등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신 군의 계모는 창문에 환풍기가 달려 바깥 공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화장실에 원영이를 한겨울 내내 가둬둔 것으로 나타났다. 신 군은 화장실 바닥에 매트 한 장을 깔고, 밥과 반찬을 섞은 하루 한 끼로 약 3개월을 버텼다. 기력이 떨어진 원영이에게 락스 원액과 찬물을 퍼부어 신 군을 죽인 계모와 친부는, 시체를 평택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정부가 가정폭력을 ‘4대 사회 악’ 중 하나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한 지 약 3년이 지났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오히려 이전보다도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에 내놓은 대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물론, ‘제2의 원영이’가 속출하는데도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 DB

◆ 학생-부모 예방교육 강화한다 했지만 ‘감감 무소식’…일 떠넘기기에 정신없는 정부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4대 사회악으로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을 꼽고 임기 내 척결하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따라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법무부, 기획재정부 등은 지난 2013년 6월 ‘가정폭력 방지 종합대책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대책이 발표된 지 3년이 넘은 지금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전국 가정폭력 검거건수는 총 4만822건으로, 대책 발표 직전인 2012년(8762건)에 비해 3만2060건 늘어났다. 가정폭력 검거건은 2013년(1만6785건) 1만건을 넘어선 이후 지난해 들어 4만건대로 폭주했다. 같은 기간 가정폭력 검거 인원 역시 9345명에서 4만7549명으로 증가했다. 검거 건수와 검거 인원이 다른 것은 한 건당 검거 인원이 한 명 이상이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정부의 종합대책안 중 상당수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사후 조치보다 예방이 중요한 만큼 학생, 부모, 관련 기관 종사자 등 각계각층 대상 교육이 강화됐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여가부가 주관한 ‘가정폭력 예방 통합교육 운영 기반 강화’ 정책이 대표적이다. 당초 여가부는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등 내용을 모두 포함한 ‘성인권’ 교육을 전국 학교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확대 추진한다고 밝혔다. 2013년 당시 전국 17개 시도 중 5개 시도에서 실시되고 있던 이 교육은 현재 6개 시도에서 운영되고 있다. 3년간 1개 시도 증가에 그친 것이다.

이에 대해 여가부 관계자는 “전국으로 확대하려 했지만, 올해 역시 예산 반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며 “교육부에서도 관련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교육부 내용만 정규 교과과정에 편성되다보니 비슷한 내용을 두고도 각 부처가 각각의 노선으로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유치원, 초등학교 ‘바른생활’, ‘도덕’, ‘실과’ 등의 교과목에 가정폭력 예방교육을 반영하고 있다.

부모에 의해 발생하는 아동학대를 예방하겠다며 부모교육 이수 근거를 마련하고 제도화 방안을 연구하겠다고 했지만, 이 또한 감감 무소식이다. 대책 발표 당시 주관 부처였던 복지부는 “현재 이 정책은 복지부 내에선 추진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있다”며 “여가부가 가정폭력의 주관부처인 만큼, 그쪽에서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있다”고 설명했다. 여가부는 “이 정책은 여가부가 아닌 복지부 소관”이라고 다시 공을 넘겼다.

의료기관, 교사, 아동복지시설, 응급구조사, 사회복지전담공무원 등 지역아동보호 전문기관 종사자 22개 직군을 대상으로 교육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이 역시 허울 뿐이다. 22개 직군 중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종합병원·유치원·어린이집·학교 종사자 뿐이다. 교육시간 또한 연 1회 한 시간씩에 불과하다.

이진희 디자이너

◆ 피해자 보듬어주는 지원시설 확대한다 했지만…한 자릿수 증가 그쳐

가정폭력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가정이란 울타리가 파괴된 만큼 국가가 보듬어줘야 하지만, 피해자 지원 관련 정책 역시 2013년과 비교했을 때 거의 나아진 바가 없다.

여가부는 10세 이상 남자 아이를 동반할 수 있는 ‘가족보호시설’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2013년 16개소에서 올해 6월말 기준 20개소로 4개소 증가에 그쳤다. 가족보호시설은 가정폭력 쉼터가 운영하는 곳인데, 이 쉼터는 같은 기간 70개에서 68개로 오히려 줄었다.

여가부 관계자는 “쉼터와 가족보호시설은 운영자가 신고해서 폐업하고, 지자체에서 지도관리 및 감독을 한다”며 사실상 여가부의 권한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폭력피해 이주여성을 위한 쉼터 역시 전국 25개소에 불과하다. 2013년(22개소)에 비하면 단 3개소 증가한 것이다.

가정폭력은 여성, 어린이 뿐만 아니라 노인 대상으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를 고려한 정부는 “가정 내 은폐돼 있는 노인학대 사례를 적극 발굴하고, 피해노인에 대한 상담·의료·법률·일시보호 등 관련 서비스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복지부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을 확충하고, 상담 인력을 충원하겠다는 세부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2013년 24개소였던 노인보호전문기관은 현재 29개소로 5곳 증가에 그쳤다. 사회복지사 등 상담 인력은 현재 1개소당 평균 8명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1개소당 평균 8명이라는 기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고 말했다. 즉 상담 인력 충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 전문가 “가해자-피해자 교육 외 신고자 교육 또한 활성화하고, 일회성 교육 체제 벗어나야”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에 대한 전국민의 인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신이 당하는 가정폭력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말고, 주변에서 발생하는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다.

전진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정신건강연구센터장은 “옆집에서 부부싸움이 발생했을 때, 주민들은 집안 내 문제라고 생각할 뿐 가정폭력이라고 인지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며 “이 때문에 제때 신고를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가정폭력의 당사자와 가해자를 대상으로 한 예방교육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가정폭력 목격자로서의 예방교육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며 “제때 신고해주는 것이 가정폭력을 줄이는 데 상당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옥희 한국가족사랑연구원장은 “가정폭력 교육의 빈도수를 높이고, 태도 변화에 따라 보상을 차별화 하는 등의 근본적 정책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에 따르면, 이미 훌륭한 부모는 아이에게 더 잘해주고 싶어 교육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반면, 정작 교육이 필요한 부모는 당장 돈 벌기가 바빠 교육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초생활수급자 중에는 지원금을 모두 유흥에 탕진하고, 가정폭력 교육에는 참석하지 않는 부모도 상당수라고 전했다.

김 원장은 “교육 참여,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속력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가정폭력은 대물림 되는 만큼, 일회성 교육이 아닌 지속적인 교육과 상담을 꾸준히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