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유라시아사 연구를 선도해온 김호동 교수. 진정한 세계 제국이었던 몽골제국의 흥망사를 쓰는 것이 장기 목표라고 했다.

“이 책에서 나는 황하, 아니 그것이 표상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계와 싸우며 또 거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여러 민족들, 특히 그동안 내가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아 왔던 티베트족,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민족들이 걸어온 역사의 페이지에 배어들어 있는 고통과 소망을 독자들이 알고 또 공감토록 하는 데 있다…

나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배자의 입장에 있던 러시아나 중국 측의 기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손으로 씌어진 글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지배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현상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했다... 우리는 곧잘 강한 자와 강한 민족의 역사에 매료된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는 약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1999년 출간 ‘황하에서 천산까지’ 저자 머리말

“필자는 수년 전 소수민족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동아시아사의 단면들을 보여줌으로써 한족 중심의 역사 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제 다시 ‘이단’의 교파를 주제로 잡아 책을 내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자의 전공 분야가 ‘변방’ 중앙 아시아의 역사이다 보니, 다수가 아닌 소수의 관점, 정통이 아니라 이단의 시각, 중심이 아닌 주변의 입장에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 우리 학계도 남들이 흔히 하는 문제들만 치우치지 말고 희귀한 분야에도 눈길을 돌릴 만한 여유를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2002년 출간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저자 머리말

“이렇게 해서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후반까지 1세기 이상 몽골 제국은 태평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는 문자 그대로 ‘세계 제국’이었고, 그 기간 동안 세계의 역사는 ‘몽골 제국과 그 주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에 일찍이 보지 못했던 대통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몽골 제국의 역사는) 다양한 언어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들에 기반을 둔 총합적 연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종래 동아시아권의 역사 연구에서 독보적 권위를 누리던 한문 사료들도 제한적인 효용성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중국 측 기록들은 그 고질적인 중화 중심의 역사관과 세계관 때문에 몽골 제국의 ‘세계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것을 중국의 전통 왕조의 하나로 ‘개조’시켜버렸기 때문이다.” /2005년 출간 ‘칸의 후예들’ 역자 서문

“유목민과 농경민은 인류의 역사를 움직여 온 두 개의 수레바퀴였고, 그 어느 하나를 빼놓고는 세계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균형 있는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그리고 러시아를 위시한 유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통합한 몽골제국은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필자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즉 유라시아 각 지역이 그 이전의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2010년 출간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저자 머리말

“두 사람의 기독교 수도사의 글을 번역하려는 생각을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들의 글이 역사적 기록으로서 가지는 진귀한 가치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 자신 기독교도로서 가진 개인적인 소명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거의 800년 전에 동방의 세계를 찾아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선교사들의 생생한 체험과 기록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겨울, 루브룩이 대칸 뭉케를 만나러 갈 때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의 관습에 따라 맨발로 가서 그의 천막 앞에 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마치 괴물처럼 바라보았다는 장면을 읽으면서, 순간 나는 시공의 벽을 넘어 마치 내가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로마서 제 10장 15절)” /2015년 출간 ‘몽골제국 기행’ 역자 후기

그는 개척자다. 국내에서는 생소한 유라시아사 연구의 험한 길을 일찍부터 앞장서서 걸어갔다.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전설’이었던 은사 민두기(1932-2000) 교수의 권유에서 시작된 여정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유학 시절에 만난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 Jr 1934-84) 교수의 문하에서 학문은 더 넓고 깊어졌다. 어느덧 발걸음은 몽골제국의 대평원에 가 닿았다.

그의 학문적 성가는 해외에서도 정평이 난 지 오래다. 지금은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펴내는 케임브리지 히스토리 시리즈의 몽골제국사 편 책임편집을 맡아 세계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선별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사 전임 국내 1호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다.

1986년 귀국해 모교에 부임할 때 학과 ‘막내’였던 그는 어느새 최선임 ‘어른’이 됐다. 그동안 국내에서 유라시아사 분야의 주춧돌이 될 주요 고전의 역주서를 줄줄이 펴내는 한편, 이 분야 국내에서는 독보적이라 할 만한 저술들을 출간해왔다. 그 연장선에서 얼마 전 ‘몽골제국기행’(까치)을 낸 데 이어 올 가을에는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사계절)를 펴낼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새로운 프론티어로 유라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요즘, 그를 만나 그동안 연구의 시작과 성과, 의미와 앞으로 계획을 들어봤다. 그는 ‘소수 학문’ 연구자로서 지금껏 걸어온 길이 너무나 즐겁고 보람 있었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새 책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이번에 나온 ‘몽골제국기행’은 어떤 책입니까?

제가 집중해서 연구하는 시기가 몽골제국사입니다. 물론 그 전에는 다른 시기를 했지만 조금씩 옮겨와서 10여 년 전부터는 몽골제국사만 하고 있어요. 몽골제국이라는 게 우리 고려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몽골이라고 하면 원나라를 떠올리는데 흔히 중국의 한 나라로 봤지요. 명이나 청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제가 연구해보니까 그게 아니고 원이라는 게 세계 제국의 일부였어요. 그러니 그 세계 제국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는 거지요.

이 제국의 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여러 언어로 된 자료가 많아요. 지금껏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으로만 봤는데 그것은 아주 일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라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된 것까지 복합적으로 활용이 돼야 비로소 제국의 전체적인 면모가 나옵니다.

몽골제국이 워낙 크다 보니 자료들이 많은데 그 중에 여행기가 많아요. 제가 앞서 번역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도 그렇고, 이번에 낸 플라노 드 카르피니와 윌리엄 루브룩의 ‘몽골제국기행’도 그 시대 대표적인 여행기 중 하나입니다.

13세기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들이 몽골 기행에 나선 이유는 당시 몽골 군대가 유럽으로 가서 러시아도 쑥대밭을 만들고 그랬거든요. 폴란드 가서도 전투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유럽에서는 이들이 누군지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들을 개종할 수 없겠느냐는 종교적 목적이 있었지요. 여러 사람이 갔는데 여행기가 남아있는 대표적인 두 사람의 작품을 번역하고 상세하게 주석을 단 것이 ‘몽골제국기행’입니다.

-‘케임브리지 히스토리’ 시리즈로 몽골제국사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압니다. 어떤 작업이고, 어떤 의미가 있지요?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부가 내는 히스토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세계 각국을 주제로 해서 내는데 중국 같은 경우 10권 이상 되지요. 한번은 이스라엘 학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케임브리지 히스토리에 몽골제국사도 포함시켜 보자고 의기투합이 돼서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최근 30년 사이에 몽골제국사 연구 방향이 많이 바뀌었어요. 저 자신이 새로운 방향으로 연구해 나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맞춰 그간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의미에서 가장 깊게 연구하는 여러 학자들을 동원해서 써보자고 해서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 제안서를 제출했고, 심사 후 승인이 나서 계약을 했습니다.

