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후 400-500년 사이, 동서양이 교차했던 인도 북부 간다라.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날 다채로운 불교 미술의 원류로 꼽히는 그곳 미술은 어떤 과정에서 생겨났고 어떻게 전파됐을까. 간다라 불상이 멀리 한반도 통일신라 석굴암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통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간다라 미술의 권위자인 이주형 서울대 고고미술사학 교수가 이런 크고 작은 물음에 대한 답을 들고 대중 앞에 섰다. 조선비즈 북클럽과 위비클럽이 매달 기획하는 지식콘서트가 그의 저서 ‘간다라 미술’(사계절) 개정판 출간을 맞아 연사로 초청한 자리였다.

이 교수는 이날 책 내용을 반복하기보다 ‘후일담’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강연은 ‘후일담’ 수준을 훌쩍 넘어 간다라 미술의 전후좌우를 망라하다시피했다. 불교 미술은 물론 동서 문화의 교류 혹은 침투, 그리고 우리 근대기의 미적 인식과 지식의 형성 과정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이어진 이야기는 마치 별 권의 인문서를 읽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질의응답과 함께 1시간반 가까이 진행된 강연 내용을 중계한다. 당일 녹취한 것을 정리하고, 이 교수가 약간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번에 나온 책은 12년 만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그 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표현을 바꾸고 새로운 걸 더 집어넣고 여러 작업을 좀 했습니다. 기존의 틀이 있다 보니 많이 고치기는 어렵더군요.

이 책을 처음 쓰게 된 것은 1999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간다라 미술이라는 전시회가 계기였습니다. 그때 제가 도록(圖錄)을 썼는데 소개 글을 원고지로 250매를 썼습니다. 사진으로 실린 작품 해설도 쓰고요. 그냥 두기 아까워 거기에 살을 좀 더 붙여 책으로 내게 됐습니다.

원래 도록에 썼던 것이어서, 말하자면 서양의 미술과 동양 종교의 만남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낭만적으로 썼던 것 같아요. 2003년에 나온 책 체제도 그렇게 됐구요. 그 뒤에 책을 다시 쓴다면 다르게 쓸 것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아주 학술적인 저술은 아니고, 대중적인 것에 학술적인 살을 붙였다고 하겠습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지역 탈레반의 포격으로 폭파된 바미얀 서대불(왼쪽)과 동대불

1년 뒤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책을 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사회평론)이라는 제목인데요, 전작 ‘간다라 미술’에서 이 부분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점이 있었고, 또 그때부터 3년쯤 전에 바미안 불상이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일이 있었죠. 그 불상을 위해 뭔가 해야 할 것 같아, 책을 쓸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좀 더 일반 독자를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어느 출판사 사장님이 우리나라에서 잘 팔릴 책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우리 독자들은 알고 있는 무언가와 연결이 된 책이라야 읽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었어요. 아주 먼 곳의 생소한 것들은 바로 소개하기가 참 어렵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늘 주제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책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 뒤 추가된 사실이나 또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왜 우리는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우리는 왜 간다라 미술에 매료되는가입니다. 이 물음은 제 책 마지막에 간단히 다룬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간다라 미술에 대해 적정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두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간다라에 대한 심취가 대단합니다.

이 문제는 우선, 서양인들이 역사를 보는 낭만적인 시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책도 그런 시각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당 부분 서양인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은연중에 서양인들을 보면서 닮으려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책을 다시 쓴다면 아마 다르게 시작할 것 같습니다.

이게 간다라 불상입니다. 간다라는 서력 기원전후부터 4-5세기 동안 파키스탄 북쪽에서 유행한 미술입니다. 이 사진은 기원후 200년쯤에 만들어진 불상 머리, 불두(佛頭)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왜 여기에 매료됐느냐. 서양의 근대 이후, 19-20세기에 걸쳐 특히 19세기에 서양 사람이 동방에 관심을 두는 데에는 알렉산더가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란이나 인도 같은 동방에 관심을 두게 됐을 때 흔히 알렉산더를 통해 이쪽으로 접근했다는 말입니다.

