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정치
1958년의 진보당 사건으로 처형되었다가 2011년에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된 정치인 조봉암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결국 이승만에게 져서 이렇게 된 것인데… 다만 한마디 남겨놓고 싶은 게 있소. 이 나라에서 정치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 줄 짐작 못한 바 아니나… 그 희생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오” (조갑제 닷컴, 2011년 5월 26일자 기사에서 인용).
필자는 정치의 세계를 알지 못하지만, 정치라는 게 레알폴리틱스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와 도덕적・당위적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국내적 요구 사이에서 정치가들이 생존 경쟁을 하는 투쟁의 장소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이 연재의 편에서도 인용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는, 도덕을 초월한 지점에 정치가 존재하며 일반인의 도덕관념으로 정치가의 행동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일 터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 양국의 최고 통수권자는 국왕 선조와 다이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이 두 사람의 주변에는 여러 성격의 신하・가신 집단이 포진해 있었다. 조선에는 서인・동인・남인 등의 정치인 및 이들 정치인과 관련을 맺은 무인 집단이 존재했고, 일본에는 문치파와 무단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문치파는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타니 요시쓰구와 같이 행정 관료적 성격이 강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단파는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유키나가, 후쿠시마 마사노리, 호소카와 다다오키, 가토 요시아키, 이케다 데루마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무단파는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행동을 함께 해서 에도시대에 확고한 세력을 구축한 반면, 문치파는 히데요시 사망 2년 뒤인 160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적대하여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켰다가 패했기 때문에, 후대에 악인(惡人)으로 기억되었다.
이전 연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경우에는 가톨릭교도라는 점이 훗날 그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막부를 연 이에야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점에서, 에도시대 사람들로서는 고니시 이상으로 “죄질”이 나빴다. 그래서 도요토미 정권에서 일어난 모든 나쁜 일의 배후에는 미쓰나리가 있다는 식으로 에도시대에는 이야기되곤 했다.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가 히데쓰구에게 일본 국내 정치를 맡겼다가 할복시킨 것이, 히데요시의 두 번 째 부인 요도기미와 미쓰나리가 결탁해서 꾸민 일이라는 음모론은 유명하다. 심지어는 요도기미에게서 태어난 히데요시의 두 번 째 아들인 히데요리가, 실은 히데요시가 아닌 미쓰나리의 아들이라는 음모론까지 존재한다.
음모론은 그럴싸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일본에서 미쓰나리의 이미지는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미쓰나리에 관한 전통적인 음모론은 많이 희석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고니시 유키나가나 명나라의 심유경과 결탁해서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야망을 좌절시킨 간교한 정치인, 일본을 통일하려 하는 이에야스에게 저항한 야심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한편,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병조판서, 각도 체찰사 등을 역임했고,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군을 맞이하고 그들에게 제공할 군량미를 마련하는 등 전방위로 활약했다. 그러나 선조대에 형성된 붕당 간의 갈등은 전쟁 중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가는 1598년 11월 19일에는 류성룡의 정적인 북인들이 주도하여 그를 삭탈관직하기에 이르렀다.
류성룡 역시 한 당파의 수장이자, 임진왜란 직전에 발생한 정여립 모반 사건과 기축옥사로 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을 터였다. 정변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1598년 말 조선에서 류성룡이 살해되지 않고 삭탈관직으로 끝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히데요시 정권의 실세였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정적(政敵)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투쟁에 패하여 처형된 것이나, 해방정국・한국전쟁을 거치며 존립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에서 조봉암이 반란자로 몰려 처형당한 데 비한다면.
류성룡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초점을 맞추며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
미쓰나리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던 1570년대부터 이미 히데요시를 모시며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이 시기의 미쓰나리에 대해서는, 훌륭한 무사로 이름높던 시마 사콘이라는 사람을 자신의 부하로 데려오기 위해 자기 영지(領地)의 절반을 주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히데요시는 일본판 삼고초려라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듣고 미쓰나리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미쓰나리는 오늘날 오사카시 남쪽에 자리한 항구도시 사카이를 장악해서는 히데요시 정권을 지탱하는 병참기지로서 기능케 하고,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각지에서 전투를 치를 때에도 병참을 담당했다. 또한, 각지의 다이묘들이 지배한 영지를 측량해서 유사시에 각 다이묘가 동원해야 하는 병사의 수를 결정하는 근거 자료를 작성하는 작업인 다이코 검지(太閤検地)를 집행하는 등, 그는 히데요시 정권의 행정관료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임진왜란 당시 미쓰나리는 일본군을 총괄적으로 감독하는 입장에서 한양에 주둔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 이여송의 조・명 연합군에 패하여 퇴각하자 벽제관에서 이를 차단하기도 했다.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권율의 조선군과도 전투를 치렀다. 이처럼 장군으로서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고니시 등과 함께 심유경을 맞이하여 강화 협상을 진행하고 명나라 사신을 규슈 나고야의 히데요시에게 데려가는 등 온건파로서의 입장도 보였다.