2년 전부터 이스라엘 학자와 둘이서 에디터가 돼서 학자 40여 명을 섭외해서 지금 원고를 받고 있는데 20편 이상 들어온 상태입니다. 이걸 다 읽고 논평해주고 보완 요구하고 하느라 할 일이 참 많아요. 이런 작업이 보통 빨라도 10년은 걸리기도 하고, 한 세대가 걸린다고도 합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빨리 내려고 해요. 두 권으로. 한 권은 2017년, 그다음 것은 2019년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는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도 출간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사계절출판사에서 내는 아틀라스 시리즈의 마지막 다섯째 권으로 나오게 됩니다. 중앙유라시아사라고 하는 것은 ‘아시아의 중앙’이 아니고 ‘유라시아 전체의 중앙’이라는 뜻입니다. 다루는 범위가 우크라이나까지 포함되니까.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를 여러 가지 지도와 중요한 그림자료, 연표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물론 설명을 담은 텍스트도 들어갑니다. 너무 생소하면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니까. 이런 책이 의외로 외국에도 없어요. 중앙유라시아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출간되면 외국 사람도, 텍스트는 못 읽어도 지도나 사진은 볼 수 있으니 굉장히 유용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틀라스 제작 과정에서는 지도 만드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직접 배웠다구요.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요. 저도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닌데 100여 장 되는 지도를 그렸습니다. 지도를 그린다는 게 그냥 그림 프로그램으로 처리하는 게 아니고 옛 지명이라든가 고고학적인 발굴터 이런 것들을 정확히 GPS로 잡아서 찍어내면, 가령 그런 지명들을 한 몇 천 개 축적해 놓은 게 있는데 그런 걸 활용해서 지도를 그리니까 아무래도 정확하지요. 일관되게 그렸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출간한 저서나 묵직한 역서들이 꽤 되지요. 갈래를 짚어주시겠습니까?

저서 쪽부터 보면, 처음에 했던 게 19세기 중앙아시아사였습니다. 박사 학위논문이었지요. 그 후에는 시대를 올라가서 몽골제국에 관한 것이 3권 정도 됩니다. 그다음 동서문명 교류 측면에서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 하나 있습니다. 몽골제국사가 가장 많고 19세기 중앙아시아사, 동서교류 순이 되겠군요.

역주서의 경우는 연구서라기보다 원자료를 옮기고 주석을 다는 데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국내 학자들이 접근하기 힘든 페르시아로 된 것들이라든가,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3권까지 번역했고 앞으로 두 권을 더 해야 하고.

그 다음 ‘동방견문록’이라든가 ‘몽골기행’ 같은 유럽인들 기행문 이런 것들을 냈습니다. 물론 영어를 기초로 번역했지만 여러 사본들을 교감한 텍스트를 가지고 여기에 주석을 자세히 단 것들입니다.

-그동안 불모지를 개척하면서 후학의 연구나 2차 저술을 위한 기초 고전들을 많이 번역해왔습니다. 아직 남은 주요작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아주 많아요. 혼자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 관련 문헌들도 중요한 것들이 안 돼 있는 게 많은데, 저쪽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지요.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사상과 관련해서도 중요한데도 번역이 안 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급한 대로 제 분야에 있는 중요한 것, 제가 관심 있는 것부터 하는 중이지요. 앞으로도 더 많이 돼야 합니다.

-고전의 경우 교감본조차 안 된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심지어 국내 고전까지 그렇다더군요.

얼마 전 학회에서 어느 분 말씀이, 심지어 고려사, 고려사절요까지도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교감본이 안 돼 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마다 기존 책을 인용은 하는데, 교감을 거치지 않은 경우, 물론 몇 자 차이일 수 있지만 그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인도나 페르시아 문명만 해도 얼마나 오래되고 찬란한 것인데, 그쪽 유명한 고전들 교감본 텍스트가 이제야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정도입니다.

-저서와 역주서를 말씀해주셨는데 그간 걸어온 학문 여정을 개괄해주시겠습니까?

원래 학부 때는 관심이 중국사였습니다. 중국사를 하면서 동시에 중앙아시아와 연관되는 고리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례가 19세기 위구르 지역이었어요. 당시 반란이 나서 독립이 됐는데 중국이 거기서 쫓겨나다 보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중국 문헌에는 없어요.

그 안에서 현지인이 쓴 자료들을 봤지요. 외국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구한 필사본, 페르시아어나 차가타이어(투르크어 한 갈래)로 씌어진 사본들을 다 모아서 한문 자료와 결합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국내에 들어온 후로 강의를 하다 보니 몽골제국이 점점 재미있어지더군요. 우리 역사와도 연관이 되고. 또 그 제국의 크기가 학문적인 도전욕을 자극했습니다.

더구나 제가 이런저런 언어를 많이 했는데 그 다양한 언어들을 활용하기 좋은 연구 주제였어요. 다양한 사료들이 그런 언어들로 돼 있으니까.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쓰기 시작한 게 지금은 몽골제국 연구자가 된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사 연구는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죠?

대학 때 은사였던 민두기 교수께서 권하셨습니다. 그때까지는 국내에 전공자가 없었습니다. 중앙아시아사를 제대로 하려면 그 지역 언어를 배워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까 유학 가서 언어도 배우고 하라고 권하셨지요.

-민 교수께서는 굳이 왜 그쪽으로 권하셨지요?

동양사, 특히 중국사를 하다 보면 북방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지요. 당신은 못 하셨지만 필요하다고 보신 거지요. 국내 역사와도 관련이 깊으니까. 그 필요성에 대해 아신 겁니다. 그 전에 제 은사이기도 한 고병익 교수도 그쪽에 관심이 많으셨고 글도 쓰셨는데 현지 언어는 못 하셨어요. 몽골어나 터키어, 페르시아어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아무래도 연구에 제약이 있었고, 그래서 주로 한중 관계사 쪽으로 하셨지요.

그러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그 지역 자료들을 보고 공부한 중앙아시아사 연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1986년에 들어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앙아시아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터키사를 공부하신 이희수 교수가 저보다 2, 3년 늦게 들어왔지요. ‘몽골비사’ 쓰신 유원수씨, 이런 분들이 다 우리 또래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하나의 분수령을 이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 서울대에서는 그나마 국제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학과가 동양사학과일 거라고들 했지요.