특히 역사학자 중에 오렐 스타인(1862~1943, 탐험가) 같은 사람이 그랬어요. 많은 사람이 스타인처럼 어릴 때 알렉산더의 전기를 읽으면서 동쪽 세계, 인도를 꿈꾸고 이 지역에 대한 탐험이랄지 연구랄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리석 두상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334~326년경에 있었죠. 유라시아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건 확실히 서양 사람의 입장에서 본 역사 속에서 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때만 해도 세계에 대한 지식이 크게 부족해서, 동쪽으로는 인도까지만 알았는데 인도마저 아주 조그맣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쪽 중국은 전혀 몰랐고요. 중국을 알고 교류하게 된 것은 기원전후나 되어서였습니다.

그런 세계에서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발길을 좇아 근대 역사학자들도 탐험하게 됐죠. 간다라 미술도 그런 맥락에서 조명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원정을 통해 그리스인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럽에선 변방인 마케도니아인들이 아시아 서반부 곳곳에 정착했습니다. 그 중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쪽과 지금 우즈베키스탄 남쪽의 박트리아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거점으로 헬레니즘이 뿌리내렸던 거지요.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도

박트리아에는 그리스인들 도시도 남아 있는데, 지중해 세계의 도시처럼 체육관도 있고 큰 반원형 극장도 있고, 궁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철학책의 단편도 출토됐습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그보다 조금 남쪽에 있는 간다라라는 지역에서 불교 미술이 나오게 됩니다.

알렉산더가 세운 것은 결국 제국인데요, 자기가 사는 곳 이외 다른 지역에 관심을 두는 것은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근대기에 제국이 아니었던 나라 중에는 그렇게 자기 문화 이외 다른 여러 곳의 문화를 연구하는 전통이나 관습이 있는 곳이 별로 없어요.

영국, 프랑스가 바로 그런 제국이었고요, 일본은 한때 제국이 되려 했고, 미국은 제국이지요. 그렇게 보면 한국은 굉장히 특이한 것 같아요. 이탈리아는 오늘날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해 상당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워낙 학문 전통의 뿌리가 있어서 그게 남아 있는 거지요.

서양 사람들이 서양 역사의 일부라는 면에서 간다라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데,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그토록 매료된 데에는 또 다른 맥락이 있지요. 그중에는 이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불교 미술에 관한 지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아요. 우리는 그런 일본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의 美的 인식과 지식의 형성 과정

다음으로, 제가 관심 있는 것이 뭐냐면,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나 불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나 지식이 근대기에 어떻게 형성됐느냐는 거예요.

아프가니스탄 핫다의 불두

여러분이 서양 영화를 볼 때는 서양 사람 얼굴에 대해 거부감을 거의 느끼지 않죠? 하지만 바로 옆에 서양 사람을 두고 얼굴을 보면 어쩜 저렇게 코가 큰가 싶기도 하고 이상해 보이는 면이 많아요. 요즘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사람 얼굴을 볼 때 모든 디테일을 골고루 종합해서 보는 게 아니라 몇 군데만 중점적으로 보는 것을 반영한 겁니다.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데 눈이 찢어지고 인상이 별로 안 좋은 사람이 등장해요. 틀림없이 악당이겠거니 했는데 나중에 보니 다니엘 헤니였어요.(웃음) 동양인들 틈에 있을 땐 미남인데, 서양 인들 틈에 있으니 달라 보이는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다라 미술에 경도되는 것은 서양 고전주의에 익숙한 우리의 심미적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상적 형상의 사실적 조형을 목표로 삼았던 서양 고전주의의 심미적 이상이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하고 깊이 내면화돼 있다는 거지요.

