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셋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국내 펀드 시장의 부흥과 몰락의 상징이다.
2001년 1월과 7월 각각 설정된 인디펜던스, 디스커버리 펀드는 출시 초기부터 큰 인기를 끈 상품은 아니었다. 2004년을 기점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7년 본격적으로 자금이 몰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박스권(지수가 일정 범위에서 등락을 거듭하는 것)을 맴돌던 코스피지수가 2005년 1000을 뚫고 2007년 2000을 돌파하자 투자자들이 너도나도 증시에 몰렸다. 증시 활황 분위기에 편승해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순식간에 ‘1조 펀드’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버블(거품)이 꺼지고 펀드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지금은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라는 이름도 잊혔다. 한때 미래에셋의 상징이었던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예전의 명성은 이미 빛이 바랬다.
◆ ‘펀드=미래에셋’ 펀드 명가의 탄생
‘박현주 펀드’가 미래에셋이 재계 서열 33위의 대기업이 될 수 있는 주춧돌이 됐다면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오늘날의 미래에셋금융그룹을 만들었다.
2001년 선보인 국내 최초의 개방형 뮤추얼펀드인 인디펜던스 펀드와 환매수수료가 없는 선취형 뮤추얼펀드인 디스커버리 펀드는 새로운 투자처를 찾던 고객들에게 간접투자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상품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이전까지 국민 대표 재테크 수단이 은행 적금 상품이었다면 2005년을 기점으로 주가 상승에 힘입어 펀드로 대거 자금이 몰리며 새로운 국민 재테크 수단으로 펀드가 떠올랐다.
2006년 4월 코스피지수가 1500을 돌파하면서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누적 수익률 500%를 기록했고, 같은 해 6월 1700을 넘어선 6월 600%를 돌파했다. 2007년 7월에는 두 펀드 모두 누적 수익률 700%를 넘어섰다.
미국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잠시 고전했지만 디스커버리 펀드는 2011년 4월 22일 국내 최초로 누적 수익률 1024.82%로 ‘1000% 고지’에 도달했다. 사흘 뒤에는 누적 수익률 1032.37%까지 오르기도 했다. 인디펜던스 펀드는 1000%를 찍지 못했지만 2011년 4월 25일 누적 수익률 947.07%까지 기록했다.
2007년은 ‘펀드 붐’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다. 한 해 동안 주식형펀드로 70조원의 자금이 몰렸고, 미래에셋자산운용으로만 20조원의 돈이 유입됐다. 미래에셋의 대표 펀드인 디스커버리 펀드는 2007년에만 65%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하며 6조3000억원의 자금이 몰렸다. 인디펜던스 펀드에도 2조6000억원의 돈이 들어왔다. 미래에셋의 압도적인 펀드 수익률이 입소문을 타자 미래에셋펀드를 파는 증권사 지점과 은행에서 투자자들이 끝없이 줄을 서서 펀드에 가입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벌어들인 수익도 급증했다. 2005 회계연도(2005년 4월~2006년 3월)와 2006 회계연도(2006년 4월~2007년 3월) 각각 193억원, 387억원에 불과했던 순이익은 2007 회계연도(2007년 4월~2008년 3월) 1290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2008 회계연도와 2009 회계연도에도 각각 1651억원, 1716억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펀드 열풍을 타고 미래에셋 펀드에 대거 자금이 유입되면서 운용보수가 급증해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덩달아 미래에셋증권의 실적도 크게 호전됐다. 2007 회계연도 미래에셋증권은 2조5318억원의 매출액과, 3648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해 전년과 비교해 각각 319%, 131% 늘었다. 미래에셋운용의 자금이 미래에셋증권으로 유입되며 증권 역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증시 활황과 펀드 열풍 그리고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의 인기가 더해져 미래에셋그룹은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급성장했다.
◆ 홈쇼핑에서 팔린 ‘미래에셋 3억만들기 펀드’
2004년 10월 초 홈쇼핑 채널을 통해 적립식펀드인 ‘3억만들기 인디펜던스 주식형펀드’와 ‘인디펜던스 한아름 혼합형’을 소개한 미래에셋증권은 투자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놀랐다. 방송 1시간 만에 상담신청이 무려 4000건이 쇄도했다.