민두기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학풍이 워낙 엄해서 석사 논문도 4, 5년은 기본으로 생각했지요. 더 길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선생님이 귀감을 보이셨는데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기 힘들지요. 엄청난 완벽주의자였습니다. 학생한테도 그렇게 요구하시니까 그 긴장감이라는 게 힘들 수밖에요.

-민 교수님에 관한 특별히 기억나는 일화가 있나요?

몇 가지 일화들이 있습니다만 고인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라서 자칫 누가 될까 꺼려집니다. 다만 강의 시간에도 혹독할 정도의 엄격한 가르침으로 유명했습니다. 자신의 연구와 저술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꼼꼼했고 철저한 정확성을 기했지요. 특히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시면서 정치적 접근을 항상 경계하셨습니다.

-서울대에 중앙아시아사 전공 교수로 부임할 때가 국내 1호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어떤가요?

지난주에도 학회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대학 교수로 취직한 사람이 국내에서는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 점에서는 얼마간의 자괴감이 있습니다. 다들 중국사로 취직할 뿐입니다. 서울대의 저 말고는 아직도 다른 대학에 중앙아시아사로 독립된 교수 정원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동양사학과 전임으로 가도 중앙아시아사 정원으로 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 뒤 하버드대에서 플레처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연구 범위를 넓혀가셨지요. 또 다른 선회나 변화의 계기는 없었나요?

몽골제국을 연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페르시아어 자료를 보다 보니 집사 책을 많이 보게 됐어요. 거기에서 몽골제국을 많이 다뤘어요. 페르시아 자료에 심취하다 보니 한문 사료에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가 있더군요.

야, 이거 재미있다 싶어서 페르시아어를 공부하고 사료도 읽고 하면서 몽골제국에 빠져들었지요. 몽골제국을 한문 사료가 아니라 페르시아 사료를 통해서 보면 하나의 실체를 동서로 양면적으로 조명해서 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동아시아의 사료적 콘텍스트와 새로 배워 알게 된 서아시아 컨텍스트를 결합시키자는 생각이었지요.

그런 것이 때마침 몽골제국사의 최근 연구 경향과 들어맞은 거지요. 최근 경향이 뭐냐면 과거에는 큰 세계 제국의 덩어리를 지역별로 나눠 연구했습니다. 원나라는 원나라, 일한국은 일한국 역사로 본 거지요.

20-30년 전부터는 몽골제국을 하나의 전체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내가 연구하는 것과 맞은 거지요. 케임브리지에 제안서를 낼 때도 가장 중점을 둔 것이 지금까지 지역 단위 몽골제국사 연구를 극복하고 하나의 전체로서 제국을 연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두기 교수에 이어 플레처 교수 두 사람으로부터 엄격한 학문적 훈련을 거치셨는데, 교수님 자신은 특별한 교수법이나 스타일이 있나요?

플레처 교수에 대해서는 항상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설명이 많이 기억됩니다. 저도 그냥 내가 아는 것을 성실하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지, 특별한 교수법 같은 것은 글쎄요…(김 교수의 첫 제자인 정재훈 경상대 교수는 “학문적으로는 누구보다 엄격하시지만, 특별히 표나게 훈계를 하거나 야단을 치시기보다는 당신께서 먼저 본을 보이고 최상의 수준을 유지하시니까 제자들도 알아서 그런 스승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대학 때 동양사학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막연히 역사가 좋았습니다. 서양사나 국사와 달리 우리가 속한 지역이면서도 좀 더 넓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요.

-일찍부터 학문에 뜻이 있었습니까?

역사는 좋아했는데, 사실 학부 때는 역사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어요. 그런 쪽 활동 같은 것도 하다가. 군대 갔다가 제대한 다음부터는 학과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 활동 같은 거라면 동아리 말입니까?

문학 동아리도 활동도 하고 시도 쓰고, 등단을 한 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 글을 쓸 때면 옛날에 그쪽 활동했던 게 도움은 됩니다. 글이 아주 건조하지는 않게 조금 다르게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에세이집인 '황하에서 천산까지' 같은 책을 보면 '문청(문학청년)' 같은 느낌이 납니다.

그래요. 서울대 동양사학과 출신으로 중앙일보 주필도 지낸 권영빈 선배 그 분이 그 책을 보고 “어이 김 교수, 문청 냄새가 나는구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은 글 쓸 때 항상 그런 생각을 합니다. 건조한 학술적인 글이라도 어떻게든 독자들과 소통이 되게, 어려운 내용이지만 어떻든 읽히게 쓰자. 그렇다고 현란한 수사만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지요.

그 에세이 책은 주석을 달거나 논증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은 했어요.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라는 책을 쓸 때도 그렇게 시도는 했지요. 일반인들이 약간의 관심만 있으면 따라올 수 있게 썼어요. 그런데도 나중에 많은 분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더군요. 그거 보고 야, 이거 쉽지 않구나 생각했지요.

사실 그런 경우에는 책에다 기본 지식을 깔아주면서 일반 독자가 따라올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전문 학자들은 지면 낭비라고 생각하지요. 그게 고민입니다.

-학자와 대중 사이를 이어주는 중간 수준의 저자들이 많아야 하는데 국내 현실이 그렇지 않지요.

구미 쪽을 보면 학술적인 내용인데도 읽기 좋게 잘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국내에는 아직 내레이션(narration, 서술) 기법이 충분히 개발이 안 돼서 그런 것 아닌가도 싶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독자들이 당의정처럼 너무 쉬운 것만 요구하는 경향도 있고요.

우리나라 책들을 보면 대체로 한 면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너무 적어요. 반면 서양은 빽빽하게 들어가거든요. 가령 펭귄북 같은 대중교양서도 활자가 작아요. 우리는 만화처럼 쉽게 넘어가야만 사람들이 읽으니까. 그 점만 비교해 봐도 벌써 책에 대한 독자들의 마음 자세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국내 지식문화의 두께를 반영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자가 크고 분량은 적다 보니 호흡도 짧은 경향이 있습니다.

학자들도 굳이 상아탑 세계에만 갖혀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대중과 소통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식이 문제지요. 지금은 설정된 방식들이 너무 쉽게 돼 있는 감이 있어요.

여기저기 발표되는 글들도 보면 너무 뻔한 형식에 뻔한 얘기들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좀 더 깊이 있게 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요즘은 그런 방향으로 조금씩 개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과 달리 제대로 된 학자들이 조금은 읽을 만하게 쓴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게 쌓이고, 또 사람들이 읽다 보면 조금 더 묵직한 것들도 읽게 되면서 점차 나은 방향으로 가겠지요.

