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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칼럼] 사내유보금은 '罪'가 없다

  • 논설주간
  • 입력 : 2016.05.31 04:00

    [김기천 칼럼] 사내유보금은 '罪'가 없다
    “753조 재벌 사내유보금 외에는 한국 사회에서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비롯한 생존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 100여개 노동·시민단체가 참여했다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본부’가 얼마 전 본격 활동에 나서면서 내놓은 핵심 주장이다.

    ‘환수운동본부’는 최저임금 1만원, 대기업 비정규직 노동자 182만명 정규직화, 56만 청년실업 해소, 의료공공성 강화, 장애인 의무고용제 현실화 등 5대 민생·공공 과제 해결에 모두 174조원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했다. 30대 재벌 그룹이 곳간에 쌓아 놓고 있는 사내유보금을 환수하면 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3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은 753조원에 이르지만 현금성 자산은 140조원 정도다. 174조원을 환수하려면 우선 현금성 자산부터 손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현찰이 바닥나면 30대 그룹은 모두 도산해야 한다. 제 아무리 세계적인 우량기업이라도 금고가 비면 ‘흑자 도산’을 피할 수 없다.

    현금성 자산을 건드리지 않고 다른 자산을 팔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한국 경제의 최대 현안인 조선업 구조조정과 관련된 논란을 예로 들어보자. 현대중공업 노조는 “12조원 이상 쌓여있는 사내유보금을 풀면 구조조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내유보금 환수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다.

    회사 측은 사내유보금은 대부분 설비·토지·건물 등 실물자산에 들어가 있고, 현금성 자산은 1조4800억원에 지나지 않는다며 노조의 주장이 억지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어느 경제학자는 “사내유보금이 실물자산 형태로 있다고 해도 자산 매각을 해서 먼저 부채를 줄이고, 인력 감축은 최후 수단이 돼야 하는 게 구조조정의 원칙”이라며 노조를 편들었다.

    자산 매각을 통한 부채 감축은 구조조정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는 사내유보금을 푸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1분기말 현재 자산총액 30조원, 부채총액 17조1600억원이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자본총액은 12조7700억원이고 그 대부분이 사내유보금이다.

    현대중공업이 자산을 팔아서 그 돈으로 부채를 모두 갚았다고 가정하자. 17조원 어치의 자산을 처분하면 정상적인 기업 활동과 생산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래도 재무제표만 보면 부채비율 0%, 사내유보금 12조원의 초우량 기업이다. 회사가 망할 지경이 돼도 적자가 나기 전까지는 사내유보금이 줄어들지 않는다.

    환수운동본부와 노조의 논리대로 하면 현대중공업은 인력 구조조정 없이 빚을 다 갚은 뒤에도 여전히 악덕기업이다. 천문학적인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노조는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고, 국가는 세금으로 사내유보금을 환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자산을 처분하고 문 닫는 수밖에 없다.

    현대중공업의 납입자본금은 3800억원이다. 여러 차례 유상증자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3800억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치자. 그런 기업이 자산 30조원의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익을 재투자한 결과다.

    회사가 처음부터 세후(稅後) 이익을 모두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돌려줬다면 어떻게 됐을까. 재투자할 이익잉여금이 없어도 은행 대출과 회사채 발행 자금으로 투자를 계속 하고 기업을 키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엔 자산 30조원이 아니라 2조~3조원 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힘들 것이다. 부채비율 400~500%를 넘는 기업에 선뜻 대출할 금융회사가 있겠는가.

    현대중공업은 이익을 재투자해 거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이익을 올렸고, 세금을 더 내고, 고용도 늘렸다. 그렇게 창업 이후 수십년간 재투자한 이익금이 장부에 12조원의 사내유보금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사내유보금을 환수해야 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사내유보금을 성토하는 사람 중에는 외국계 기업의 고율 배당에 대해 국부(國富) 유출이라며 입에 거품을 무는 경우가 많다. 과실송금 대신 국내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내 기업들의 이익 재투자에 대해서는 사내유보금을 쌓고 있다고 비난하는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시비는 대부분 재무제표에 대한 몰(沒)이해의 결과다.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고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있다”거나 “사내유보금을 환수하면 민생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헛소리다. 사내유보금을 이유로 야당이 법인세 인상을 추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습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으로 이익을 내고 성장하는 기업은 사내유보금도 계속 늘어나야 한다. 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을 금고에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지도 않다. 80% 정도가 이미 설비·토지·건물 등 유형 자산과 지식재산권 같은 무형자산에 녹아들어 있다. 그런 자산을 팔아서 빚을 갚아도 사내유보금은 줄어들지 않는다.

    국내 최대 부실기업 대우조선해양은 누적 적자로 사내유보금을 다 까먹고 이제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 사내유보금이 줄어들 정도가 되려면 회사가 망조(亡兆)가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내유보금에 대한 터무니 없는 억지와 시비는 대기업들이 모두 무너지고 그래서 한국 경제도 파탄나야 한다는 저주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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