동서양의 인간 조형을 비교해 보면, 형상의 입체성이나 그것의 재현 기술과 관행에서 서양 고전주의가 우월하고 더 인간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고, 서양인의 형상이나 조형은 오히려 이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저를 제일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이 석굴암 불상이 간다라 영향을 받았느냐는 겁니다. 교과서에 그렇게 많이 쓰여있죠. 하지만 거기에는 무리한 점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 얼굴이니까 비슷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비교해 보면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간다라 미술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심리 이면에는 우리가 간다라 미술을 훌륭하다고 여기는 정서가 심리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석굴암 불상의 높은 가치를 적절히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불상이 처음 만들어진 원류가 간다라에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모든 불상의 뿌리가 간다라에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양식으로 말하자면 석굴암 불상은 오히려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살지고 푸짐한 게 복스럽고 원만한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동과 서를 이야기할 때 융합, 교류를 말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미화하거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당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심미적인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인의 시선에서 시작된 불교 미술

간다라에 흔히 매료되는 세 번째 배경은 연구 전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서양인의 눈으로 봤을 때는 불교 미술에서 간다라의 불상이 가장 조각답고 미술의 범주에 넣기에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여겼진 거지요. 그런 점에서 간다라는 서양 고전 미술의 가장 동쪽 끝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학술적 의미의 근대적 불교 미술이란 것도 서양 사람들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서양인들이 처음 간다라 미술을 알게 된 것은 1840~1850년인데, 두 명의 학자가 굉장히 중요한 책을 썼어요.

한 사람은 독일의 알버트 그륀베델(Albert Grünwedel, 1856-1935)인데, 중국 서쪽 신강성의 쿠차 지역 석굴 조사를 많이 했어요. 그는 1893년 ‘인도의 불교 미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이 간다라 미술이었습니다.

불교에 미술(Kunst)란 말을 붙여 쓴 게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서양인들은 간다라에서 나온 불상은 그냥 ‘우상(idol)’이라 부르고 미술이 아닌 민속학 유물 범주에 넣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최초로 불교 미술이라 불린 범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간다라 미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미술 연구의 시작이 바로 간다라 불상에 있었고, 그것만이 미술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출발할 때부터 있었던 겁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알프레드 푸쉐(Alfred Foucher, 1865-1952)라는 사람입니다. 푸셰는 1900년 ‘인도의 불교 도상 연구’라는 책을 냈고, 1905-1922년에 걸쳐 ‘간다라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이라는 대작을 냈습니다. 그의 연구가 간다라 미술 연구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고, 후대 불교 미술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 에른스트 페놀로자(Ernest Fenollosa, 1853-1908)라는 미국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 1878년에 일본에 와서 제국미술학교에서 처음으로 미술사를 가르쳤어요.

1912년에 ‘Epochs of Chinese and Japanese Art(중국과 일본 미술의 시대)’라는 책이 그의 유작으로 나왔는데, 이 책에 ‘중국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 당 초기(Greco-Buddhist Art in China: Early Tang)’와 ‘일본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 나라 시대(Greco-Buddhist Art in Japan: Nara Period)’라는 제목의 장(章)이 실려 있습니다.

동아시아 불교 미술에서도 비로소 인간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표현하게 된 시대를 일컬어 동아시아의 그리스풍 불교 미술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 생각이 뿌리내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겁니다. 석굴암에 대한 인식도 그런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저는 동과 서의 만남으로서 간다라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입니다. 서양 고전 미술의 시각에서 보자면 오히려 거칠고 퇴화한 지방 미술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 나름의 독특한 맛이 있긴 하지만, 특별히 인도라거나 동아시아의 여러 곳에서 만들어진 불상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너무 익숙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그런 눈으로 봐서 그렇지,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왼쪽은 3-4세기 간다라 지역의 불입상. 오른쪽은 기원전 340년경 로마시대 소포클레스 대리석상

