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시 중구 을지로 6가 동대문시장의 한 대형 쇼핑몰 1층. 쇼핑을 나온 외국인 관광객이 드물게 눈에 띄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쇼핑몰은 한가해 손님 수도 손에 꼽을 정도. 영업 중인 점포보다 미분양 점포가 더 많아, 휑한 곳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비슷한 시각 전통 도매시장인 청평화시장은 본격적인 영업시간(자정~다음날 정오)이 아닌 데도 손님으로 북적였다. 가게마다 손님들이 꽉 차 통로를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10년 전 젊은이들 사이에서 ‘의류 쇼핑 메카’로 꼽혔던 동대문. 시장 어딜 가든 쇼핑 유동인구로 가득했던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상가별로 명암이 갈렸다. 특색을 갖춘 전통 도매시장은 옛 명성 그대로지만, 대형 소매 쇼핑몰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피난민 모인 ‘평화시장’이 시초…대형 쇼핑몰이 바통 이어 받아

동대문 시장의 역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모여 만든 ‘평화시장’이 입소문을 타면서 ‘청평화시장’, ‘신평화시장’, ‘제일평화시장’과 같은 의류시장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동대문 종합시장’의 시작인 셈이다. 싼값에 다양한 옷을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이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1975년에 촬영한 동대문시장 위성 사진.

동대문 시장의 흥행을 지켜본 기업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앞다퉈 동대문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형 의류쇼핑몰인 두타, 밀리오레, 헬로APM 등이 모두 이 시기 지어졌다. ‘옷 사는 일’이 젊은층의 새 놀이방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유동인구도 더 늘었다. 음식점과 화장품 가게들도 속속 모였다.

2007년부터 동대문에서 의류 장사를 한 상인 박수영(28) 씨는 “8년 전 헬로 APM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그때는 돈을 못 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면서 “하루하루 매출이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고 말했다.

동대문의 의류 쇼핑몰 ‘두타’ 전경.

◆온라인 쇼핑몰·중국 업체 탓에 대형 소매 쇼핑몰 ‘칼바람’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온라인 쇼핑몰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동대문을 찾는 쇼핑객 수가 현격히 줄었다. 또 중국 제조사들이 동대문 디자인을 베껴 만든 뒤 더 싼 값에 우리나라로 역수출하는 사례가 늘면서 점차 경쟁력을 잃어갔다. 잘나가던 시절에 몸집 불리기에만 급급해 다른 서비스에 투자하지 않았던 대형 소매 쇼핑몰들은 이때 직격탄을 맞았다.

동대문 시장 관계자는 “당시에는 장사가 워낙 잘 된 터라 대형 쇼핑몰이 우후죽순으로 지어졌는데, 이런 쇼핑몰들은 자투리 공간이라도 더 쪼개 팔아야 이득이니 의류 매장 수를 늘리는 것 외에 다른 서비스에는 신경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시간이 흐르며 온라인 쇼핑몰이 인기를 얻고 중국 제조업체가 몰려오니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의 한 대형 쇼핑몰 매장 입구. 빈 점포가 많은 탓에 영업 중임을 알리는 별도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실제 주변 대형 쇼핑몰 다섯 곳을 돌아보니 곳곳에 빈 점포가 눈에 띄었다. 고층일수록 빈 점포가 많았다. 2010년 문을 연 한 쇼핑몰은 3개 층이 아예 미분양으로 남아 있었다.

동대문 시장 관계자는 “장사가 안되는 데도 임대료는 장사가 잘 되던 수준에서 내려가지 않으니 비어 있는 점포가 많다”며 “전부터 있었던 대형 쇼핑몰은 물론, 비교적 최근 문을 연 맥스타일이나 굿모닝시티는 공실률이 60% 후반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새로 생긴 대형 쇼핑몰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임차인들을 찾고 있다. 관리비만 받고 매장을 임대하는 쇼핑몰도 있다.

상인 임모(23) 씨는 “층이 낮거나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 등 목이 좋은 자리는 월세가 150만원 정도지만, 그렇지 않은 점포는 아예 관리비(15만원 수준)만 내는 곳도 있다”면서 “건물주 입장에선 공실로 두는 것보다 관리비라도 받는 게 낫다”고 말했다.

종로구 창신동 인근 D공인 관계자는 “헬로APM 1층 에스컬레이터 인근 9.9㎡ 점포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300만원, 뒤쪽 코너 옆 14.5㎡ 점포가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130만원에 매물이 나와 있다”며 “5년 전보다 월세가 40~50%가 떨어진 수준”이라고 말했다.

동대문의 한 소매 쇼핑몰 내 여성의류 매장.

◆특색 갖춘 전통 도매시장은 명맥 그대로

반면 전통 도매시장은 과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애초 남대문시장과의 경쟁 차별화를 위해 도입했던 ‘야간시장’ 제도가 외국인 관광객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난 덕분이다. 동대문 도매시장들은 통행금지가 풀렸던 1980년대 초반부터 새벽(저녁 10시~다음 날 아침 5~6시) 영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자정부터 다음날 정오까지 영업한다.

이 덕에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각 평화시장이 들어선 건물 상당수는 국세청이 매년 발표하는 전국 상업용 건물 기준시가 상위 10위 안에 매번 오른다. 최근 가장 호황을 누린다는 청평화시장은 2016년 상업용건물 기준시가 고시 기준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이 건물의 전용면적 1㎡당 기준시가는 1564만7000원이다. 기준시가는 실제 시가의 80% 선이다.

동대문의 의류 쇼핑몰은 소매시장과 도매시장으로 나뉜다. 동대문의 대표적인 도매시장 누존과 디자이너클럽.

떠나간 젊은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신진 디자이너와 협업한 것도 효과를 톡톡히 봤다. 청평화시장이 그곳이다. 전통 도매시장은 중장년층이 주 소비자층이지만, 이곳은 상인들이 합심해 젊은 디자이너와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고 소재 개발에도 열중했다. 이 덕에 현재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을 겨냥한 영캐주얼 의류를 집중적으로 매매하는 도매시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종로구 창신동 B공인 관계자는 “청평화시장은 2009~2010년보다 3~4배 정도 임대 비용이 뛰었다”면서 “비싼 곳은 월세만 150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