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2월 14일 삼성증권 본사 내 영업점 앞. 점포가 문을 여는 시각인 오전 9시가 가까워질수록 미래에셋자산운용 박현주 사장의 입술은 타들어만 갔다. 함께 자리한 구재상 이사, 김영일 팀장 등 다른 미래에셋 관계자들도 손에 땀을 쥔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날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출시하는 국내 첫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의 발매일. 불과 열흘 전인 1998년 12월 4일 설립된 신생 운용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에게는 일반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내놓는 첫번째 공모펀드인 박현주 1호의 성공 여부에 따라 회사의 생사(生死)가 결정될 수도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구재상 미래에셋자산운용 전 부회장(가운데 빨강 넥타이 맨 인물), 김영일 전 수석운용팀장(구 전 부회장 오른쪽)을 비롯한 초창기 미래에셋자산운용 펀드매니저들이 1999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국내 1호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의 성공은 미래에셋그룹 성장의 발판이 됐다.

박현주 사장을 비롯한 미래에셋 주요 임원들의 우려 속에서 마침내 판매가 시작됐다. 혹시나 첫 공모펀드의 판매 부진으로 인해 천신만고 끝에 만들었던 회사가 막 꽃을 피우기도 전에 좌초하지 않을까 박현주 사장 등은 마음 졸이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걱정은 결국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오전 9시 판매가 시작된 직후부터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박현주 1호는 판매 개시 약 3시간도 채 되지 않아 목표 설정액 500억원을 손 쉽게 채운 것이다. 훗날 국내 최대 자산운용사로 성장한 뒤 대우증권까지 인수하며 ‘금융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미래에셋그룹의 첫 성장 발판이 완벽하게 놓인 순간이기도 했다.

◆ 외환위기 후 얼어붙은 국내 증시…국내 1호 뮤추얼펀드로 출시

박현주 1호는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로 판매가 되기 전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다. 뮤추얼펀드란 투자자들로부터 모집한 자금으로 투자회사를 설립해 주식이나 채권 등의 자산에 투자한 후 이익을 분배하는 투자신탁을 말한다.

투자자들이 맡긴 돈을 굴려 수익을 올린 뒤 돌려주는 간접투자상품이라는 점에서 당시 판매됐던 투신사의 수익증권이나 신탁상품 등과 개념은 비슷하지만, 투자자가 주주로 나서는 주식회사의 형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뮤추얼펀드는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개방형과 만기가 오기 전 투자자가 환매를 요청해도 돈을 찾을 수 없는 폐쇄형으로 나뉜다. 박현주 1호는 만기 1년, 설정액이 500억원으로 정해진 폐쇄형 뮤추얼펀드로 출시됐다. 개방형 뮤추얼펀드는 박현주 1호의 만기가 끝난 후인 2001년 2월부터 설립이 허가돼 판매가 시작됐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1997년 동원증권을 퇴사해 미래에셋벤처캐피탈과 미래에셋투자자문, 미래에셋자산운용 등을 잇따라 설립하고 1998년 12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현주 1호를 출시했다. 사진은 1997년 미래에셋투자자문 설립 후 회사 로고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현주 회장

박현주 1호가 출시된 1998년 당시 국내 금융시장에서 주식 등에 투자하는 간접투자상품에 대한 투자심리는 크게 얼어붙은 상태였다. 1997년말부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됐고, 대우그룹을 비롯한 많은 대기업들이 파산하거나 재무위기에 몰렸다. 이 때문에 국내 증시 역시 크게 위축됐고 많은 사람들이 위험자산인 주식보다는 원금이 보장되는 예금 등으로 몰리고 있던 것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박현주, 구재상 등 동원증권을 퇴사하고 미래에셋을 창업한 멤버들이 이미 금융시장에서 주식 전문가들로 유명했지만, 당시 증시가 워낙 좋지 않아 박현주 1호도 성공 가능성을 장담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며 “만약 출시 이후에도 증시가 계속 약세를 보였다면 미래에셋은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좌초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출시 1년만에 100% 수익률 거둬…미래에셋그룹의 성공 발판으로

우려와 달리 박현주 1호는 출시 이후 줄곧 순항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판매 개시 당일 일찌감치 목표 설정액을 채우며 출발한 박현주 1호는 1999년부터 증시가 점차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설정 초기부터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시 박현주 1호의 성공 여부에 따라 회사 전체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박현주 사장을 비롯한 미래에셋 창업 멤버들은 이 펀드의 운용에 많은 공을 쏟았다. 한국투자신탁에서 1996년과 1997년 연속으로 최우수 펀드매니저로 선정되는 등 불과 35세의 나이에 ‘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김영일씨를 부장급 대우와 함께 ‘월급 1000만원+알파(α)’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해 수석운용팀장으로 앉히기도 했다.

