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님, 야후는 ‘다음’이 물리치겠습니다.”

1999년 중앙일간지에 게재된 한 광고의 도발적인 문구가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999년은 ADSL 초고속 인터넷이 처음 상용화되고, 스타크래프트 열풍으로 전국에 PC방이 창궐하면서 국내에서도 인터넷 문화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때다. 당시 국내 인터넷 사이트로는 일찍이 1997년 한국에 상륙한 야후가 시장 선점 효과를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99년 다음의 1차 지면 광고. 야후도, 다음도 모르는 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지만, 도발적인 문구만큼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인터넷 영토를 외국계 기업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이 벤처의 당찬 선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한국 인터넷 대중화의 마중물 역할을 한 토종 포털 사이트 ‘다음(DAUM)’이 역사의 첫 장을 열어 젖힌 순간이었다.

◆ 인터넷이라는 황무지에 도시를 세우자는 꿈을 꾼 세 청년

다음은 이재웅과 이택경, 박건희 세 명의 공동창업자가 1995년 설립한 다음커뮤니케이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 공동 창업자의 교집합은 이재웅 대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재웅 대표는 국내 벤처 업계의 ‘황금 학번’으로 불리는 86학번 세대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김정주 NXC 회장, 배인식 그래텍 창업자 등이 모두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의 기반을 다진 황금의 86학번으로 불린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

이재웅과 이택경 두 사람은 연세대학교 전산학과 선후배 사이다. 둘은 PC통신 동아리 활동도 함께 하면서 웹과 인터넷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다. 또 이재웅과 박건희 두 사람은 서울 영동고등학교 동기다. 박건희 공동창업자는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한 예술학도였는데,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 당시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던 이재웅 대표를 다시 만나 막역한 사이로 발전했다.

인터넷이라는 황무지에 도시를 세우자는 뜻을 함께 한 세 사람은 1995년 2월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서울 청담동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창업했다. 세 공동창업자가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창업하면서 처음부터 포털 사이트 사업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사업 모델은 크게 개발 용역과 인터넷 서비스 두 가지였다.

개발 용역 사업은 당장 회사를 이끌어가는 주력 수익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갑자기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 웹 개발자가 귀했기 때문에 홈페이지나 인트라넷 개발 용역이 고부가가치 사업이었다. 개발 용역 사업에서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인트라웍스’라는 인트라넷용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출시하기도 했다. 주로 대기업들이 내부적으로 구축한 업무망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그룹웨어 패키지 솔루션이었다.

인터넷 서비스 사업에서는 개발 용역 사업에서 거둔 수익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펼칠 수 있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첫 인터넷 서비스는 인터넷으로 예술 작가들의 사진과 회화 등을 전시하는 가상 갤러리였다. 이와 함께 1995년 광주 비엔날레를 인터넷으로 24시간 생중계하는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가상 갤러리에서 전시한 세잔(cezanne)의 1996년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

여기에는 예술학도였던 박건희 공동창업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비록 같은 해 스물 아홉의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지만,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실험은 멈추지 않았다. 패션 전문 서비스 ‘패션넷’, 영화 전문 커뮤니티 키노와 함께 한 ‘싸이네마’, 여행 전문 서비스 ‘투어월드’, 10대를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채널텐(Ch.10)’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영역을 아우르는 서비스를 연이어 내놨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인터넷 인구가 한정적이었던 당시 콘텐츠 중심의 온라인 서비스로는 수익을 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장기적인 비전 없는 개발 용역 사업에만 매달려 있을 수만도 없었다. 결국 이재웅 대표와 이택경 CTO(최고기술경영자)는 기존 인트라넷 시스템 개발을 통해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술 기반의 온라인 서비스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웹 메일 서비스였다. 1996년 미국에서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핫메일(Hotmail)이 그들의 벤치마킹 모델이었다. 핫메일 이전에는 이메일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별도의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핫메일은 인터넷 접속만 할 수 있으면 웹 브라우저로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최초로 시작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핫메일과 같은 서비스를 한글로 제공한다면 그 역시 최초가 될 것임은 분명했다.

◆ 인터넷 서비스 런칭 3년 만에 글로벌 공룡을 무너뜨리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기존 사업 역량을 집중해 1997년 5월 ‘평생 무료 이메일’을 표방하는 ‘한메일넷(Hanmail.net)’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메일넷은 국내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이듬해인 1998년 7월 회원수 50만명, 같은 해 12월에는 100만 회원을 돌파했다. 대학이나 학원에서도 속속 인터넷 교육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이메일 만들기 열풍이 불었고, 그 수요는 온전히 한메일넷으로 몰렸다.

1990년대 말 인터넷을 접해본 사람 치고 한메일넷 계정 하나 없었던 이가 없었을 정도로 한메일넷은 이메일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인터넷 생태계는 외국계 포털 야후의 영향력이 강했고, 인터넷의 사업성을 내다본 대기업도 속속 시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메일넷은 벤처 특유의 빠른 의사결정과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시장 선점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비슷한 시기에 깨비메일이라는 서비스가 등장해 한메일넷과 경쟁했지만, 결국 시장에는 한메일넷만 살아남았다.