미쓰나리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전체적인 동향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는 최고 결정권자였고, 특히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의 젊은 무단파를 제어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 무단파는 미쓰나리에 대한 반발심을 키워나갔다. 이들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 바둑 일화이다.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확고히 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 전하기 위해 아사노 유키나가와 구로다 요시타카가 경상도 동래성으로 건너왔다. 조・명 연합군에 쫓겨 남하하던 미쓰나리 등이 히데요시의 지령을 전달받기 위해 동래성으로 왔지만, 아사노와 구로다는 바둑을 두느라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미쓰나리는 일본군 총사령관인 자신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며 떠나갔고, 구로다 역시 히데요시의 지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띤 자신들을 미쓰나리가 무시했다고 반발했다. 이로 인해 구로다 요시타카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했고, 그의 아들인 구로다 나가마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시다 미쓰나리와 무력충돌하기에 이른다. 이 바둑 사건은 양 정파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서 인구에 회자되었다.
양 정파 간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정유재란기였다. 이 시기에 조명 연합군이 전면전을 전개하자 일본군의 점령 지역은 급속히 축소되었다. 1597-98년의 울산성 농성은 당시 일본군이 처한 곤란함을 노출시킨 전투였다. 이처럼 조선에서 직접 전쟁을 치르던 일본 장군들은, 점령지를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고 전선(戰線)을 한반도 남해안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히데요시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로 인해 이들 장군들은 히데요시로부터 처벌을 받게 되는데, 이들은 중간에서 미쓰나리가 간언을 해서 자신들이 처벌을 받았다고 간주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비록 조・명 연합군과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군 간에 직접적인 충돌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기록을 통해 일본군 내에 일촉즉발의 위기적 분위기가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등의 주요 다이묘들이 서로 인척관계를 맺는 식으로 합종연횡하지 말고, 모두가 힘을 합쳐 도요토미 정권의 계승자 히데요리를 보필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사망한 직후부터 이에야스는 노골적으로 세력 강화를 시도했고, 이를 정면에서 저지하려 한 것이 미쓰나리였다.
이들 양 진영의 충돌을 중간에서 막고 있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1599년에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 등 일곱 명의 무단파 장군이 오사카에 있던 미쓰나리의 저택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리 정보를 입수해서 오사카를 빠져나간 미쓰나리와 무단파 사이를 이에야스가 중재해서,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자신의 거성인 오늘날 시가현의 사와야마 성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이에야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미쓰나리였지만, 이듬해 1600년에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군대를 모은다. 이것이 특정한 다이묘가 대두하는 것을 막기 위한 미쓰나리의 충정이었는지, 아니면 미쓰나리 개인의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한 무모한 전투였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이러한 엇갈리는 해석은, 히데요리가 성장할 때까지 주요 다이묘들이 그를 잘 보필하라는 히데요시의 유언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히데요리가 성장할 때까지 지켜본 뒤에 그가 도요토미 정권을 이을 만하면 정권을 물려주고, 그럴 그릇이 안 되면 이에야스가 정권을 받으라고 했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선전했다. 이처럼 바뀐 내용에 따르면, 히데요시가 죽은 뒤에 이에야스가 전개한 정치적 움직임도 큰 틀에서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지 않은 것이며, 미쓰나리는 히데요시로부터 특별한 당부를 받은 이에야스에게 저항한 것이 된다.