그럴 경우 구미 쪽과 같이 글자가 빽빽하고 학술적이면서도 읽기도 좋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건데, 아직은 학자와 독자 간에 간극이 있는 것 같아요.

-그 간극을 메워줄, 인문학의 역량도 있으면서 대중적인 전달력도 있는 저자들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네, 우리도 그런 중간 지식인층, 독립 연구자, 프리랜서 작가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외국에는 독립 학자(independent scholar)들이 많아요. 대학 교수는 아닌데도 방송이나 저술 활동을 하면서 상당한 연구도 하지요.

이런 사람들은 1차 자료도 안 보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2차 연구 자료들을 충분히 섭렵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떤 하나의 틀을 가지고 씁니다. 전문학자들은 아무래도 사료를 중시하고 뭘 입증하는 데 신경을 쓰다보면 글이 어려워지는데, 그런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써나갈 수 있지요.

실크로드 분야에서도 피터 홉커크(Peter Hopkirk)라는 사람이 있어요.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을 쓴 사람인데 대표적인 프리랜서 작가지요. 그 사람은 원 사료는 안 봅니다. 하지만 기존 학자들 연구 결과를 상당 부분 섭렵을 하고 그걸 기존 학자들보다 훨씬 더 잘 정리를 해요.

그래서 그 사람 것은 우리도, 외국 학자들도 글 쓸 때 인용을 합니다. 워낙 정리를 잘 했으니까. 또 재미있고. 그건 한번 잡으면 밤새도록 읽어버리게 되니까요. 그게 문화의 깊이지요. 한 사회의 문화의 깊이라는 게 그런 사람들의 책이 팔리고 인정도 받고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글 출판 시장의 한계도 거론되곤 합니다.

그래도 의외로 내 책의 경우, 가령 페르시아어로 된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역주 번역서만 해도 사실은 그렇게 쉽게 읽힐 만한 책은 아니거든요. 사료 번역이니까. 일반 독자를 위해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몇 천 부가 팔려요.

이 사실을 일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깜짝 놀랍니다. 일본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 책은 그냥 도서관 같은 데나 팔리고 마니아들 일부만 사서 본다는 거지요.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료 역주서 같은 것은 양장본으로 내서 아주 비싸게 팝니다. 적게 팔려도 기본적인 수익은 올릴 수 있게.

-출판 쪽 어느 분 말로는 국내에도 어려운 책을 소비하는(실제로 읽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문화 수요층이 일정 정도 있다더군요. 그래도 우리 사회를 보면 예전 문화유산인지 모르겠지만 지식이나 학습에 대한 존숭이랄까 높이 사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을 다녀 보면 그렇지 않은 나라나 문화권도 분명히 있거든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연세도 꽤 된 대학의 연구소장은 퇴근하면서 조그만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가는데 연구소 흑인 관리직원은 하얀색 링컨을 타고 가더군요. 서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자기 방식대로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우리 경우 상당히 늦게까지도 지식에 대한 존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을 업으로 삼는 교수나 교사, 아니면 펜을 갖고 일하는 기자 같은 직군을 쳐주곤 했는데 그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유교 전통인지 모르겠지만 잘 사는 사람들도 자식은 어떻게든 명문대나 좋은 학교 보내려고 하는 심리가 있지요.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암튼 요즘은 그런 게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

-오늘날 지식 사회, 지식 경제라고 해서 다시 혹은 여전히 지식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 아닌가요?

문제는 젊은층이 디지털 화면에 빠지면서 독서 문화를 잃어간다는 거지요. 디지털 출판이 많아지는 것도 좋지만 책은 여전히 책대로 가야하지 않나 싶어요. 요즘은 강의도 PPT를 안 쓰면 학생들이 갑갑해 해요.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하면 졸아요. 그래서 어떤 학과장은 이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요. 면대면 시선접촉이 중요하다는 거지요.

사실 강의를 할 때 얼굴도 보면서 해야 몰입이 됩니다. 필요한 슬라이드만 보여주고 눈은 서로 딴 데 가있고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 싶어요. 디지털이 편리하고 좋은 점도 있지만 그런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지 큰 숙제입니다.

-앞서 쓰신 에세이집을 보면 소수 민족에 대한 연민 같은 게 보이더군요.

소수 민족이라든가 마이너리티에 대한 연구는 동정심 같은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다 보니까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 경시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몽골제국이라는 게 세계 제국이고 세계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너무 미약한 것도 마찬가지고. 돌궐도 그렇고 흉노도 그렇습니다. 실크로드만 해도 그렇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정작 연구는 깊지가 않아요.

소수 민족 그 자체의 슬픈 역사를 공유한다는 것보다는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여태 경시돼온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계사를 보다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역사만 해도 주로 주류 문명만 연구하고, 동양사만 해도 중국 아니면 일본사지요. 하지만 실은 중국 변방에 있는 지역이 중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한데도 이들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출발한 겁니다. 단순히 감상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예요.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도 합니다. 이미 패해서 사라진 다른 지역 다른 민족의 역사를 애써 연구해야 할 이유는 뭐지요?

역사의 흐름을 보게 되면 중앙유라시아에서 주 동력이 유목국가이고 유목제국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사에서 굉장히 큰 동력으로 작용했는데,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한쪽을 러시아가 먹고 다른 한쪽을 중국 청나라가 먹어버리니까 중앙유라시아의 동력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독자성의 세계가 사라진 거지요.

그것을 연구하는 것은 한 2000년 동안 중앙유라아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동력, 18세기 중반 이전에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했던 지역을 되짚어 보자는 학문적 지적 호기심의 추구라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지역이 오늘날 다시 살아나면서 새로운 의미가 부각되기 때문에 연구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지역이 다 독립을 했습니다. 중국이 물론 굴기하고 있지만 앞으로 중국의 장래에서 서북 지역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과거 러시아와 청제국에 병합됐던 유라시아가 21세기 들어와서 다시 주요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의 과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아주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볼 때도, 저는 그걸 ‘유라시아 커넥션’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역사, 문화, 언어, 모든 면에서 그게 과거에 굉장히 강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를 걸쳐 심지어 조선 초기까지. 조선시대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성리학적인 구조로 바뀌면서 유라시아 커넥션이 끊긴 거지요.