한메일넷 서비스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다음커뮤니케이션은 회원수 증가에 따르는 서버 운영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무료 온라인 서비스와 연계되는 광고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 전이었던 탓이다. 더우기 1998년에는 IMF의 여파로 대기업들도 휘청거릴 정도로 국내 경기가 크게 위축돼 있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도 빚을 떠안아가며 한메일넷을 운영하던 중 이재웅 대표가 독일 소재의 다국적 미디어 회사 베델스만으로부터 5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베델스만과의 인연은 이재웅 대표의 유럽 유학 시절 맺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숨통이 트인 한메일넷은 확보한 회원수를 바탕으로 카페 서비스를 선보였고, 이는 한메일넷이 포털 사이트 다음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이재웅 대표는 사업을 구상하던 초기부터 인터넷 기반의 온라인 광고 시장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하고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이어온 것도 광고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재웅 대표는 2009년 리프트 아시아(Lift Aisa) 컨퍼런스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저는 광고 시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다음을 시작한 것도 콘텐츠를 프로페셔널하게 제공하면 돈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다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조금씩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해놓자고 출발한 게 다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정확히 하고, 잘 준비해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도 더 중요하다. 넥슨도 게임이라는 장기 비전은 있었지만, 초기엔 소프트웨어 개발을 5년 정도 하다가 중간에 게임을 개발해 지금의 게임 회사로 자리 잡았다. 이용자에 대한 예측을 정확히 하는 것보다 미래 비전을 갖고 하나씩 적용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강조했다.

한메일의 포털 전환을 고려할 당시 일각에서는 상한가를 달리던 이메일과 카페 서비스에 더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재웅 대표는 포털이야말로 온라인 콘텐츠를 유통하는 최적의 플랫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과적으로 한메일넷에서 다음 포털로의 변신은 성공적이었고,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기점을 맞게 된다.

199년 한메일넷과 카페 서비스에서 종합 포털 사이트의 모습을 갖춘 다음이 등장하면서 국내 포털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1999년 다음을 런칭한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같은 해 11월 11일 국내 토종 포털 회사로서 처음으로 코스닥에 입성하면서 한국 인터넷 역사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당시 다음은 공모 이후 26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속 상한가를 세우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상장 이후 다음은 메일과 카페 외에도 온라인 쇼핑몰 등 서비스를 확장하며 포털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다음은 그 결과 2000년 4월 회원수 1000만명, 같은 해 11월에는 회원수 2000만명을 돌파하며 외연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다음 카페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커뮤니티는 다음만의 강력한 무기였다. 외국계 포털 야후와 싸워 이기겠다는 다음의 선전포고도 결국 2000년 말 현실이 됐다.

이재웅 대표는 리프트 아시아 2009에서 “사실 1995~1997년도를 생각하면 그땐 인터넷 생태계가 지금처럼 건강하지 않았다. LG 채널아이, 데이콤 천리안, 삼성 유니텔, 현대 아이넷 등 많은 대기업이 인터넷 사업을 하고 있었고, 야후라는 강한 외국 기업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어 “그럼에도 역시 벤처의 장점은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이용자와 상호작용이 빠른 데 있다. 네어버나 다음의 과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네이버와 다음이 가장 기민하게 이용자 변화에 대응해왔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부분이 새롭게 창업하거나, 가치를 만드는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 한국 포털의 역사와 함께 한 20년…모바일에 길을 내주다

다음의 성장과 함께 이재웅 대표도 인터넷 시대 리더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이재웅 대표는 2000년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하는 ‘미래의 세계 지도자’ 100인에 포함됐다. 같은 해 다음커뮤니케이션은 포브스가 선정하는 세계 300대 유망 중소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재웅 대표가 2001년 모델로 출연한 기아자동차 옵티마 광고는 ‘누군가는 앞서가야 한다’는 슬로건과 함께 이재웅 대표와 옵티마의 진보주의를 강조했다.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는 이재웅 대표의 성향은 다음의 기업 문화에도 적극 반영됐다. 다음은 직원들이 서로 직급으로 호칭하지 않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는 수평적인 문화를 지향하면서 젊은 인재들이 가장 가고 싶은 기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다음의 제주도 이전 결정 역시 그의 고집이자 결단의 산물이었다.

다음은 2004년부터 지능화연구소를 시작으로 제주도에 거점을 세우는 색다른 실험을 펼치면서 국내 인터넷 기업의 첫 지방 이전 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업 구조도 미디어, 전자상거래, 금융, 글로벌 등 4개 핵심 부문으로 나눠 단순한 포털 사이트를 넘어 인터넷 사용자들의 생활 전반과 접점을 찾고자 했다. 온라인 뉴스 플랫폼 미디어다음, 아켓플레이스 서비스 다음오켓, 자동차 보험 서비스 다음다이렉트, 동영상 통합 브랜드 TV팟 등이 대표적이다.

2006년 완공한 제주 다음 글로벌 미디어 센터(GMC) 전경.
2012년 완공한 제주 다음 스페이스닷원(Space.1) 본사 전경.