이에야스가 동일본의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미쓰나리는 자신이 군대를 일으키면 이에야스 군을 협공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임진왜란 당시 미쓰나리와 함께 사령관을 지낸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 거병(擧兵)을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의리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역시 사령관이었던 마시타 나가모리는 미쓰나리와 이에야스 양 진영에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1614-15년에 히데요리 군과 도쿠가와 막부군이 충돌한 오사카 전투에서 자신의 아들이 히데요리 측에 가담한 죄로 할복을 명 받았다. 전국시대의 최종 단계에 일어난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가 일본인들의 운명을 어떻게 갈라놓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미쓰나리와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포진한 서군(西軍) 세력은 이에야스의 동군(東軍) 세력과 동등했거나 우세했고, 초기 전투 양상도 서군에 유리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친족이자 우키타 히데이에의 양자로서 서군에 가담하고 있던 우키타 히데아키가 전투중에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에 가담하면서 양자간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양아버지인 히데이에에게도 알리지 않은 배신이었다. 끝까지 서군 측에 서서 싸운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체포되어 태평양의 하치조지마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가톨릭교도가 된 오타 줄리아도, 가톨릭을 버리라는 명령을 거부한 죄로 이 섬에 유배된 바 있다.
전투가 서군의 패배로 끝나자 고니시 유키나가와 미쓰나리는 단신으로 도주했다가 체포되었고,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데루모토 등이 이끄는 부대는 드라마틱한 전투를 벌이며 퇴각했다. 유키나가는 가톨릭교도로서 할복을 거부하고 처형되었고, 미쓰나리는 교토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스스로를 변호한 류성룡, 후인(後人)의 변호를 받아야 한 이시다 미쓰나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북쪽으로는 의주에서 남쪽으로는 울산까지 전방위로 활약했지만 삭탈관직당한 류성룡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징비록”을 썼다. 넓은 의미의 “징비록” 가운데, 전쟁 당시 류성룡이 작성한 각종 문서를 집성한 부분을 제외하고 임진왜란을 개설한 부분은, 사료로서가 아니라 전쟁의 전체상을 볼 수 있던 자리에 있었던 고위 관료의 회고록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 책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망하지 않은 두 가지 요인으로 이순신과 명나라 구원군을 들고, 이 두 요인의 배후에 모두 자신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류성룡 사후에 “징비록”이 조선과 일본에서 널리 읽히면서, 류성룡의 이러한 주장은 양국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류성룡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책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정치 투쟁에 패한 그가 처형까지는 당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학자 정치인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이시다 미쓰나리는 당시의 일본 지배층이 그렇듯이 무사 정치인이었고, 임진왜란에서 세키가하라 전투 사이의 짧은 기간에 정치적 격변에 휘말려 있었으며, 전투에 패하여 처형되었기 때문에 직접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도쿠가와 막부를 연 이에야스와 정면충돌한 미쓰나리는, 가톨릭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만큼은 아니지만 에도시대 내내 정치적 터부가 되었다. 하지만 유키나가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어서, 간헐적으로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책이 등장하고는 했다. 그러한 드문 기록 가운데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이, 가나자와의 호리 바쿠스이라는 시인이 쓴 “게이초 중외전”이라는 소설이다. 한국에서는 “대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잘 보여주는 소설로서 널리 읽히고 있지만, 필자는 이 “게이초 중외전”이 “대망”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은퇴하면 이 소설을 번역해도 좋을 것 같다.
1750~60년 무렵에 집필된 이 소설의 첫머리에는 망호선생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망호선생은 임진왜란 후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친 시기의 삼걸(三傑)에 대해 즐겨 이야기했는데, 이 삼걸이란 히데요시, 이에야스, 그리고 미쓰나리였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당시 마에다・시마즈・모리・우에스기・가모・구로다 따위는 모두 무리 중의 한 사람(원 오브 뎀)일 뿐이었고, 오로지 이시다 미쓰나리만이 그들보다 우월했으니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하늘이 내린 영걸, 이에야스는 저절로 되어진 영걸, 미쓰나리는 사람의 재능으로써 영걸되기를 구하였기 때문에 먼저 멸망한 것입니다“. 미쓰나리가 히데요시나 이에야스에는 못미치지만, 그 밖의 잘난 척하는 다이묘들보다는 우월하다는 주장은, 이들 다이묘의 후손이 일본을 지배하던 에도시대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출판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만 유통되었다.
저자는 만약 히데요시가 5년만 더 살았다면 미쓰나리가 도요토미 정권을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권력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도요토미 정권이 도쿠가와 정권으로 옮겨감 없이 히데요리가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리라고 주장한다. 비록 하늘의 뜻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미쓰나리가 그런 정도의 그릇이었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서군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한 쪽 부대의 대장인 사람이 소인배라면 천하의 제후 가운데 그 누가 그의 말을 듣겠는가? 미쓰나리를 억지로 낮게 평가하는 것은 도리어 도쿠가와 가문의 무위를 더럽히는 큰 죄가 될 것이다. 실로 이시다 미쓰나리는 영민하여 여러 사람들의 맹주가 될 법하였다”.
