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큰 장이 선다. 국제 출판 박람회인 북 페어(Book Fair)다. 자타 공인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역사도 오래됐다. 시작은 구텐베르그가 활자 기술을 발명한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부터 500년이 넘게 세계 출판인의 축제로 이어져 왔다.
단지 오랜 역사가 오늘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변화의 물결을 놓치지 않고 쉴새없이 행사에 반영해온 결과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관련 업계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곳으로 향한다.
올해 행사는 14일부터 닷새 간 이어졌다. 첫 사흘은 사업자, 남은 이틀은 일반 관람객을 위한 시간이다. 4200여개의 행사와 강연, 대담 같은 이벤트들이 28만명에 달하는 방문객을 맞았다. 작년보다 2.3%가 늘었다. 취재진도 600명 증가한 9900명이라고 주최측은 밝혔다.
국내 콘텐츠 퍼블리싱 스타트업인 퍼블리(publy.co)가 현장 참관기를 보내왔다. 북페어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다섯 가지 테마로 소개한다. 퍼블리(박소령, 정보라)는 북페어 전반에 걸친 취재 프로젝트를 크라우드 펀딩으로 진행 중이다. [편집자 주]
① 영국 잡지 모노클 “종이 출판도 하기 나름"
올해 행사의 모토는 ‘Global City of Ideas’. 행사장은 출판과 영화, 게임 등 콘텐츠 관련 비즈니스 관계자는 물론 IT/테크, 스타트업, 투자자, 미디어 관계자들로 붐볐다. 행사장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끓는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출판의 영역이 급속히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각각의 부스와 발표자들의 발언 내용은 출판이 이미 오랜 경계를 한참 벗어나 있음을 보여줬다. 저마다 전통적인 구획을 넘어 콘텐츠/미디어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초반에 ‘소비자’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면 후반에는 ‘팬’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그것도 ‘골수(hardcore) 팬’ 에 기반한 콘텐츠 비즈니스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라고들 했다.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영국의 모노클이었다.
모노클은 영국에서 인쇄돼 세계 여러 나라로 배송되는 종이 잡지를 내는 회사다. 하지만 잡지가 다가 아니다. 지금은 라디오, 서적 출판, 카페, 샵, 오프라인 컨퍼런스 사업까지 진출해 있는 종합 미디어 회사로 커졌다.
얼마 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를 인수한 일본 닛케이 신문사도 작년 9월 30억원(지분 3%)을 투자한 ‘유망주’로 꼽힌다. A (Affairs), B (Business), C (Culture), D (Design), E (Edits) 다섯 가지를 앞세워 ‘인터넷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 콘텐츠들을 한 권의 종이 잡지에 담는다고 자랑한다.
모노클은 타겟이 분명하다. 국적과 인종, 나이, 직업에 상관없이 영어로 교육받고 영어로 사업하는 글로벌 고객이 대상이다. 콘텐츠를 외국어로 번역할 계획도 없다. 오로지 영어에만 기반한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겠다는 철학이 뚜렷하다.
모노클이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 부스를 차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냥 부스가 아니라 모노클 카페와 모노클 샵, 모노클 라디오까지 와있었다.
모노클은 이곳에 와서도 돈을 벌었다. 다른 출판사들은 고객을 끌기 위해 커피, 와인, 샴페인, 맥주 같은 음식을 무료 서비스하는 데 반해 모노클은 다 유료였다. 심지어 좀 비싸기까지 했다. ‘모노클’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스몰 사이즈 커피가 약 4000원이었다. 그런데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모노클’이라는 브랜드를 소비한다는 느낌 때문 아닌가 싶었다.
모노클의 편집장 타일러 브륄레(Tyler Brûlé)와 에디터 앤드류 턱(Andrew Tuck)은 비즈니스 클럽 대담장에서도 자사 상품을 적절히 홍보하는 ‘감각’을 과시했다. 한 손에는 모노클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모노클의 책을 들고 와서는 테이블에 보란 듯이 놓은 후에 말문을 열었다.