그러면서 마치 우리는 유라시아와는 관계가 없고 문화의 모든 모델은 중국에서만 온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 문화의 상당히 많은 깊은 원형들이 유라시아와 연결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를 연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과거의 복원, 현재에도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갖는 중앙유라시아의 커넥션을 되살린다는 뜻에서도 우리가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

-'유라시아 커넥션'의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고고학 미술사 분야에서 한국과 중앙유라시아(중앙아시아, 북아시아)와의 문화적 연관성을 지적한 연구들(권영필, 최병현)이 있고, 역사학 분야에서도 고구려(노태돈), 그리고 고려 시대(이개석, 김호동)에 역사적 연관성에 주목한 연구들이 제법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시키는 움직임은 예전부터 대중 차원에서도 있어왔습니다. 얼마 전 바이칼호 여행을 갔다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일행이 바이칼호의 알혼섬과 부르한 바위를 두고 한민족의 기원과 연결시키더군요. 이런 인종적 유전적 접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인종적 유전적인 측면에서의 분석도 필요하겠지요. 다만 그런 시도를 하는 분들이 대체로 '낭만적 민족주의' 성향이 지나치게 강해서...

-중국 접경 지역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현실 국가 권력과 충돌할 가능성도 높을 텐데요.

대표적으로 신강, 제가 연구하는 티베트 지역이 그런데, 저는 정치와 학문은 구별돼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고려가 학문적인 판단이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박사학위 논문이 나중에 미국 대학에서 영문으로 책으로도 나왔는데 제목이 ‘Holy War in China’입니다. 중국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목이지요.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떠나 중국에 소개도 인용도 잘 안됩니다. 사실 19세기 후반 신강 역사를 연구하려면 이 책이 필수적인데도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런 유사한 딜레마가 제가 연구하는 다른 것에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몽골제국사를 제가 연구하는 것도 중국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왜냐면 저는 이게 중국 왕조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중국 사람들은 “무슨 소리야, 이건 중국 역사인데” 그럽니다. 저는 그 지역 역사가 중국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닌데도 그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합니다.

그런 예민한 문제가 있지만 저는 적어도 정치적인 것과 학문적인 것은 엄격히 구분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학문적인 어떤 성과가 정치적으로 ‘오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정치와 학문의 구분을 이야기하셨습니다만 중국의 (관변)역사학이 정치권력에 복무하는 상황에서 여기에 반하는 학문적 견해는 충돌이 불가피하지 않을까요? 가령 티베트 역사의 독자성에 대한 연구가 정치적 독립의 정당성(=중국 병합의 부당성)을 부여하는 것 아닌가요? 학문적 의도와는 상관 없이 연구 결과의 의미가 현실 정치에 대한 발언으로 해석되지 않을까요?

역사와 정치. 그렇겠지요. 비정치적으로 추진된 역사 연구의 결과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까지 역사가가 책임지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그러나 역사연구자가 처음부터 그러한 정치적 효용성을 생각하고, 특히 특정한 경향의 연구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티베트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베트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을 갖고 출발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동기'로서 그런 것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장을 투영시키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학계의 중앙아시아 연구에도 근저에 지정학적 관심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소수민족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흔들 수 있으니까요.

중국인 입장에서는 소수민족 이야기가 미 제국주의나 서구에 상당히 편향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가령 요즘 청나라 연구, 즉 ‘신청사(新淸史)’라는 것이 있는데 이걸 중국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제가 몽골제국이나 원대 얘기하는 것도 사실은 거의 같은 얘기입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것만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볼 가능성이 충분하거든요.

예를 들어 청제국은 중국 한인 왕조가 아니라 다민족국가였고, 만주족의 황제가 통치했다는 거거든요. 몽골제국, 원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몽고에 황제, 즉 칸이 있고 여러 다른 많은 집단들이 있었던 건데, 원이 중국 역사의 일부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역사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거지요.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안에 벌어진 많은 민족들의 역사를 자기내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가령 흉노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은 맞지만 몽골(리아)의 일부이기도 했던 흉노를 몽골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중국이 앞으로 그야말로 선진국이 되고 문화적으로 성숙하려면 그런 것에 대한 논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국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모든 걸 맞추려고 하면 안됩니다.

지금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에 들어가는 지도를 그리는 중에도 제일 예민한 게 경계 영역 표시거든요. 이런 데서 당장 문제가 되지요. 그래서 내가 집필 중인 이 아틀라스책은 중국에서 절대 번역될 수가 없을 겁니다.(웃음)

-선생님의 또 다른 학문 주제로, 농경민족 문명과 유목민족 문명을 세계사의 양대 축으로 보고 유목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이 있지요?

유목국가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돼 왔었는데, 사실 유목국가는 사라졌지요. 하지만 지나가버린 죽은 문명이긴 해도 적어도 1700년대 중반까지는 유목국가라는 게 세계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인(factor)였어요.

그게 지금은 사라졌고 그걸 표방하는 문화도 없고 그래서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고대 스키타이 흉노부터 시작해서 중국사도 그렇고 러시아사도 중동사도 유목국가사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조하는 거지요.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와서 ‘노마드’라는 개념과 함께 유목문화가 재조명되기도 합니다.

과거 유목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기동성, 이동성(mobility)이었지요. 인구 백만도 안 되는 흉노나 몽골이 그 백 배가 넘는 중국을 제압할 수 있었던 비결이 이동성의 힘이었고, 그걸 극대화한 게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었지요. 그 시스템의 장점을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몽골제국은 급부상 후에 빠르게 몰락했습니다. 이유가 뭐였나요?

빠른 속도로 부상했다가 왜 급격히 망했는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여하튼 제 나름의 견해로는, 성공의 이유는 우선 기동성입니다. 기마 문화를 기반으로 굉장히 빠른 타격전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다른 유목 기마 민족이 있었습니다. 칭기스칸과 그 계승자들의 군대는 그 기동성에 기율을 장착했습니다. 엄격한 군율과 기동성을 결합함으로써 그야말로 전쟁기계(war machine)라 할 수 있는 아주 막강한 군대가 생긴 거지요.

그 외에 여러 지역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자기들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거 포용해서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몽골제국 시대에 인물과 문화 교류가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광범위하게 갖다 쓴 거지요. 중국 사람 서쪽으로 데려가고 서방 기술자들 동쪽으로 데려가고 했습니다.

그렇게 정복해 놓고 왜 급격히 무너졌나. 이건 미스터리입니다. 학자들도 분명히 설명하지는 못하는데. 한 가지 설명은 너무 규모가 커졌다는 겁니다. 폴 케네디가 제국의 흥망을 쓰면서 그런 얘기를 했듯이, 제국도 적정 규모가 있는데 너무 커져버렸다는 거지요. 대영제국, 오스만 제국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두번째, 칭기스칸 일족 내부의 분배 시스템, 상속 시스템을 이유로 들기도 합니다. 일정한 규칙이 있는게 아니어서 서로 싸우게 되니까 상속 과정에서 분쟁들이 격화됐다는 거지요.

