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아시아는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회사다. ‘컴퍼니 빌더(company builder)’와 ‘스타트업 지주사’를 표방하는 이 회사는, 사업 모델을 고르고 CEO를 선발한 뒤 그와 공동 창업하는 형태로 스타트업을 만든다. 2012년 2월 설립된 이래 현재까지 패스트캠퍼스·푸드플라이·헬로네이처·스트라입스·패스트파이브 등 5개 회사를 파트너사로 두고 있다.
박지웅 대표이사는 2012년 8월부터 패스트트랙아시아를 이끌고 있다. 그 해 2월 회사를 공동 창업한 뒤 8월부터 CEO가 돼 ‘공식적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
1월 중순 서울 역삼동 패스트트랙아시아 본사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넥타이와 흰 셔츠에 수트를 차려입었고 머리는 파마를 했다. 나이(1982년생)에 비해 앳돼보이는 하얀 얼굴과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 예술가가 될 뻔했던 소년, 공대생이 되다
-박 대표의 유소년기는 어땠나. 포항공대를 나왔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많이 했는지.
“초등학교때는 공부는 별로 안 했다. 하루의 절반을 피아노에, 나머지 절반은 미술에 투자했다. 어머니께서 나를 예술중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셨다. 그 땐 나 스스로 예술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거나 악보 그대로 치는 건 잘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재능이 아니었다. 미술은 초등학교때까지 하다 그만 뒀고, 피아노는 고등학교때까지 쳤다.”
-미대생 혹은 음대생이 될 뻔 했던 소년이 어떻게 이과로 방향을 틀게 된 건가.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서울대입구 쪽에 살다가 서초동으로 이사를 갔다. 부모님이 나를 특목고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8학군으로 보내셨던 거다. 갑자기 공부를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예술중학교에 못 가게 돼서 서운하다는 생각도, 허무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 땐 그냥 부모님 뜻대로 ‘이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박 대표의 인생 첫 ‘좌절’은 중학교 3학년 때 찾아왔다. 과학·수학경시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해 과학고 입시에 실패한 것이다. 원리도 잘 모르는 상태로 외우기만 한 자신과 달리 과학과 수학에 정말 재능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고, 그 과정에서 처음 좌절감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박 대표는 결국 일반고에 다니며 치과대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2001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서 2개만 틀렸으나, 당시 전국에서 만점자가 60명 넘게 나오는 바람에 의·치대 입시는 꿈도 못 꾸게 됐다. 그 대신 예정에 없던 포항공대에 입학했다.
◆ 여섯개 회사에서 인턴십⋯벤처캐피털리스트로
-대학에 다닐 때도 굉장히 바쁘게 살았다고 들었다. 처음부터 벤처 쪽에 몸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가?
“그 땐 벤처 생각은 전혀 안 했다.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려고 2학년 때 경영 동아리를 만들어서 공모전도 준비하고 인턴십도 했다(현재 패스트트랙아시아 파트너사 CEO 중 대부분이 이 동아리 출신 후배들이다). 학교 다니면서 부즈앨런&해밀턴 등 3개의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십을 했다.”
-놀 시간은 있었나.
“안 놀고 열심히 했다. 그런데 컨설팅 업체에서 일해보니 이건 내 가치관과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컨설팅은 다른 사람에게 훈수를 두는 일인데, 이것이 과연 클라이언트(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는 지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박 대표는 우연한 기회로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최준철 VIP투자자문 대표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박 대표가 컨설팅보다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기업 경영에 관여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줬다.
“군대 가기 전에 블로그를 하나 운영했는데, 최 대표께서 뭘 검색하기만 하면 자꾸 내 블로그가 뜬다며 쪽지를 보냈다. ‘넌 누구냐’며 밥 한 번 먹자고 하더라. 최 대표는 대학 다닐 때 투자 동아리를 만들었고, 증권사에 취업할까 하다 직접 자문사를 차렸다. 나보다 훨씬 과감한 사람이었다. 내게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과 그 분야의 사업을 직접 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라며 과감하게 선택하라고 조언했다. 난 최 대표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리스크를 지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직업만 놓고 고민하게 됐다. 굉장히 큰 방향 전환이었다.”