모노클의 창간은 2007년. 시기는 불운했다. 바로 다음 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다. 종이 잡지를 창간하겠다는 말에 투자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확신했다고 한다. “언론사들이 헐값에 콘텐츠를 팔아 넘기고, 그래서 비용을 더 줄이고, 다시 콘텐츠의 품질이 급전직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한 번 읽고 던져버리는 잡지가 아니라 다 읽는 데 2주 넘게 걸리고, 언제든지 돌아가서 읽고 또 읽고 싶은, 보관 가치가 있는 잡지를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고객들이 우리 잡지를 읽고 ‘생각’을 했으면 했다.” 두 사람은 모노클을 ‘슬로우 미디어(slow media)’라고 불렀다.
목표 고객도 거기에 맞췄다. 300자 내외 글은 모바일로 보지만, 그 이상의 글은 종이로 제대로 읽고 싶어 하는 층을 겨냥했다. 가령,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해놓고 20분 정도 천천히 잡지를 읽는 사람들이 모노클의 독자군이란 얘기다.
브륄레 편집장은 “5년 전만 해도 언론사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다들 아이패드용 앱과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오히려 라디오가 아이패드 같은 디지털 기기를 통한 독서보다 훨씬 더 친밀감을 주는 매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모노클은 출판의 미래를 10가지로 요약했다. 그 중 하나가 “당신이 읽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You are what you read)”였다. 스마트폰으로 읽을 때는 기기 제조사의 브랜드만 보이지만, 종이로 읽을 때는 노출되는 브랜드가 읽는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물 역할을 한다는 것. 이런 트렌드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모노클이 브랜드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잡지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종이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잡지를 창간할 때도 첫 호를 내기에 앞서 글자 없이 빈 종이로만 0호를 만들어 촉감과 향을 시험해본 후 인쇄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담이 끝난 후 별도로 인터뷰했다. 모노클의 브랜드 전략의 핵심은 무엇이며 고객과의 관계는 어떻게 발전시켜 가는지 물었다. 앤드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싱가폴에 간다. 이어 홍콩, 도쿄로 이어지는 출장 일정이다. 오가는 동안에도 내내 독자들이 뭘 원하는지 묻고, 만나고, 관찰하고, 말을 듣고 피드백을 받는다. 전세계적으로 오프라인 행사를 1년에 70회 넘게 한다. 독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오프라인이 가장 핵심이다.
전세계에 모노클 샵이 6 곳, 모노클 카페가 2곳 있다. 얼마 전에는 런던에서 ‘모노클 키오스크’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작했다. 커피와 함께 모노클이 큐레이션한 잡지를 파는 곳이다. 이 모두가 오프라인에서 고객들을 직접 만나 대화하고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장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날 모노클 부스를 들렀다. 매장 직원과 대화를 하던 중 어느새 나는 1년 정기구독 가입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모노클의 ‘마법’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② 유튜브 벤치마킹한 맥밀란 북튜브
비즈니스 클럽 행사로 ‘이방인과의 포옹(Hug the Alien)’이라는 세션이 있었다. 기존 출판업계의 틀을 뛰어넘는 참신한 실험을 하는 인물과의 대담 시간이었다. 그 두 번째 순서가 ‘골수 팬’에 기반한 출판 사업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영국 팬 맥밀란(Pan Macmillan) 출판사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매니저(Digital Communications Manager)인 나오미 베이컨(Naomi Bacon)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슈퍼모델 느낌이 나는 화려한 미인이었다.
그는 디지털 PR 회사에 다니다 2013년 맥밀란에 스카웃됐다. 그는 영국의 젊은 독서층과 활발히 교류하기 위한 채널로 유튜브를 선택했다고 했다. 유튜브를 통해 젊은 독자들과 콘텐츠 창작자 사이의 소통을 넓혀감으로써 탄탄한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유튜브를 통한 책 소통, 즉 ‘북튜브(BookTube)’다. 영국에는 이미 책과 관련한 자신만의 채널을 만들어 꾸준히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북튜브 시장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마치 한국의 MCN 스타들이 게임, 뷰티, 먹는 방송을 내보내는 것처럼)
맥밀란은 젊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를 담당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Creative Producer) 직책까지 새로 만들고, 지원서도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모했다. 그렇게 해서 선발된 리나(Leena)라는 20대 여성도 이날 함께 자리했다.