마지막 하나는 자연 재해로 돌리는 설명인데, 흑사병을 듭니다. 1340-50년대에 흑사병이 터지는데 그 시기에 몽골제국이 다 무너집니다. 제국의 네트워크가 그때 붕괴됐다는 거지요. 그런 것들은 연구가 잘 안 돼 있습니다.

-몽골제국 자체에 대한 연구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 많다는 이야기군요.

물론입니다. 규모에 비하면 그렇습니다.

-몽골제국을 통해 통합세계사를 그리려 한다고 하셨지요?

흔히 세계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고, 다시 동양은 중국, 일본사로 나눕니다. 그런 지역사를 기계적으로 합한 것을 세계사로 봅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월드 히스토리는 그게 아닙니다.

서로 연관된 역사, 통합된 세계사를 한번 복원 구성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몽골제국이 하나의 재미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제국이었기 때문이지요. 몽골제국 시대 세계사의 커넥션들이 어땠는가를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럽, 중국 등의 단위 블럭으로 역사를 이해하다가, 그 틈새 공간을 되살리고 메우는 작업 같군요.

비유하자면 그 전까지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동, 유럽 이런 큰 덩어리로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명권들이 경계가 딱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단순화시키자면 코어를 중심으로 서로 톱니처럼 돌아간다고 했을 때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이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중앙유라시아가 했습니다. 이음쇄 역할을 한 거지요. 일반적으로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건 아는데, 그냥 단순히 매개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윤활유 같은 걸로 본 거지요. 실크로드라는 것도 동서의 가교 정도로 봤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곳도 엄연한 하나의 현장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사물과 사람들이 만나고 변형돼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좌우의 톱니바퀴를 연결하는 윤활유가 아니라 이 자체가 하나의 톱니바퀴라는 거지요. 실크로드만 해도 선이 아니라 면이라는 겁니다. 문명들이 만나는 또다른 하나의 문명이라는 거지요.

-그런 복원 작업 중의 하나가 ‘동방 기독교’ 연구였지요? 기독교가 일찌감치 몽골은 물론 중국까지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재미있지요. 몽골제국을 연구하다 보니까 칭기스칸 집안에 의외로 기독교도가 많은 거예요. 며느리, 자식, 손자 들이 기독교도가 많아요. ‘어떻게 된 거지’ 하다가, 제가 기독교도이기도 해서 관심이 있어서 보니까, 이미 당나라 때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어요. 그 뒤로도 면면히 이어진 거지요.

-그때도 ‘기독교’라고 불렀나요?

‘기독교’라는 말은 없었어요. 당시 중국에는 여러 표현이 있었는데, 대진(大秦)이 로마를 가리켰는데 ‘로마에서 온 종교’라고 해서 ‘대진교’라거나, ‘아주 밝다’는 뜻에서 ‘경교(景敎)’라고도 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절 사(寺) 자를 넣어서 ‘십자사’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었지요. 당시에 주요 경전도 번역되고 그랬어요. 그걸 쭉 한번 써본 게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이었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연원을 연구하다 보면 자신의 신앙에 영향을 주지는 않나요?

학문적인 연구 결과와 개인적인 믿음(faith)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내가 연구하는 내용이 신앙을 지켜주면 좋겠지만, 그게 반드시 일대일로 맞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물을 연구하는 내 영역이 신앙과 직접 배치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알고온 유럽 전통의 기독교와는 다른 동방의 기독교를 알게 되면 종교도 결국 절대적 진리라기보다 역사 속의 일시적 사건이나 현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지 않나요?

기독교에 대한 신앙 자체는 초역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형태는, 그러니까 종교적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을 취하느냐는 것은 지역과 문명과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요. 양상이 다를 뿐이지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 자신 믿음이 독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교회 다니고, 남들이 보면 독실하다고 보는 사람일 거예요 아마. 저는 항상 제가 하는 작업이 나의 믿음에 어떤 의미를 갖기를 바래요. 하지만 그게 일대일로 번역(translation)은 안 되거든요 사실은. 억지로 끼워맞추고 정당화하는 것도 좀 우습고.

그런 면에서 ‘몽골제국기행’ 번역 같은 것은 두 가지를 다 충족시켜 줬습니다. 하나는 몽골제국 시대의 중요한 문헌을 내가 번역해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두번째는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복음이 13세기에 이런 과정을 통해 이 멀리 동아시아 지역까지 전달되는 과정에 대해 알려준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성공은 못했는데 그 추운 겨울에 대륙을 횡단해서 와서 쓴 글이지요.

이 책은 한편으로는 내가 연구하는 역사적인 자료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활동 기록으로서 묘하게 두 가지가 상당히 충족되면서 번역을 하면서도 사실은 내내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작업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역사에 어떤 방향이 있다고 보십니까? 기독교 신앙과는 어떻게 연결지으시는지요?

역사학에는 어느 특정한 방향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겠지요. 그러나 대체로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료를 근거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추론을 통해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정한 종교의 신앙 유무가 이러한 일반적인 방법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을 하는 의미나 의의, 역사학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큰 질문이네요. 저는 그냥 역사 공부가 재미있어서 합니다. 나의 연구 결과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다소간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겠어요?

-소수 민족에 대한 연구가 감상적인 동기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글의 행간을 보면 어떤 애정이나 연민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제가 처음 박사 논문으로 쓴 게 위구르인들 역사였습니다. 그 사람들 글을 보다 보면 진짜 중국인에게 억눌린 게 있어요. 그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가령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인들도 그렇습니다. 중국 버전으로만 보면 그 사람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지요. 나는 위구르인들 언어를 읽어서 그 사람들 생각을 알기 때문에 소개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거지요.

-‘황하에서 천산까지’라는 에세이집을 보면, 대학 시절 큰 스님을 만나기 위해 삼천배를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대학 때 문청(문학청년)들이 하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1년 휴학한 적이 있어요. 그때 철학, 문학 책도 많이 읽고 그랬지요. 중요한 철학책을 많이 읽었는데 읽어도 모르겠더군요.

원문으로 읽어도 제대로 이해가 잘 안 될 텐데, 당시 초기에 나온 이상한 번역본들 보면서, 종교적으로 여러가지 방황도 하고 그랬지요. 당시엔 법대생들이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를 했는데, 내 친구가 거기 가 있어서 나도 가볼까 해서 한 달 정도 가 있었어요.

그 때 친구 말이, “성철(1912-93) 스님이 대단하다더라. 한번 만나보러 가자”고 해요. 그래, 가자고 했더니, 그냥은 안 만나주고 삼천배를 해야 만나준다고 해요.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삼천배가 그렇게 힘든 건가, 에잇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그래서 한 거지요.