박 대표가 택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고위험 고수익)’ 직업은 바로 벤처캐피털리스트였다. 벤처캐피털은 사모펀드(PE)와 달리 심사역 한두명이 투자를 주도한다. 쉽게 말해 심사역이 어떤 회사에 대한 투자를 결정한다면, 이를 ‘내 딜(deal)’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컨설팅 업체 입사를 준비할 때와 마찬가지로 벤처캐피털에서도 딱 세 번의 인턴십을 했고, 28살의 나이에 정식 심사역이 됐다.
◆ 티켓몬스터 투자, 20배 수익 안겨줘
-첫 회사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처음으로 심사한 투자 건은 무엇이었나.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서 나온 회원사 명부를 보고 모든 벤처캐피털 사장님들에게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매달 보냈다. 그 중 한 회사가 스톤브릿지캐피탈의 전신인 아이엠엠인베스트먼트였다. 당시 아이엠엠은 회사의 물적 분할을 준비 중이었다. 인력 충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덕에 나는 어리고 경험도 부족했지만 채용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입사 후 처음으로 ‘한자마루’라는 교육용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투자했다. 12억원을 투자했는데 회사가 청산했다. 내가 심사역이 되고나서 투자한 회사 중 두 개가 청산했는데, 한자마루가 그 중 하나다.”
-박 대표에 대해 얘기할 때 ‘티켓몬스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회사에는 어떻게 투자하게 된 건가.
“사실 티켓몬스터에 투자하기 전 비슷한 사업을 하나 구상하고 있었다. 미국 소셜커머스 ‘그루폰’과 맛집 서비스 ‘옐프’, ‘오픈테이블’을 모두 섞어놓은 서비스였다. 그러던 중 2010년 초에 티켓몬스터에 관한 기사를 접했다. 신현성 대표를 만나 나와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내가 준비하던 사업은 깨졌고, 티몬은 출시 이후 하루가 다르게 승승장구했다. 어쩔 수 없이 ‘내 사업은 망했으니 티몬에 투자라도 할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웃음).”
-신현성 대표와 굉장히 친한 사이인 걸로 알고 있다. 첫 인상은 어땠나.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1층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는데, 티셔츠 입고 스프링 노트 하나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땐 한국말도 잘 못했다.”
-신 대표를 믿고 투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그 당시에는 사람에 대한 판단을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워낙 어린 나이에 사회 생활을 시작해 경험이 없는데 다른 사람에 대해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장과 사업 모델만 열심히 공부했고, 대신 사람 보는 일은 엔젤 투자자에게 맡겼다. 엔젤 투자자가 먼저 투자한 회사라면 사람은 어느 정도 검증됐다고 생각했다. 엔젤 투자자로 유명한 파이브락스의 노정석 대표가 신 대표를 만나고 하루 만에 5000만원을 입금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투자를 결정했다.”
2010년 스톤브릿지캐피탈은 박 대표의 주도로 티켓몬스터에 10억원을 투자했다. 1차 투자금을 회수했을 때 수익은 20배가 돼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박 대표는 서른 살에 수석심사역으로, 서른 한살에 최연소 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자신이 젊은 나이에 벤처캐피털리스트로서 명성을 얻게 된 데 운도 많이 따랐다고 했다.
“내가 벤처 투자 업계에 들어와 적응하지 못했던 문화가 바로 술자리가 많은 문화였다. 끼리끼리 모여서 술을 마시며 좋은 회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술을 잘 안 마시고, 연세 든 분들께 살갑게 대하는 것도 잘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술자리에 많이 나가는 대신 산업을 열심히 공부하고 가용한 모든 정보를 동원해 투자하고 싶은 회사 CEO를 만나곤 했다.
2008~2009년까지만 해도 벤처캐피털들이 피처폰 부품 회사에 많이 투자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이미 친한 심사역들끼리의 ‘리그’가 형성돼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그런 모임에 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피처폰 대신 의도적으로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 분야에 투자했다. 그러던 중 아이폰이 출시됐고, 한국에서 페이스북이 뜨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운이 굉장히 좋았던 거다.”
◆ “올해 여성 속옷 회사 창업⋯쉰 살에도 초심 잃지 않겠다”
2012년,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승승장구하던 박 대표는 ‘티몬’ 투자를 계기로 친해진 신현성 대표, 노정석 CSO와 패스트트랙아시아를 공동 창업했다. 티몬에 투자했던 미국 투자사 인사이트로부터 약 50억원을 투자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업 CEO 없이 세 명이서 돌아가며 큰 의사 결정을 내리는 형태로 회사를 운영했다.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어서 파트너사 CEO를 뽑을 때 카페나 스톤브릿지캐피탈 사무실에서 면접을 봤다. 나는 당시 스톤브릿지캐피탈에서 배려해줘서 아침 9시부터 오후 7시까지는 심사역 업무를 보고, 퇴근해서 7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패스트트랙아시아에서 일했다. 그런데 그렇게 6개월을 일해보니 이도 저도 안 되겠더라. 그래서 2012년 8월에 내가 정식 CEO로 취임하게 됐다.”