적립식 펀드를 국민적 재테크 수단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든 곳은 미래에셋이다. 미래에셋의 ‘3억만들기 적립형펀드’는 2004년 출시됐다. 적립식펀드는 목돈이 없어도 은행의 정기적금처럼 매달 소액을 넣을 수 있는 상품이다.
당시 은행의 만기 1년짜리 정기적금 금리가 3%대로 떨어지는 등 저금리 구조가 정착되면서 은행 상품에 대한 투자매력이 줄자 적립식펀드가 대안으로 떠오르며 자금이 몰렸다. 미래에셋의 적립식펀드 바람은 자산운용업계의 태풍으로 주목받았고, 이후 여기저기서 유사상품이 쏟아져나왔다.
미래에셋은 '저축하듯 주식에 투자하면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캠페인을 지속해서 펼쳤다. 당시 여의도에 있었던 미래에셋그룹 빌딩 앞의 시침과 분침이 없는 시계탑(사진)도 호흡을 길게 잡고 투자해야 한다는 뜻을 함축적으로 강조한 조형물이었다.
◆ 자취 감춰버린 ‘1조 펀드’…펀드의 시대는 저물고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2001년 설정 이후 9·11테러를 시작으로 2002년 카드채 사태, 2004년 차이나쇼크, 2006년 버냉키쇼크,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등의 굵직한 사건을 거쳤지만 꾸준히 수익률을 방어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전 세계 주식시장의 폭락은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에 큰 상처를 안겼다. 2008년 한해 30~40%의 손실이 났다. 2007년 펀드 활황을 보고 고점에서 가입했던 펀드 투자자들은 망연자실했다.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주식형펀드의 특성상 주식비중을 줄여 주식시장 하락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식시장의 상승과 하락 분위기가 펀드 수익률에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손실을 본 투자자들은 하나둘 펀드에서 돈을 빼기 시작했다. 2008년 10월 시리즈를 포함한 디스커버리 펀드 설정액은 11조3308억원에 달했다. 인디펜던스 펀드 시리즈 역시 2009년 4월 10조9700억원까지 설정액이 치솟았다. 두 펀드의 설정액만 20조원을 넘었다.
하지만 펀드에서 돈을 빼는 환매 바람이 몰아닥치자 공룡펀드는 직격탄을 맞았다. 1년에 1조원이 넘는 자금이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시리즈 펀드에서 각각 빠져나갔다. 한 때 20조원이 넘던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시리즈 펀드 설정액은 현재 1조5000억원대로 줄었다. 단일 펀드로 각각 1조원이 넘었던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 설정액은 현재 1000억원대로 급감했다.
펀드 붐이 일었던 2008년 8월 말 144조원으로 정점을 찍었던 국내·외 전체 주식형 펀드 설정액은 미래에셋의 펀드 몰락과 함께 현재 78조원으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당시 미래에셋자산운용에서 펀드운용을 총괄했던 구재상 케이클라비스운용 대표는 “2007년 코스피지수가 2000을 찍으면서 미래에셋의 국내 주식형펀드 순자산이 50조원을 넘어섰고 불특정다수가 20조원 가량의 돈을 벌면서 미래에셋의 인기가 뜨거웠다”며 “심지어 40년짜리 부동산 펀드도 팔리는 등 안 팔리는 펀드도 덩달아 팔렸다”고 설명했다.
구 대표는 “펀드 사이즈가 커지면서 주식시장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며 “환매가 몰렸을 때는 3조원어치가 넘는 주식을 3개월에 걸쳐 팔아야 했던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미래에셋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금융위기 이후 공모펀드 시장이 침체되면서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에서도 돈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며 “이후 주식시장 흐름이 대형주에서 중·소형주로 바뀌면서 배당·가치주 펀드 등이 주목받게 됐고 대형주를 주로 담은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펀드는 미래에셋에서 간판 펀드 자리를 내주게 됐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미래에셋 대해부]⑤ '박현주 2호' 원금 반토막…도피성 유학떠나
[미래에셋 대해부]④ 전설의 시작…국내 첫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의 탄생
[미래에셋 대해부]③ 운용·증권·보험 '삼각편대'…지배구조 정점엔 박현주 회장
[미래에셋 대해부]② 떠난 자와 남은 자…'금융제국'을 만든 박현주의 사람들
[미래에셋 대해부]① 공룡증권사의 탄생…설립 17년만에 1위 증권사 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