하지만 외국계 포털 야후와의 경쟁에서는 승리한 다음 또한 후발주자였던 국내 포털 네이버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다음이 이메일과 카페를 주력으로 했다면, 당시 네이버는 지식 공유 서비스 ‘지식인’을 필두로 검색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인터넷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검색의 중요성은 날로 높아졌고, 2000년 중반 들어 네이버가 국내 포털 사이트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다음이 2002년 파격적으로 시도한 온라인 우표제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스팸 메일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다음은 대량으로 송신하는 이메일에 비용을 부과하되, 수신자가 정보성 이메일이라는 피드백을 주면 낸 비용을 면제해주는 온라인 우표제를 도입했다. 일반 사용자에게 온라인 우표제는 큰 걸림돌이 아니었지만, 한창 이메일 마케팅을 시작한 기업들에게는 얘기가 달랐다.

결국 대다수의 기업들은 사이트 가입 시 메일 입력란에 한메일은 받지 않는 등 강경 대응을 취하기에 이른다. 이미 네이버, 엠파스, 파란 등 경쟁 포털 서비스도 무료 이메일을 기본적으로 제공하고 있었던 터라 한메일 대신 다른 이메일로 갈아타는 사용자들이 늘었다. 이메일을 포함해 다양한 서비스의 관문 역할을 하는 포털의 특성상 한메일 사용자의 감소는 다음 방문자의 점유율 감소로도 이어졌다.

다음이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2004년 인수한 미국 포털 라이코스도 애물단지로 전락하면서 악재로 작용했다. 다음의 라이코스 인수는 한국 기업이 세계적인 브랜드 인지도를 가진 인터넷 기업을 인수한 첫 사례로 주목 받았으나, 인수 후 활용도는 높지 않았다. 다음은 2010년에 이르러서야 라이코스를 인도계 광고대행업체 와이브랜트에 매각했으나, 이후 매각 대금을 두고 소송을 치르기도 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카카오는 2014년 8월 27일 합병 계약을 체결하고, 다음카카오를 출범하면서 시가총액 10조원에 육박하는 거대 IT 기업의 탄생을 알렸다.

이재웅 대표는 2008년 3월 다음커뮤니케이션의 등기이사직을 사임하고, 7월에는 완전히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13년 다음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재웅 대표는 사임 이후에도 다음커뮤니케이션의 최대 주주 자리는 유지했으나, 이마저도 2014년 다음커뮤니케이션과 카카오의 합병으로 김범수 카카오 의장에게 넘겼다. 두 회사의 합병으로 재출범한 다음카카오는 이듬해 카카오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다음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 사회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기업의 든든한 후원자로

이재웅 대표는 2015년 9월 1일 다음카카오가 카카오로 사명을 변경한 다음 날 새벽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은 이제 없어집니다만, 이 다음엔 선배들을 거울 삼아 새롭게 이 사회의 다양성을 좀 더 진작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조화롭게 모아내고,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바꾸면서도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그런 많은 서비스와 회사가 후배, 동료들에 의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그의 이러한 철학은 다음커뮤니케이션 퇴사 이후 만든 소셜 벤처 투자 회사 ‘에스오피오오엔지(Sopoong, 소풍)’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평소 사회적 기업 육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평소에도 젊은 소셜 벤처 기업인들과 토론하며 창업 노하우를 전수하곤 했다. 현재까지 소풍이 투자한 소셜 벤처는 쏘카, 꼬마농부, 농사펀드, 슬로비, 앤스페이스, 오르그닷, 위드돔, 텀블벅, 키플 등이다. 이 중 쏘카는 카 셰어링(자동차 공유)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대기업의 투자를 받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재웅 대표가 2008년 설립한 에스오피오오엔지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소셜 벤처의 창업을 지원하고, 성장을 돕는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관심은 이제 ‘공유경제’에 머물러 있다. 공유경제는 소유의 개념 대신 상품이나 서비스 등 유·무형 가치를 대여하거나 나눔으로써 공급자와 이용자, 중계자가 동시에 이득을 얻는 협력 소비 활동을 말한다. 그는 공유경제를 통해 풍요 속 빈곤으로 상징되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 모델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재웅 대표는 2015 부산공유경제혁신학교에서 “공유경제는 첨단 IT 기술을 활용해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특히 양심, 신뢰, 행복 등 자본주의 시대에서 잊혀졌던 인간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 변화의 중심에 공유경제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가 말하는 공유경제 모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에어비앤비(airbnb)’다. 에어비앤비는 나눔 개념에 IT 기술을 접목해 세계 유명 호텔 체인 브랜드보다 많은 숙박소를 확보하고 있다. 막대한 자본 투자 없이도 전통적인 호텔 사업의 패러다임을 뒤흔들고, 자본주의의 근간인 규모의 경제학을 실현한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이재웅 대표의 에스오피오오엔지 또한 공유경제 모델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벤처 기업에 투자해 공유경제 모델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소득은 높아지고 있으나, 시민들은 행복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공유경제 시스템이 잘 만들어진다면 현 자본주의 시대에서 잃었던 지속 가능한 성장, 고귀한 인간 가치도 회복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