리나는 전형적인 영국의 20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였다. 그의 동영상(맨부커 수상 시즌에 맞춰 만든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에너지가 넘치고 친구에게 대화하듯 편하고 유쾌하게 수다를 떤다. 화면도 역동적이고 편집은 감각적이며 음악도 수준급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만든다고 했다. 대담 후 별도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알아서 대본도 짜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음악 넣고 내가 다 하는거야, 그게 재밌고 좋아!”라고 했다. 동영상 한 편 제작에 이틀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날도 평소 사용한다는 캐논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취재 영상도 올릴 거라고 했다.
동영상에 소개되는 책들도 나오미와 자신이 상의해 결정한다고 했다. 가령, 맨부커 수상작 발표 기간에는 그에 맞는 특집을 하고, 어떤 주는 과학서 특집을 하는 등, 시의성에 맞춰 테마에 맞는 책을 고른다고 했다. 도서 선정의 진실성(Authenticity)을 기하기 위해 출판사를 가리지 않고 책을 고른다고 했다.
그는 발표 중에도 ‘진실성’라는 단어를 수십 번 반복했는데,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충성도 높은 팬들을 만들기 위한 핵심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철저히 연구하고, 유튜브 동영상 제작 과정도 공개해 피드백을 받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잘,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표 자료에는 “새 인재를 뽑아라(Hire New Skillsets)”라는 문장이 선명했다.
발표 후 나오미와 따로 만나 추가로 질문했다. “타겟 독자층이 너무 젊은 층에 국한된 것 같다. 다른 연령대는 어떻게 접근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준비 중”이라면서 “35-45세 여성을 위한 북튜브 채널을 곧 시작할 예정이고, 모든 연령대를 분할 접근해 각각에 맞는 채널을 만들 것”이라고 답했다. “그럼 맥밀란 방송국을 만드려는 거네”라고 하자, “맞아!” 라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이번 대담에 동참한 영국의 디지털 퍼블리싱 회사 카넬로(Canelo)의 공동창업자 마이클 바스카(Michael Bhaskar)의 말도 귀담아들을 만했다. 그는 디지털 출판에서는 팬덤 형성의 여부가 성공에 절대적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는 출판뿐만 아니라 업종을 가리지 않고 팬에 기반한(fan-driven) 비즈니스라야 성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③ 중국 최대 자가출판플랫폼 도우반 - 영어책도 그냥 낸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연사들의 입에서 유독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었다. 내 귀에는 아마존, 구글, 중국이 그랬다. 그만큼 중국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중국 참가자들 중에서도 내 눈에 띈 회사는 자가출판(self publishing) 플랫폼을 운영하는 도우반이었다. 이 회사는 작가들을 향해 "중국에서 책을 내시라"라며 홍보 활동을 폈다.
도우반은 2005년 처음 서비스를 시작했다. 네이버 영화의 별점 평가처럼 사람들이 영화와 음악, 책에 대한 후기를 남기도록 한 서비스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서 부문에 관한 한 중국 최대 서비스라고 자신했다.
서비스의 특징과 위상을 보면 중국의 ‘굿리즈(Good Reads, 아마존이 인수한 책 커뮤니티)’라 할 만했다. 2012년 전자책 판매 기능까지 추가하면서, 콘텐츠 추천·발견 서비스에서 소셜 상거래로 이어지는 이상적인 서비스로 발전했다. 지금은 영화 예매 기능까지 갖췄다.
도우반 역시 목표 고객이 아주 뚜렷했다. 주 사용자는 18-35세에,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 직업군은 화이트컬러이면서 학습욕이 높은 사람으로 설정했다. 서비스를 시작할 때 조준했던 타겟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고객 취향에 맞춰 자가출판 서비스 도서도 논픽션을 핵심 카테고리로 내세웠다. 판매 비중은 소설과 비소설이 반반이라고 한다. 현재 도우반의 자가출판 플랫폼에 등록한 작가는 약 1만 명, 등재된 책은 9000종쯤 된다.
권당 분량은 3000~5000단어 수준. 연재보다 낱권 판매가 핵심이다. 한국에서는 낱권보다 연재 방식이 인기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가격은 권당 4위안(약 700원)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수익은 도우반과 작가가 3대 7로 나눠 갖는다.
도우반은 여느 전자책 판매나 자가출판 플랫폼에서는 드문 ‘칼럼’이라는 카테고리와, 이미지와 음악 등으로 구성된 ‘앨범’이라는 상품도 서비스한다.
