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의 사람과 가운데 낀 사람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유명한 한음 이덕형(1561 ~ 1613)에 대해, 저명한 정치인 김장생은 자신의 문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음은 치우침이 없고 당(黨)이 없는 동서남북의 사람이다” (“한음선생문집” 부록 권4). 붕당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 시기에 최선을 다해 중립을 지키고자 한 이덕형의 정치적 입장을 잘 설명한 말이다. 정치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각각의 정치인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100%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정치에는 협상과 타협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자기 집단의 이익 추구를 위한 투쟁을 꺾지 않는 강경파 정치인은 칭송받는 반면, 집단 간의 협상을 주도해서 양측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을 이끌어내는 온건파 정치인은 비난받는다.
임진왜란 당시 명・일본과 모두 교섭하여 전쟁을 외교적으로 끝내려 했고, 광해군 정권에 몸담으면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지키려 한 이덕형은, 그래서 “오성과 한음” 이야기 외에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기억되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덕형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직접 명나라로 들어갔고, 일본군 가운데 전쟁의 확대를 우려한 협상파는 조선의 다른 사람이 아닌 이덕형과의 회견을 희망했다.
전쟁에서는 통쾌하게 승리하고 비극적으로 패배한 사람들이 영웅으로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쟁과 외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이덕형 같은 사람도 임진왜란의 영웅으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임진왜란이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전투와 외교 모두 자기 집단을 지키는 유효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외교를 주도한 인물은 잊혀지고 전쟁 영웅만이 기억되는 사회는 위험하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이덕형에게 회견을 요청한 것은 쓰시마를 다스리던 소 요시토시였다.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행동을 함께 했고, 유키나가의 배후에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었으므로, 이 회견은 일본측 협상파의 공통된 희망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절박하게 협상을 희망한 사람은 소 요시토시였을 터이다. 그가 다스리는 쓰시마 섬 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열도 양쪽에서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쓰시마는 역사에 등장한 이래로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국가들이 충돌하는 분쟁 지역이었다. 13세기에 몽골・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했을 때, 쓰시마를 수비하던 일본군은 전멸했다. 동시에, 전쟁이 끝나면 두 지역이 접촉하는 접점으로서의 기능을 금새 회복하고는 했다.
15세기 초, 조선 세종은 이종무에게 쓰시마를 공격하도록 명하는 한편, 전후에 협상을 청해온 쓰시마 사람들에게 부산포・내이포・염포의 3개 항구에서 무역을 하도록 허가했다. 이처럼 쓰시마 사람들은 일본인으로서 외국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품는 동시에, 조선 과의 안정적인 관계에 섬의 생존을 걸고 있었다.
소 가문의 20대 적자인 소 요시토시는,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평정하자 그를 찾아가 항복했다. 이 때 히데요시는 요시토시에게 조선 국왕을 일본에 부르라고 명령한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히데요시는, 쓰시마가 조선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갖고 있다고 반대로 알았다.
당연히 요시토시는 히데요시의 이러한 주장을 조선측이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이 예전부터 그러했듯이 통신사를 파견해주면 그 통신사를 조공사라고 해서 히데요시를 속여보려 했다. 조선과 일본 모두 진실을 알게 되면 분노할 것이 명백한 도박이었지만, 쓰시마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전쟁을 막고자 했다.
이리하여 황윤길・김성일・허성 등이 1590년에 일본으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게 된다. 히데요시는 이들을 조선이 보낸 조공사라고 생각했다. 한편, 조선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조공국이었던 유구국(오늘날의 오키나와)은 히데요시가 조선을 통해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한 편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양조평양록”과 같이 임진왜란 직후에 집필된 명나라 문헌은, 1590년에 조선이 보낸 통신사를 일본에 대한 항복 사절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품은 불신은 임진왜란 내내 이어지다가, 1598년에 정응태 무변 사건이라는 형태로 폭발하여 류성룡의 실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전쟁을 막으려 했던 쓰시마의 소 요시토시, 그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승려 겐소는, 도요토미 정권의 중앙에서 협상파의 입장을 취한 고니시 유키나가 및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연락을 취하며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분주히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모든 형태의 전쟁에 반대하는 절대적 평화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전쟁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전쟁을 통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토 기요마사 등의 호전적 세력과는 구분된다.
하지만, 조선과의 최종 교섭이 결렬되자 한반도 지도를 히데요시에게 바치고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맹렬히 싸웠으며, 그러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조선 측에 협상을 요청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1592년 6월, 대동강 회담
임진왜란 발발을 전후해서 쓰시마 측이 조선 측에 회담을 요청한 연혁을 살펴보면, 전쟁 발발 4년 전인 1588년에 소 요시토시 등이 한반도로 건너와서 직접 담판을 짓고자 한 것이 주목된다.