또 다른 인도 문화의 중심, 간다라

다음으로, 간다라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인데요. 요컨대 이곳은 또 하나의 인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다라 미술의 기원이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과 그 뒤 이곳에 정착한 그리스인, 헬레니즘 문화에 연결되어 있음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실제 간다라 불상을 만든 주체는 대부분 인도인이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간다라는 파키스탄 북쪽에 있습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에 페샤와르라는 곳이 있고 그 주위에 분지가 있어요. 아래로 인더스 강이 흘러가고 있고요. 이 페샤와르 분지가 좁은 의미의 간다라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인더스 강 서쪽까지 포함해 부른 적도 있지만, 대체로 페샤와르 분지를 간다라로 불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간다라 불교와 불교 미술이 퍼져 있던 곳을 넓은 의미의 간다라라는 뜻의 ‘Greater Gandar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간다라의 주민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간다라는 간다리라는 사람이 살던 땅이라는 뜻이에요. 인도-유럽어족의 유목민이 남진해 기원전 1500년쯤 인도에 정착하는데, 그 한 갈래가 간다리였습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경로(실선은 육로, 점선은 해로)와 주요 전투지

사실 동서의 만남은 알렉산더 이전에도 있었어요. 이란과의 만남인데, 알렉산더가 오기 전에 이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땅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서반부가 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지요.

기원전 6세기-4세기 페르시아 제국이 지배할 때 간다라도 속주의 하나였어요. 페르시아 제국 수도 페르세폴리스에는 20여 개 지역에서 조공하러 온 사절들을 묘사한 부조가 있는데, 여기에 간다라와 박트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새겨져 있습니다.

그 뒤에 알렉산더가 온 겁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동쪽 끝까지 온 거죠. 알렉산더 뒤에는 아시아의 제국을 물려받은 셀레우코스의 제국이 됐고요. 박트리아에서는 그리스인 왕국이 독립해 남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여기 기원후 1, 2세기에 새겨진 간다라의 부조에 그리스식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와요. 우리가 종족 구분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언어이고 미술에선 복장인데, 이건 확실히 그리스인 복장이죠. 바쿠스나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주신제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 지역 서쪽에는 알렉산더 후예들이 있었고, 남쪽 인도 본토에서는 기원전 4세기 말 큰 제국이 일어납니다. 바로 마우리아 제국입니다. 이 제국이 커지면서 서쪽의 알렉산더 후예들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하게 됩니다.

아쇼카왕 때 제작된 주두(기둥머리)와 오늘날 인도 국장

마우리야 제국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야의 손자가 유명한 아쇼카왕이죠. 그가 불교로 귀의해 후원자가 된 후 불교가 이 지역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사람이 붓다가 처음 설법했던 불교 유적에 남긴 커다란 기둥이 있는데, 그 주두(柱頭, 기둥머리)가 현대 인도의 국장(國章, emblem)이 됐죠.

독자적인 문자와 말을 썼던 간다라

아쇼카는 다르마, 즉 정법에 의한 삶을 강조하는 칙령을 제국 곳곳에 새겼는데, 명문을 보면 위쪽은 그리스 문자, 그리스어로 썼고, 아래쪽은 아람 문자, 아람어로 썼습니다. 아람어는 당시 아시아 서반부에서는 오늘날 영어와 같은 보편어였습니다. 이걸 보면 이 지역에서 그리스계와 이란계 사람들이 살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이런 문자와 언어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죠.

페샤와르 분지에 새긴 칙령을 보면, 인도어를 쓰고 있어요. 인도어 중에서도 이 지역의 특별한 방언이 있어요. 간다리라고 부르는데요. 그것을 이 지역에서만 특별히 쓴 문자, 카로슈티라는 것으로 썼습니다.

이 시기는 인도 역사뿐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때 인도인들이 비로소 문자를 쓰게 됩니다. 인도에는 오랜 종교 문학 전통이 있는데, 그럼에도 인도인 문자를 쓰게 된 것은 인더스 문명기를 제외하면 기원전 3세기 아쇼카가 돌에 새기게 한 것이 가장 오랜 유물입니다.