도우반의 전략 중에는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해외 저자들을 향해 “영어 저작도 받을 테니 그대로 보내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영어로 쓰인 책도 충분히 팔린다고 자신했다. 이미 중국 쇼핑몰들이 영어 책을 팔기 시작했고, 아마존 킨들이 중국에서 수백만대 팔린 것도 영어 책을 쉽게 사 보려는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해마다 2000만명씩 늘고 있고, 영어 책 독자 수도 급증하고 있다는 게 도우반측의 말이었다. 중국 내 영어 도서 시장의 크기가 그 정도라니, 어쨌든 나라는 크고 볼 일이다 싶었다.
이런 시장을 겨냥해 번역 과정 없이 해외 작품을 중국 독자에게 그대로 소개하는 서비스는 도우반 말고도 더 있다. 베이징에 본사를 둔 자가출판 플랫폼 '파이버리드', 중국에 서비스 파트너를 둔 '잉그램 스파크', '아마존' 등이 책 시장의 국경을 없애고 있다.
도우반의 전체 가입자는 2015년 1월 현재 1억명. 도서 부문의 월 이용자는 300만명이다. 이 중 60만명이 모바일 앱으로 접속한다. 중국의 18세 이상 성인의 독서율은 58% 수준이다. 반면 17세 이하 독서율은 77%. 경제 수준과 함께 교육 수준이 올라가면서 독서층은 물론 영어책 수요층도 늘거란 게 도우반의 예상이다.
중국 출판 시장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갈래도 다양해지고 있다. 시장이 도서 부문별로 아무리 잘개 쪼개진다고 한들 한국 전체 시장보다 크지 않을까. 부러울 따름이다.
④ 미국 최대 번역출판사는 아마존의 크로싱
비즈니스 클럽에서는 ‘이방인과의 포옹’ 세션이 이어졌다. 첫날 주인공이 ‘아마존 크로싱’의 사라 제인 군터(Sarah Jane Gunter) 발행인이었다. 아마존 크로싱은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존이 만든 문학 번역전문 출판사로 영미권에서는 유명하다.
2010년 11월에 창업해 지금까지 15개 언어로 된 18개국 문학 작품 650권 이상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 출판했다. 2014년 매출 기준으로 미국내 최대 번역 문학 출판사가 됐다.
전세계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문학 작품들이 언어 경계를 넘어 더 많은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아마존 크로싱을 통해 출판된 한국 작가로는 배수아가 있다. 중국만 해도 아마존 크로싱을 통해 세계 시장에 소개되는 문학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사라는 2003년 아마존에 입사해 미국, 캐나다, 프랑스, 룩셈부르그의 유통판매 업무를 거쳐, 2013년 아마존 크로싱의 발행인을 맡았다. 그는 아마존 크로싱이 다른 전통적인 번역 출판사들과 다른 점은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저자 중심 (author-centric) 출판이라는 점, 둘째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동시 출간 속도, 셋째로 책 매출과 연동한 저자 인세 계약이다.
저자 중심 출판이란 저자에게 최고의 출판 경험을 제공하는 데 주력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저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피드백 조사를 한다. 그 결과를 토대로, 인세 지급 주기를 월 단위로 단축하기도 했다.
그는 2016년에는 아마존 크로싱을 통해 약 70종의 번역서가 출간될 예정이라면서, 앞으로 5년간 100억원을 번역에 투자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미묘한 뉘앙스를 정밀한 언어로 옮길 수 있는 번역가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최고 자산이라면서 이를 위해 각 언어권의 최고급 번역가 네트워크도 열심히 구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번역 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우리는 해당 외국어-영어 번역의 최고 전문가를 붙인다”면서 “번역이 다 된 작품도 2, 3차에 걸친 패널 회의의 리뷰를 통과한 작품만 출판한다”고 했다.
아마존 크로싱 웹사이트에는 번역 출간을 희망하는 작가들이 직접 제안을 할 수 있는 창구가 있고, 아마존 크로싱과 함께 일하고 싶은 번역가들도 자기소개서를 올릴 수 있게 돼있다. 세계 시장 진출을 생각하는 국내 작가나 번역가들도 참고할 만하다.
⑤ 하퍼 콜린스 “비영어권 콘텐츠 시장도 진출할 것”
프랑크푸르트 북페어 개막 전날 비즈니스 클럽 회원들을 대상으로 ‘글로벌 퍼블리싱 서밋(The Market - Global Publishing Summit)’이 열렸다. 부제가 ‘국제 비즈니스의 7대 시장(The 7 Markets for Your International Business)’이었다.