결국 가서 만났어요. 삼천배를 하면 다리가 완전히 상해요. 하산할 때는 거의 기다시피하는데, 교통편도 마땅치 않고 해서 산을 몇 개 넘어 해인사로 찾아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 젊은 날의 추억이지요.(웃음)

-그때 성철 스님이 뭐라던가요?

화두를 주셨지요. ‘불시심불시불불시물(不是心不是佛不是物)이니, 시심마(是甚麽)’라고 해서, 아주 유명한 화두지요.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니 이게 무엇인고’라는 뜻이지요.

-그때 어떤 깨달음을 얻었나요?

그때 일은 젊은 시절 한때 방황할 때의 일로 끝났지요. 특별한 일이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요즘도 인터넷에서 ‘김호동 교수’로 검색을 해보면 하버드대 시절 은사인 플레처 교수와의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떠돌아 다닙니다.

‘그는 내게 러시아어부터 배우라고 권했다. 어느 정도 러시아어를 읽을 만하게 되니 다시 페르시아어를 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는 몽골어, 터키어, 위구르어. 이런 식으로 그가 내게 다양한 언어의 습득을 요구한 것은 물론 중앙아시아라는 독특한 지역을 공부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덕택에 나는 현지어로 된 자료들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고맙게 느끼는지 모른다… 플레처 교수는 모국어인 영어를 빼고 14개국어 정도를 알고 있었다. 이미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웠고, 대학에 들어온 뒤에는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티베트어, 그리고 고대 중세 현대 투르크어를 익혔다. 그리고 그가 마명심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 뒤부터는 다시 아랍어에 몰두했다.’ (‘황하에서 천산까지’에 나오는 내용)

학생들 사이에서는 흔히 그런 이야기들이 와전되곤 하지요. 그런 외국어들은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게 아니라 문헌을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러시아어는 처음엔 ‘닥터 지바고’를 읽을 목표로 했는데 아주 어렵더군요. 그래도 지금도 러시아어는 사전을 안 찾고도 웬만한 책은 봅니다. 중앙아시아사를 연구하려면 러시아어가 굉장히 필요해요.

-아랍어도 하십니까?

아랍어는 배웠는데 잘 못합니다. 강의 듣고 혼자 몇 년 했는데도 어려워요. 좀 젊었을 때 시작했으면 모르겠는데. 내가 안다는 언어에 넣지 않아요. 러시아어보다 아랍어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플레처 교수는 어떤 학자였습니까?

그분도 중국의 소위 변방 지대, 몽고라든가 티벳이라든가 신강 이런 지역 역사에 관심 많았고 필요한 언어를 다 했어요. 특히 신강 지역의 무슬림에 관심이 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 박사 논문도 19세기 그 지역 무슬림의 반란을 하게 된 거지요. 그때 자료 수집 위해 외국에 나가는데 이 분이 암이 걸린 거예요. 병실에 찾아가서 당신이 못다 한 것 내가 다 하겠다고 했더니, 됐다 너는 네 공부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내가 자료 수집 여행 다니는 동안 돌아가셨지요.

그분과 저는 연구 분야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제가 몽골제국에 집중하면서 달라졌지요. 그분이 이야기한 게 통합세계사였어요. 저는 몽골제국을 통해 그 통합사를 테스트해보고 싶은 거지요.

-중앙아시아사가 대중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비인기 분야인데, 처음 시작할 때 걱정이나, 도중에 외롭다는 느낌은 없었나요?

하는 게 재미있었으니까 한 거지요. 지금은 청년실업이 하도 많아서 걱정들을 많이 하는데 다행히 그때는 취직이 잘 되는 편이었어요. 석사 논문만 쓰고도 바로 취직이 됐기 때문에, 취직 걱정보다는 내가 하는 게 재밌어서 거기에 빠져서 새 언어를 배우고 자료도 읽고 했지요.

그래서 사실 외롭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또 학위 마치고 귀국해서는 제자들이 많이 생기니까 가르치는 재미가 있더군요. 또 내가 쓴 책들에 대한 독자들 반응이 비교적 좋았어요. 사서 읽은 분들이 이런저런 얘기들도 하니까 굉장히 보람을 느꼈어요.

-의외군요. 소수 학문 연구자의 길이 외롭고 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행복했다는 말씀이군요.

소수 분야였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다기보다 오히려 남들이 안 하는 것에 빠져들어 보는 게 좋았어요. 페르시아 자료 같은 것 보는 것 자체가 너무 희열이 있거든요. 햐, 이걸 보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보는 거지요.

또 그런 것을 학생들한테 가르쳐 주는 것도 즐겁구요. 그런게 지적 희열이지요. 소수만 읽을 수 있는 비경의 어떤 것을 내가 읽는다는 기쁨. 또 내가 그걸 가지고 책을 내면 많은 사람들이 읽고 호응을 해주고 그래서 상당히 나름대로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희귀 자료를 읽기 위해 여러가지 어려운 외국어까지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싶었습니다만.

아니요. 외국어 배우는 것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그걸 배워 내가 그전에는 몰랐던 걸 읽게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오히려 재미있는 거지요.

-연구하는 분야의 국내 전문가가 드문 상황에서 번역서나 저작을 공들여 내더라도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지는 않나요?

그런 면이 있지요.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해나가는 거지요. 저는 문화라는 것은 언어로 축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영어로 써도 그것이 한국의 문화가 되지는 않습니다.

제 책이 외국에서 출판됐을 때 리뷰 나오는 걸 보면 미국 학자로 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일단은 번역서나 저술은 한글로 씁니다. 그 대신 연구 수준은 국제적인 수준에 맞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국내에는 잘 썼다, 못 썼다, 이거 틀렸지, 이런 걸 제대로 얘기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결국 제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준으로 계속 해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지요.

-선생님은 늘 자신을 낮춰 말씀을 하시는 편인데, 어느새 학과에서 가장 원로가 됐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질문이지만 국내 학계 수준은 어떻다고 보시는지요?

동양사 쪽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봅니다. 1세대였던 민두기 선생님 그 분의 연구 업적이 국제적 수준이었고, 워낙 엄격하게 제자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나온 연구들은 꽤 국제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동양사 특히 중국사는 상당한 수준이고 외국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사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앞으로 전문가들이 좀 나올 겁니다. 제가 키운 제자들도 있어서 이 친구들이 외국에서 활동하고 논문도 발표하고 하면서 국제적인 위상도 높여갈 걸로 기대합니다.

