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천 칼럼] 韓銀이 정부 주문대로 돈 찍어내는 공장인가

조선비즈
  • 논설주간
    입력 2016.05.03 04:00

    기업 구조조정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을 확충하는 데 한은(韓銀)이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두 국책은행이 조선·해운업체들에 대한 채무조정과 출자전환 등 적극적인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은은 중앙은행이 기업 구조조정에 직접 개입하는 데 대해 조심스런 입장이다. 법적·기술적 제약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 듯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정부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부 주장에는 뭘 어떻게 하기 위해 얼마가 필요하다는 구체적인 내역이 없다. 정부가 알아서 할 테니 한은은 돈만 대라는 투다. 한은에 지원을 요청하는 방식과 순서가 잘못됐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 구상대로 해도 구조조정이 제대로 될지, 조선·해운업이 경쟁력을 되찾고 살아날 수 있을 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기업 구조조정에서 숱한 과오를 범하며 사태를 악화시킨 전력(前歷)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성과 없이 돈만 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조선·해운업에 대한 국내 금융권 대출·유가증권·지급보증액의 60% 이상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몰려 있다. 농협은행, 기업은행 등 다른 특수은행을 포함하면 70%가 훨씬 넘는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데는 정부 책임이 크다.

    정부는 그동안 대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정치·경제·사회적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정책금융으로 부실기업을 연명(延命)시키는 미봉책을 펴왔다. 근본 처방을 외면한 채 ‘폭탄 돌리기’를 해온 것이나 다름 없다. 그로 인해 국책은행들은 골병이 들고, 기업도 살아나지 못했다.

    부실기업 처리와 구조조정의 핵심은 주주와 채권자, 임직원 등 이해관계자들이 손실을 분담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부담해야 할 손실을 최소화하려 하기 때문에 상당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한 가지 문제에선 이해가 일치한다. 바로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내 손실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이들은 기업이 무너지면 경제에 큰 충격이 닥친다고 협박하며 모든 연줄을 동원해 전방위 로비에 나선다. 지역구 이해가 걸린 정치권도 정부 대책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정부도 내심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며 기꺼이 따라간다.

    국민의 세금으로 직접 부실기업을 지원해야 한다면 정부가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절차가 훨씬 까다롭고 정치적 부담도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급해도 정부가 공적자금 조성의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과 정치권도 함부로 지원을 요구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국에는 산업은행으로 대표되는 국책은행이 있다. 정부는 무슨 일만 나면 “당장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며 국책은행을 동원했다. 국책은행이 부실해지면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자본을 확충해야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어서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았다.

    별다른 제동 장치가 없다 보니 구제금융이 너무 쉽게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약삭빠른 일반 은행과 채권자들은 슬슬 빠져나가고 국책은행만 남게 됐다. 사실상 ‘쓰레기 집하장’으로 전락한 것이나 다름 없다. 손실 분담의 원칙이 무너지고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도 힘든 상황이 돼버렸다.

    정부와 국책은행 모두 기업과 산업의 실상에 어둡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회복은 애초 기대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좀비기업’에 헛돈 쓰면서 미래 첨단산업을 키울 기회만 날려버렸다. 정책금융 남용으로 국가 경쟁력이 훼손된 것이다. “산업은행이 없었다면 지금 한국 경제 형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상황이 급박한데 이제 와서 원죄(原罪)를 따지고 추궁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국책은행 주도로 정책금융을 퍼붓는 방식을 계속 끌고 갈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지금까지 실패만 거듭해온 시스템이 앞으로는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아무 근거가 없다.

    정부가 한은의 동참을 요구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부실기업 대주주와 경영진의 법적·도의적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이해관계자들이 손실을 분담할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을 합치거나 분할하거나 아니면 우량 자산만 떼어내 새 기업을 만드는 것을 포함한 회생방안도 중요하다. 구조조정 지원 자금을 언제 어떻게 회수할 지에 대한 계획도 다듬어 내야 한다. 정책자금을 전액 환수하지 못하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정부가 기업에서 손을 뗀다는 원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정부나 국책은행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기업을 잘 아는 구조조정 전문가의 힘을 빌어야 한다. 전문가가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큰 그림과 세부 계획을 바탕으로 재원 마련 방안을 논의하고 한은의 협조를 구하는 게 순서다. 한은이 정부 주문대로 돈 찍어내는 인쇄 공장은 아니다.


    핫뉴스 BEST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