7대 시장으로는 미국, 중국, 독일, 터키, 인도네시아, 멕시코, 한국이 포함됐다. 아침 9시 반부터 저녁 6시까지 7개국의 최신 정보들이 숨가쁘게 발표되는 가운데, 미국의 대형 출판사인 하퍼 콜린스의 최고디지털책임자(Chief Digital Officer)가 강연했다.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 자회사인 하퍼 콜린스는 세계 18위의 출판사다. 2014년 매출이 약 1조5000억원. 2012년 하퍼 콜린스의 CDO로 발탁된 챈탈 레스티보-알레시(Chantal Restivo-Alessi)의 이날 발표는 단연 돋보였다.
출판사에 디지털 부문을 총괄하는 CDO가 따로 있다는 것부터가 인상적이다. 2015년 10월 17일자 위클리비즈에 실린 맥킨지 도미니크 바턴 회장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그는 "큰 회사일수록 디지털 시대에 빠르게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 인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모든 회사들이 CDO를 영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붉은 드레스 차림의 챈탈의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컬럼비아대 MBA를 졸업한 후 컨설팅 회사와 광고 및 음반 산업에서 일하다가 하퍼 콜린스에 영입됐다. 지금은 하퍼 콜린스의 글로벌 디지털 전략을 총괄한다. 얼마 전부터는 해외시장 진출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음반 산업의 주력이 레코드·CD 에서 디지털 파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경험을 쌓은 인물을 출판사의 CDO로 스카웃한 하퍼 콜린스의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마침 프랑크푸르트 북페어가 열리기 전 전자책 매출이 감소하고 종이책이 되살아날 조짐이 있다는 내용의 뉴욕타임즈 보도가 있던 터여서, 그의 발표는 더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뉴욕타임스의 분석과는 좀 달랐다.
“전자책은 일시적 유행이었다거나 종이책이 결국 부활할 거라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지난 1년이 전환의 해(the year of transition)였다는 것” 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퍼 콜린스 같은 출판사들은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디지털 실험을 통해 소비자에 대해 더 정교하게, 더 많이 배워나갈 것이라고 했다. 내년에 다시 이 자리에 올 수 있다면, 그때까지 배운 것을 알려주겠다고도 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챈탈 CDO는 종이책과 전자책을 구분해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다. 전자책 독자, 종이책 독자로 쪼개져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장르에 따라, 가격에 따라 소비자들은 어떤 때는 전자책을, 어떤 때는 종이책을 읽는다. 어떤 때는 둘 다 읽는다. 그때그때 다르다. 즉 소비자가 자신에게 맞게 최적화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상품을 제공하는 게 출판사의 핵심이다. 상품을 기준으로 소비자를 쪼개서는 안된다.”
그는 출판 분야의 디지털화가 다른 콘텐츠 시장과는 다르다는 점은 시인했다. 디지털화 초기만 해도 출판 시장은 음반 시장보다 더 급격하게 진행될 거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그는 “현재로서는 전체 책시장에서 전자책의 점유율은 25-30%에 수렴할 것으로 본다”면서 “이제 우리는 독자들이 종이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밀레니엄 세대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들도 종이책으로 읽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출판이 다른 종류의 콘텐츠 비즈니스와 뚜렷하게 다른 점은 사람들이 손에 잡히는 물성 자체를 사랑한다는 점이며 그 때문에 소비자들은 돈을 낸다”고 했다.
하퍼 콜린스의 콘텐츠 유통 전략에 대해서도 소개가 됐다. 챈탈 CDO는 “학교, 도서관, 하퍼 콜린스 웹사이트를 통한 직판 등 유통 경로를 다양하게 넓혀가고 있다”면서 “그 중에서도 구독(subscription) 모델과 오디오북 시장의 급성장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소셜커머스의 시대”라면서 “소비자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만큼, 소셜미디어 채널에서 매출을 일으키는 방법도 집중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영어권 출판사의 강점을 살려 글로벌 시장에서 더 성장할 기회를 주시하고 있으며, 영어 콘텐츠뿐만 아니라 인수합병이나 직접 진출을 통해 비영어권 콘텐츠도 생산하는 진정한 글로벌 회사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