중앙아시아사는 분야의 특성상 학자라면 국내 독자만 가지고는 할 수 없어요. 곧바로 나가서 외국에서 발표하고 토론도 하고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이 분야도 국제적 수준의 연구를 해야 하고, 그럴 거라고 봅니다.

-한중일 세 나라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숫자로도 비교가 안 되지요. 중국, 일본은 굉장히 많습니다. 중국은 자국사의 함정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중국적 시각으로 자꾸 보려고 하니까.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어긋난 얘기는 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문제가 있고, 일본 경우는 옛날부터 굉장히 높은 수준으로 해왔기 때문에 연구자 수도 많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 숫자도 적고 수준도 그렇지만, 그래도 소수의 연구자들이라도 노력하면 전체적인 수준은 올라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내에서 이쪽 분야 학문을 해오면서 분위기나 기반 측면에서 어렵거나 아쉬운 점은 없나요?

중앙유라시아사 분야가 사실 아직도 소수 학문이지요. 몽고나 티베트나 신강 연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취직에 어려움이 굉장히 많습니다. 전국에서 중앙아시아사 전임 정원은 서울대가 유일합니다.

조금은 더 국가적인 정책적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왜냐면 앞서 얘기했듯이 앞으로 국가 전략적으로도 그만큼 필요한 분야거든요.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동양사 분야에서 다양한 전공자를 받았으면 합니다.

-요즘 인문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글쎄요, 제가 인문학 전체에 대해 언급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우선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식들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학에도 HK(인문한국) 사업 지원도 들어가고 하는데.

국가 지원이라는 게 보면 조금 뭐랄까 너무 기획성이랄까 프로젝트 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있어요. 연구 업적을 너무 단시간에 내야 하는 단점이 있지요. 가령 금년에 연구비를 받으면 내년에 내야 한다든지, 공동 프로젝트가 있으면 다들 몰려가서 그걸 해야 한다든지.

연구자가 지원을 받는 것은 좋은데 그 조건을 탄력적으로 해서 자기가 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견고한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지금 사업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굉장히 빨리 성과물이 나와야 하다 보니, 그렇게 나오는 것들이 잘 축적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

둘째로는, 인문학이라는게 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그게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것이 학술적으로 견고한 연구와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잘 나가느냐는 문제에 관한 한 아직 만족스러운 틀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인문학에 대한 여러 수요는 많은데 이 수요를 어떻게 학술적 연구와 잘 맞춰 충족시키냐는 거지요. 소화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겠죠. 아주 대중적인 차원에서 조금 고급스러운 단계까지 여러가지일 텐데, 그런 것들을 좀 잘 표현할 수 있는 포맷들이 정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대중 강연도 있을 수 있고, 대중적 글쓰기도 있겠지만 좀 더 높은 차원의 것들도 있었으면 합니다. 인문학이 제가 보기엔 좋은 기회이자 위기이기도 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 교수는 일전에 “500명을 위한 책을 쓰는 저자가 있고, 5만명을 위한 책을 쓰는 저자가 있다”고 구분하시더군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500명을 대상으로 쓰지만 5만명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물론 욕심이고 사실상 불가능한 얘긴데. 500명만 읽을 수 있는 연구의 깊이와 질을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해서 천명, 2000명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하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아요.

앞으로는 5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5000명, 만명 정도의 눈에 맞출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글을 써야 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라시아사를 권한다면 어떤 이유를 들겠습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비타민이라는 것은 소량이지만 결정적인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극소량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처럼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중앙아시아사 연구라는 것이 굉장히 소수인 마이너 분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세계사를 이해할 때 굉장히 핵심적인(essential)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잘 제시하느냐가 중요한데, 그게 되려면 연구가 깊이 돼야 합니다. 착실한 연구를 기초로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아, 이게 중요하구나 하는 인식이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제가 그동안 노력했던 것도 그런 걸 한 겁니다.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절반의 성공은 거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이 연구를 시작할 때에 비하면 그래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전혀 무익한 엉뚱한 쓸모없는 짓을 하지는 않았구나 생각합니다.

-곧 미국으로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9월부터 한 학기 연구년으로 가는 겁니다. 이번에 가서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에서 내가 맡은 장(章)을 하나 쓰고, 그걸 기초로 별도의 책을 하나 쓸까 생각합니다. 제목은 아직 미정인데 ‘몽골제국의 세계 지배’ 정도가 될 겁니다. 그냥 연대순이 아니라 몽골인 자신들이 어떤 제도를 발전시켜서 세계 지배에 적용했는가 하는 측면을 다루는 겁니다.

-앞으로 장기적인 학문 구상은 어떻습니까?

몽골제국 연구를 더 하고 싶습니다. 몽골제국사를 전체적인 큰 틀에서 그려보고 싶어요. 좀 건방진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처럼 일반인들도 읽어볼 수 있는 ‘몽골제국흥망사’ 같은 것을 한번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담담하고 쉽게 세계 제국이 어떤 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런 책은 아직 외국에 없나요?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텐데. 간단한 개설서는 있지만 제가 본 관점에서 쓴 것은 아직 없습니다.

-그 많은 연구와 저술을 소화하려면 일상 생활도 굉장히 조직적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들과 똑같습니다. 특별히 잠을 적게 자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더 각고의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일 뿐입니다.

-책은 전공서 외에 어떤 것들을 읽으시는지요?

주로 내 분야 책인데, 가끔 이슬람이라든가 서양사 쪽 재미있는 책을 좀 찾아 읽기도 합니다. 문학 작품도 좀 찾아 읽고 해야 하는데 그런 정신적 여유가 안 돼서. 은퇴하고 나면 그것도 가능하겠죠.

-공부 외에 다른 취미는 없습니까?(웃음)

(웃음) 그거 사람이 무취미란 얘긴데,(웃음) 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전에는 테니스를 많이 쳤는데 요즘은 그것도 잘 못치고 운동을 못했습니다. 요즘 살이 쪄서, 이번에 가서 10킬로만 빼고 오려고 합니다.(웃음)

-선생님 분야에서 일반 독자들도 꼭 읽어볼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신다면?

사마천의 ‘사기’, 헤로도토스의 ‘역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같은 것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김호동 교수

현재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954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79년 서울대에서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중앙아시아 위구르족의 독립 투쟁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황하에서 천산까지’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몽골제국과 고려’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등이 있다.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은 2004년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Holy War in China’라는 제목의 영문서로 출간했다.

역서로는 ‘역사서설’ ‘유목사회의 구조’ ‘칭기스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슬람 1400년’ ‘라시드 앗 딘의 집사’(전 3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