패스트트랙아시아는 출범 초기 병원 정보 제공 업체 ‘굿닥’과 유아동 쇼핑몰 업체 ‘퀸시’를 공동 창업했다. 이 중 굿닥은 옐로모바일에, 퀸시는 위즈위드에 각각 매각했다.
-투자자에서 CEO로 전향해보니 가장 달라진 점은.
“투자 심사역일 때는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했다. 투자하는 것 이외엔 다른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또 포트폴리오(투자한 회사들)에 대한 평균 수익률이 성과의 평가 기준이 되다 보니, 모든 투자건에 대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덜 했다. 그러나 CEO는 ‘다섯개 회사 중 두세 개만 잘 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다. 회사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모든 디테일에 더 많은 신경을 쏟아야 한다. 심사역으로 살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바쁘다.”
-많은 벤처 업계 관계자들이 박 대표를 ‘워커홀릭(일중독자)’이라고 평가한다. CEO가 워커홀릭이면 직원들은 불만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불만 많을 것이다. 표정을 보면 다 알 수 있다(웃음). 나는 직원을 채용할 때 처음부터 얘길 한다. 나랑 일하기 힘들다는 게 이 회사의 유일한 단점일 거라고. 직원들이 힘들어 보여도 그냥 놔둔다. 더 열심히 하라고 한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중학교 1학년때부터 농구를 해왔다. 요즘도 많이 한다. 우리 파트너사 대표들이 다 농구를 좋아해서 밤 11시에 모여서 농구할 때도 있다. 날씨가 좀 따뜻할 땐 일주일에 네번씩 한 적도 있다.”
-준수한 외모 덕에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던데.
“외부 모임이나 행사에 거의 안 나가서 잘 몰랐다. 다 부질 없는 일이다. 나는 회사에만 있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향후 패스트트랙아시아의 발전 방향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 몇개가 있다. 파트너사들에 만기가 없는 자본을 제공해주고, 그들이 장기적인 관점으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지금은 회사의 정체성을 ‘지주회사’로 명확하게 정의한 상태다. 궁극적으로는 버크셔해서웨이와 같은 지주사 모델로 나아가고 싶다. 지금과 같이 모바일 라이프스타일 영역에 초점을 맞춰 파트너사를 늘려갈 것이다.”
-올해는 몇 개의 회사를 더 만들 예정인가.
“올해도 최소한 1개 회사는 더 만들 계획이다. 현재 여성용 속옷 회사를 구상 중이다. 사람들의 취향을 먼저 분석한 뒤, 이에 맞게 속옷을 추천해주는 것이다. CEO는 아직 찾고 있다.”
-왜 여성 속옷인가.
“우리나라 여성 속옷 시장은 특정 브랜드 5개사가 30년 동안 과점해 왔다. 엄마와 딸이 같은 브랜드를 이용하는 아주 독특한 시장이다. 그만큼 혁신이 부족하고, 수요와 공급 사이의 간극이 크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또 반복 구매가 일어나는 시장을 선호한다. 앞서 셔츠 회사인 스트라입스를 창업했던 것도 셔츠가 반복적·주기적으로 팔리는 소모성 상품이기 때문이었다. 여성 패션 분야에서는 바로 속옷이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
-마흔살과 쉰살의 박 대표는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
“마흔살에는 지금과 최대한 비슷한 모습이길 원한다. 나는 패스트캠퍼스를 만들 때 직접 나서서 강의했고, 패스트파이브를 창업할 때는 발벗고 나서 의자를 조립했다. 마흔살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밑바닥부터 회사를 만들 것이다.
쉰 살까지 이 회사가 나를 통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그 때는 회사에 나와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길 기대한다. 1년에 회사를 하나씩 더 만든다면 그 때까지 10개 넘는 회사를 더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지금처럼 모든 회사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긴 어려워질 것이다. 각 파트너사별로 나와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나보다 더 젊고 뛰어난 후배들이 필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