이처럼 하늘이 돕지 않는 가운데에도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의 이길 뻔 했지만, 히데요시의 두 부인인 기타노만도코로와 요도기미가 양대 정파를 이루어 싸우는 바람에 거사를 그르쳤다는 것이 “게이초 중외전”의 주장이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아직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잠행하며 떡잎을 키우려하던 때에 히데요시가 돌아가시니, 이에 천운이 도쿠가와 가문에 미소지어 대업이 그 쪽으로 움직이려 하였다. 미쓰나리는 불과 20여 만석의 신참 다이묘이자 만사 타인에게 통제를 받는 상태에서조차 300여 만석의 이에야스 공에 맞서 거의 이길 뻔하였다. 그러나 규중(閨中)에서 여자들 사이에 큰 전투가 있어서 마침내 서군쪽에 하늘의 뜻이 따르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미쓰나리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결탁하여 강화 협상을 주도한데 대해서는, 에도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듣기 어렵다. 그러나 “게이초 중외전”에서는 역시나 절묘한 해석이 제시된다.
우선, 임진왜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냉혹하다. “조선 전쟁은 히데요시의 원수이다. 정말이지 분로쿠의 이국 전쟁(임진왜란)은 히데요시가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조선으로 건너간 여러 장군들은 무자비하여 죄없는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아기가 죽은 엄마 곁을 기어다니며 젖을 찾는 울음소리가 팔도에 가득하였으니, 이 명분없는 전쟁은 히데요시의 음덕을 크게 훼손시켰으리라. 한편 외국과의 전쟁에 남편과 자식을 빼앗긴 일본측 처자들의 원한과 슬픔의 소리도 마을마다 가득하였다”.
이처럼 히데요시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쟁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서 히데요시는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을 끝내면 명성을 잃게 될 진퇴양난의 상황이었고, 그 고민을 하다가 히데요시의 명이 짧아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미쓰나리만이 임진왜란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강화 협상을 추진하는 악역을 자청했다는 것이다.
“조선 전쟁은 첫 공격이래로 성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퇴각하면 명성을 잃으시게 될 계륵과 같은 흉한 상황이라는 것을 일찍이 분명히 알고 계셨다.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남들보다 더 마음 아파하셨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재능은 히데요시와 닮았기 때문에, 그 역시 조선 전쟁의 실상을 약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화의를 맺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 하더라도 교섭을 성사시키면 히데요시가 죽지 않고 전쟁이 끝날 것이며, 그 외에는 계책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다 미쓰나리는 자기 스스로 악인이자 간신처럼 행동하여, 이익을 밝히는 저 남경의 석성・심유경 등의 사절을 끼워서 문서를 애매하게 만들어 화의를 맺으려 하였다.”
“마침내 고니시가 화의 교섭을 주도하게 된 것은 원래 요도도노의 은밀한 뜻이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에 가담한 것은 히데요시로 하여금 일을 그르치게 하려 함이 아니라 히데요시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에서였다. 당시 이시다 미쓰나리가 히데요시로 하여금 화의 교섭에 응하게 한 것은 실로 적확한 판단이었다. 조선침략은 끝내 승리하기 어려웠다. 만약 화의가 성립하여 히데요시의 위세가 해외에 떨쳐지고 다이코가 뜻을 이루게 된다면, 이는 히데요시의 수명을 10년 늘려드리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시다 미쓰나리도 계획대로 다이묘가 되어 그 권위를 전국에 떨쳤을 것이다.”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의 “유다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라는 단편 소설에는,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나온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되고 부활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예수를 당국에 고발하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유다만이 그 계획을 깨닫고, 스승과 세상을 위해 악역을 자청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게이초 중외전”에 보이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이미지에서, 보르헤스가 제시한 유다를 떠올린다. 이 정도가, 류성룡과 정치적으로 비슷한 시련을 겪었지만 스스로를 변호할 방법을 갖지 못한 미쓰나리에 대해, 일본 내에서 제기된 최대한의 변호였다. 그러나, 이 변호는 여전히 일본에서 소수 의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