김영일 미래에셋자산운용 전 수석운용팀장. 그는 이후 미래에셋을 퇴사해 한국투자신탁운용과 한화투신운용 등에서 투자책임자(CIO)로 일하기도 했다.

설정 후 약 7개월이 지난 1999년 7월 6일 박현주 1호의 수익률은 107%를 기록, 국내 뮤추얼펀드 가운데 처음으로 수익률 100%를 넘어섰다. 첫 뮤추얼펀드에 이어 첫번째 100% 수익률 돌파로 ‘2관왕’의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 김영일 당시 수석운용팀장은 “단기매매 대신 삼성전자(005930)와 포항제철(현재 포스코) 등 대형 우량주 가운데 저평가 된 종목을 30개 안팎으로 선별해 집중 투자한 것이 큰 성과를 얻게 된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12월 9일 만기를 맞아 청산할 당시 박현주 1호가 기록한 최종 수익률은 95%였다. 설정 1년만에 원금을 두 배 가까이 불려준 이 금융상품으로 인해 신생 소규모 자산운용사였던 미래에셋의 인지도는 크게 높아졌고, 뒤이어 등장한 박현주 2호와 박현주 3호 등도 잇따라 투자가 몰리며 미래에셋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설정액 500억원에 불과한 작은 뮤추얼펀드의 성공이 훗날 자기자본 규모 약 8조원에 이르는 거대 금융그룹이 된 미래에셋의 성공을 있게 한 ‘신호탄’이 된 셈이다.

◆ 운용 기간 코스피지수도 2배로…실제 운용능력에 대해서는 ‘물음표’도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박현주 1호의 성공에 대해 좀 더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박현주 1호가 운용됐던 시기에는 증시 전체가 큰 호황을 누렸기 때문에 높은 수익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을 단지 미래에셋의 운용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박현주 1호의 운용이 시작된 시기인 1998년 12월말 코스피지수는 562.48을 기록했지만, 만기 시점인 1999년 12월 28일에는 1028.07로 두 배 가까이 상승했다. 게다가 박현주 1호가 출시된 지 3개월 후 판매가 시작된 현대투신운용의 ‘바이코리아 펀드’가 출시 4개월만에 10조원이 넘는 자금을 끌어들이며 공격적으로 주식을 매입한 덕에 앞서 나온 박현주 1호가 ‘반사이익’을 누렸다는 분석도 있다.

박현주 1호의 성공은 10조원 넘는 자금이 모인 현대투신운용의 ‘바이코리아 펀드’가 국내 증시에서 주식 매수를 늘린 것이 밑바탕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사진은 1999년 투자설명회에서 바이코리아 펀드를 홍보하는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

실제로 박현주 1호에 이어 1999년 12월 설정된 ‘박현주 성장형 2호’의 경우 2000년 들어 증시가 다시 크게 꺾이면서 큰 손실을 기록해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미래에셋의 운용능력에 대해 제대로 된 검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주장이 잇따라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박현주 1호가 국내 첫 뮤추얼펀드로 일반 투자자들이 더 많은 투자기회를 얻는데 힘을 보탰고, 국내 금융시장에서 간접투자상품 운용과 판매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1998년말 당시 수익증권을 비롯한 간접투자상품들은 투자위험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실적배당형인 투자상품을 원금보장형처럼 판매해 손실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다”며 “반면 뮤추얼펀드는 회사형 상품으로 업무 분장이 체계적이고 주주총회와 이사회, 외부 회계감사 등을 통해 투명성도 높아 정부에서도 투자를 장려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박현주 1호를 비롯한 초창기 뮤추얼펀드들이 출범과 함께 제대로 시장에 안착하지 못했다면 국내 금융투자업계의 수준이 높아지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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