이 때 이들을 접대한 사람이 이덕형이었기에, 전쟁 중에도 요시토시 등은 회담 상대로 이덕형을 지목한다. 전쟁을 막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조선을 앞세워 명나라를 침공하고자 하는 히데요시의 주장을 조선 측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592년 4월 13일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동래성을 함락시킨 4월 15일, 유키나가・요시토시 등은 포로로 삼은 울산군수 이언함을 통해 1차 회담을 제안한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의지와는 무관한, 유키나가・요시토시 등의 독자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측의 답신이 없자, 제1군은 4월 25일에 상주를 함락한 후에 왜학통사(倭學通事) 경응순을 통해 2차 회담을 제안한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언함은 일본 측이 협상을 제안하고자 자신을 풀어주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스스로 탈출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일본 측의 협상 요청 서한을 폐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측은 경응순을 통해 유키나가・요시토시 등의 협상 제안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유키나가・요시토시 등이 협상 상대로 지목한 이덕형은 경응순을 대동하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유키나가・요시토시 등의 제1군 대신, 당시 일본군 전체에서 가장 호전적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이 중간에 경응순을 살해했기 때문에 이덕형은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회담 요청에 대한 조선 측의 답신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 요시토시는 회담 성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한양을 점령한 뒤 임진강 남안까지 다다른 5월 15-16일, 요시토시는 종군승려 덴케이에게 당시의 공용어인 문어 중국어(한문)로 서한을 쓰게 해서 조선 측에 전달한다.
이 서한은 덴케이의 종군일기인 “서정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 문헌에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 측에 보낸 세 편의 서한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쓰시마 측의 주장이 가장 명확히 피력된 두 번 째 편지를 인용한다.
그 내용은, 일본은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에 원한이 있어서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로 가고자 했을 뿐인데, 조선이 길을 막았으니 전쟁 발발의 책임은 조선 측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펼친 뒤에, 선조가 의주에서 한양으로 돌아와서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를 주선해달라고 요청한다.
전쟁 책임이 조선 측에 있다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를 조선 측이 납득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 터이면서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회담을 요청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금 길지만, 당시 쓰시마 측의 주장을 잘 알 수 있는 귀중한 문건이므로 모두 소개한다.
“신(臣)이 여기 와서 우리 군대를 물러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강화를 위함입니다. 군사가 나루에 있으면 귀국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이를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여러 차례 귀국에 사신으로 와서 전쟁의 승패에 대해 아뢰었으나 귀국이 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패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 전하는 귀국의 길을 빌려 대명국에 원한을 갚고자 합니다. 지난 해 귀국의 통신사에게 이를 상세히 고하였고 신 또한 이러한 내용으로 조정에 편지를 보내었으나, 귀국의 번신(藩臣)들은 국경을 굳게 지킬 뿐 우리가 길을 지나도록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기까지 들었습니다. 이에 우리 군은 이를 격파하고 상주에 이르러 조정에 서한을 보내었으나 답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듣자오니 국왕은 이미 한양을 떠났다고 하는 바, 이에 여러 장군들은 군대를 이끌고 한양에 들어갔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조선을 멸한 것은 조선이요, 일본이 아닙니다. 부디 살피소서.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국왕께서 한양으로 어가를 돌리시고 대명과 일본 간의 화의를 강구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책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우리 군대를 해산하여 기내(畿內) 바깥에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만약 의심하신다면 인질을 보내 말의 증거로 삼겠습니다. 그러니 일본과 대명이 화친하면 귀국의 역사를 되살리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귀국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족하는 이를 잘 생각하소서. 오늘 강가에서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급히 보냅니다.”
이처럼 한양을 함락시킨 뒤에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은 협상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임진강에서 회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임진강 방어선은 돌파된다. 제1군은 5월 27일에 개성에 입성하고 6월 8일에 대동강 남안에 도착한다.
다른 일본군 부대보다 앞서서 진군하던 유키나가・요시토시 등은, 이날 네 번 째로 조선 측에 회담을 제안한다. 이에 6월 9일에 이덕형과 소 요시토시의 부하인 야나가와 시게노부 및 승려 겐소가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회담을 시작한다. 이때의 상황은 1600년대 초에 집필된 조선의 “징비록”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고, “징비록”에 묘사된 이 장면은 1801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에혼 다이코기” 제6편에 삽화로 그려져 있다. 조선의 글과 일본의 그림을 함께 읽고 보시기 바란다.
“이때 적군이 대동강에 이른 지 이미 사흘이 지났다. 우리들이 연광정에서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 왜인 하나가 나뭇가지 끝에 종이조각을 걸어 모래 위에 꽂았다. 그래서 화포장(火砲匠) 김생려에게 작은 배를 타고 가서 그 종이를 가져오게 하였다. 왜인은 무기를 지니지 않고 있었으며, 김생려와 악수하고 등을 어루만지며 매우 친근하게 대하고는 그에게 편지를 가져가게 하였다.
