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가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과 같은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갖추기 위한 첫발을 뗐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 현행 직급을 없애고 'ㅇㅇㅇ님'이나 '프로(pro)' 등의 호칭을 쓰고 연공서열 위주의 인사제도를 업무와 전문성 등 '직무·역할' 중심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삼성전자가 조직문화 혁신에 나선 것은 지금과 같은 상명하달, 군대식의 경직된 조직문화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처럼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어 창의성과 혁신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 "능력중심 승진…휴가도 눈치 안보도록"

삼성전자는 27일 직급 체계 단순화, 수평적 호칭을 골자로 하는 인사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했다. 직계 체계는 현행 7단계(사원1/2/3, 대리, 과장, 차장, 부장)에서 4단계(CL1~CL4)로 단순화한다. CL은 경력개발 단계(career level)의 약자로, 수직적 직급 개념보다 직무 역량 발전 정도를 표현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새로운 인사제도를 2017년 3월부터 시행한다.

임직원간 호칭도 바뀐다. 공통 호칭은 '님'을 사용한다. 부서 내에서는 업무 성격에 따라 '님', '프로', '선후배님', 영어 이름 등 상대방을 서로 존중하는 수평적인 호칭을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 팀장, 그룹장, 파트장, 임원은 직책으로 호칭한다. 승진(昇進)도 연공서열 대신 업무 능력 중심으로 바뀐다. 승진 연한이 없어져 '30대 임원'이 나올 수 있다.

업무 효율을 위해 회의를 절반 이상 통합하거나 축소한다. 삼성전자는 참석자 최소화, 회의 최적시간 1시간, 전원 발언, 결론 도출, 결론 준수 등 권장사항을 발표했다. 보고문화는 속도를 중시하도록 했다.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 강화를 위해 직급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치는 대신 '동시 보고'를 활성화한다. 또 업무가 과하다는 불만에 따라 불필요한 잔업과 특근을 근절하기로 했다.

직원들이 연간 휴가계획을 사전에 자유롭게 세울 수 있는 '계획형 휴가' 제도도 도입한다. 삼성전자는 또 올해부터 임직원 편의를 위해 반바지를 착용할 수 있도록 했다.

◆ "형식보다 실용"…'관리의 삼성' 아닌 '스타트업 삼성'으로

삼성전자의 인사제도 개편방안은 내부 DNA를 바꾸기 위한 시도에서 나왔다. 삼성이 지금의 재벌 체제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금알을 낳던 스마트폰 시장 규모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액정디스플레이(LCD)와 메모리 반도체, 가전 분야는 중국업체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경우도 대만의 TSMC에 물량을 뺏기면서 이익 감소가 예고된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바이오와 전장 부품을 미래 먹거리로 내세웠지만 뚜렷한 실적을 낼 때까지는 더 기다려야 한다.

삼성전자는 혁신의 본고장인 미국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했다. 구글만 해도 중요한 사안을 엔지니어 한명과 임원 한명, 최고경영자(CEO)가 속전속결로 결정한다. 삼성전자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일선 사원이 보고를 올리면, 대리와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사업부장에게 전달되는 데만 한달 이상이 걸린다.

삼성전자 수뇌부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다. 개선안을 마련하기 위해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7월 사내 아이디어 공유 플랫폼 '모자이크(MOSAIC)'에서 인사혁신 대토론회를 열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알맞은 인사제도는 무엇일까요'라는 주제로 직원들의 의견을 들었다. 경영진과 모자이크 전문조직이 모자이크로 모은 의견들을 심사해 실천에 옮길 액션플랜(action plan)'을 만들었다.

'글로벌 기업'이 된 삼성전자에 걸맞은 호칭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삼성전자는 임직원 30만명 중 20만명가량이 외국인이다.

◆ 임원들 바뀔까…변화의 걸림돌은

"KPI(성과지표)에 따라 움직이는 임원들이 이런 변화를 장기적으로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이번 개편안을 두고 반신반의하는 삼성전자 직원들도 적지 않다. 고위직 임원부터 바뀌지 않는 한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두기 어려울 것이라는 반응이다. 실제로 상무 이상 임원은 이번 개편안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삼성전자 직원은 “보고와 관리를 최우선 가치로 여겨온 경영진을 비롯한 임원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라고 말했다. 또다른 직원은 "반바지 착용만 해도 이미 이전에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허락했던 부분이지만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며 "수뇌부의 진정성이 조직 밑바닥까지 전달되도록 솔선수범하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3월 '스타트업 삼성 컬처 혁신' 행사에 참석한 사업부장들이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을 약속하는 선서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현석 사장(VD사업부장), 서병삼 부사장(생활가전사업부장), 김기호 부사장(프린팅솔루션사업부장), 전동수 사장(의료기기사업부장), 김영기 사장(네트워크사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