도착한 편지를 윤두수가 열어 보고 싶어 하지 않기에 내가 “열어본다 고 하여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라 말하고 열어 보니 “조선국 예조판서 이공 합하(閤下)에게 드린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이덕형에게 보내는 편지로,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겐소가 작성한 것이었다. 요컨대 이덕형을 만나서 화의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덕형이 작은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겐소를 만나 평소처럼 서로 안부를 물었다. 겐소가 “일본은 중국에 조공할 길을 빌리고 싶었는데 조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길을 빌려 주어 일본이 명나라에 갈 수 있게 한다면 이 사태는 끝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이덕형은 일본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고 일본군을 철군시킨 뒤에 화의를 논하자고 하였다. 야나가와 시게노부 등의 말이 매우 불손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만남은 무위로 끝나고 각자 돌아갔다.“
쓰시마 정벌론과 조일 국교 정상화
소 요시토시와 쓰시마 사람들은 조선을 침략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의 선봉에 서고, 일반적인 일본의 무사들과 마찬가지로 전투에서는 훈공을 세우고자 했다. 동시에, 이들은 조금이라도 협상을 할 여지가 생기면 조선 측에 회담을 제의했다.
회담에서 쓰시마 측이 제시한 내용은 조선 측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고 이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성사시키려 한 것은, 일단 만나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겠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 요시토시의 이러한 절박함은, 명・조선・일본의 삼각형 속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고자 고민한 이덕형・류성룡 등 조선 측 협상파에게서도 확인된다. 애초에 일본의 침략 대상이었지만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어디까지나 종주국이 시혜를 베풀어서 구원해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덕형・류성룡과 같이 명나라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는 조선 측 관료들 역시 명나라의 이중적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명나라 정복을 목표로 했던 히데요시가 차차 한반도 분할로 목표를 변경했기에, 조선 측 관료들은 명나라의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받기 위해 외교 수완을 발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명나라 측의 미움을 샀다. 조선을 제외하고 직접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한반도 분할 협상을 진행하던 명나라의 심유경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는 사절단에 조선 측도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다수의 조선측 문건에서는 심유경이 조선의 고위 관료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고 되어 있는 반면, “명사기사본말”이나 “명사”와 같은 청나라 문헌에서는 명나라와 히데요시가 조선 세자 광해군의 참가를 요구했고, 조선 측에서 이를 검토했으나 이덕형이 반대해서 무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징비록”에는 심유경이 협상 실패 책임을 지고 명나라로 끌려가기 전에 류성룡에게 스스로를 변호하고자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그 편지 속에서도 심유경은 이덕형을 “문장과 실제 업적이 서로 맞지 않는 듯” 하다고 비판한다. 이덕형에 대한 명・청 양국의 이러한 비난을 통해, 명나라와의 협상 최일선에 섰던 이덕형이 조선의 국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외교를 펼쳤는지를 거꾸로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 조정에서는 쓰시마를 공격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재침략을 우려한 명나라가 수 만 명의 군대를 배치해 주겠다고 제안해도, 그들 모두를 먹일 식량이 없어서 주둔병사 수를 줄여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이 조선의 실상이었다.
게다가 류성룡이 임진왜란 중에 이미 여러 차례 경고했듯이, 압록강 너머에서는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나라가 견제의 손길을 늦춘 사이에 누르하치는, 1593년에 자신을 누르고자 하는 아홉 여진 연합군을 무찌르고, 1599년에는 만주 문자를 제정하는 등 국가 체제를 갖추어갔다.
임진왜란 중에는 조선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로 군사력이 급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명나라의 도움 없이, 그리고 누르하치라는 위협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쓰시마를 공격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전쟁 마지막 해인 1598년에 우의정・좌의정으로 승진한 이덕형은, 명측과 접촉한 결과를 12월 22일에 보고한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 측은 쓰시마를 공격하려면 어느 정도의 군대가 필요하고 정복한 뒤에는 쓰시마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덕형은, 조명 연합군의 정예병 1만 명 정도가 있으면 공격할 수 있겠으나, 결국 쓰시마를 “쳐부술 수는 있지만 주둔하여 지킬 수는 없다. 다만 천조의 위령(威令)을 크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쓰시마를 공격하기 전에 항왜(降倭)와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조선 사람을 먼저 보내서 쓰시마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고 답했다 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덕형은 쓰시마를 공격하자는 당시 조선 조정의 논의가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이덕형의 이와 같은 냉철한 상황 판단에 따른 결과인지, 결국 조명 연합군의 쓰시마 공격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때 자신이 판단한 정세에 대해, 이덕형은 2년 뒤인 1600년 8월 24일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쓰시마는 조선을 바라보며 사는 곳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응징을 하기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조선은 쓰시마와 “절교”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세종 때의 전례에 따라 한 번 무력을 과시한 뒤에 다독여야 했다는 것이다. 다만 세종 때와는 달리 지금은 조선의 힘이 부족하니,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있을 때 그 힘을 빌려 위엄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무력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이제는 쓰시마의 국교 재개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무력 행사를 꺼리지 않아야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조선에 무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안정을 실현해야 한다는 이덕형의 판단은 몽상가가 아닌 현실정치인의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9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협상파였던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세키가하라에서 충돌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략 행위에 자신이 가담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자신에 맞서 미쓰나리・유키나가 등과 연합했던 소 요시토시의 죄를 불문에 붙이고, 조일 양국간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도록 명한다.
요시토시가 조선 측의 의사 타진을 위해 보낸 사절이 차례로 처형당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협상을 시도하여 마침내 1609년에 조선과 쓰시마 간의 관계를 정상화시킨다. 소 요시토시는 강자들 사이에 낀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발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