이때 두 가지 문자가 나오는데, 하나는 인도 본토에서 쓰던 브라흐미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간다라에서 쓰던 카로슈티 문자입니다. 인도 전역에서 브라흐미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간다라만 독자적인 문자를 갖고 있었어요. 카로슈티 문자는 아마 페르시아 제국에서 쓰던 아람 문자를 기원전 4세기쯤 변형해서 만든 것 같아요.

브라흐미 문자의 기원은 좀 모호한데, 간다라의 카로슈티 문자 창안에서 자극받아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인도 지적 문화에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간다라 지역이 인도 본토와 달리 독자적인 문자를 썼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언어로도 그렇고 문자로도 그렇고 인도 본토와 구별되는 전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다라의 불상도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은 인도 변방이 아니고, 인도 아리안이 정착하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구사하고 있었어요. 인도 본토에서 문자를 쓰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3, 4세기였지만, 이곳에서는 세계 언어학사에서 가장 정교한 문법책을 처음 쓴 빠니니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미 상당한 지적 전통이 있던 곳이란 거죠. 변방이 아니라 인도의 다른 지역들과 문화적으로 경쟁하던 유력 지역 단위가 있었던 곳입니다.

쿠샨 왕조 사람이 불상 만들기 시작

간다라 미술이 본격적으로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후쯤인데, 여기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쿠샨 왕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원래 유목민이었어요. 중국 역사책에 돈황 부근에 살던 월지라는 종족이 나옵니다. 한나라 변방의 유목민들이죠. 이들은 인접한 또 다른 유목민인 흉노와 갈등하다가 패해 월지 왕의 두개골이 흉노 왕의 술잔이 되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 뒤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손이라는 유목민에게 패해,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 우즈베키스탄 남쪽과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박트리아에 자리잡았습니다. 그 바람에 박트리아에 정착했던 그리스계인들이 패해 남으로 쫓겨 내려가게 되지요.

그런데 한나라 무제가 북쪽 흉노족을 치려는 과정에서 서쪽의 월지랑 협공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게 됩니다. 그때 자원해서 서쪽으로 간 사람이 장건입니다.

하지만 장건은 월지를 찾아가는 길에 흉노족한테 붙들려 거기서 결혼까지 하고 10년쯤 살았어요. 그러다가 도망쳐서 결국 박트리아의 월지에게 갔는데, 그 곳 사람들은 옛 원한은 다 잊고 흉노의 협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그 덕에 중국과 서쪽 간 교역과 교류의 길이 트였습니다. 또 덕분에 우리로서는 쿠샨이나 월지에 대해 쓸 만한 역사 기록을 갖게 됐지요.

쿠샨은 아프간 북쪽 그리스계 사람들을 쳐부수고 한때 넓은 제국을 이뤘습니다. 인도 북부, 갠지스 강 유역 중부, 이란 동부, 중국 신강성 남쪽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신강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인도어로 쓴 목판들이 니야라는 곳에서 다수 발견됐어요.

이 쿠샨 시대에 불교 미술이 흥했습니다. 또 이때 비로소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쿠샨 제국 화폐에는 부처라는 이름을 그리스 문자로 새긴 상이 보입니다. 불상을 만들 때 간혹 누가 이러이러한 상을 바친다고 명문을 새기기도 했어요.

제 책에는 별로 담지 못했는데, 간다라 미술과 관련해 지난 20년 동안 불교학자들의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 있습니다. 간다라에서 나온 나무껍질 경전들입니다. 2000년 전쯤 필사된 불교 경전들인데, 그것이 다 이 지역 인도말로 돼 있습니다. 인도 본토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말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인도 하면 하나의 인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만 해도 하나의 한국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부터 ‘하나의 한국’이라는 생각이 등장했느냐는 것은 따져볼 문제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과거 인도에도 몇 군데 중심지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후 400~500년쯤 되면 인도 본토의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완전히 인도 문명의 주류가 됩니다. 부처가 활동한 곳, 아쇼카의 마우리야 제국이 흥기한 곳, 고전 문화를 완성한 굽타 왕조가 번성한 곳도 이쪽입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이쪽 인도와 함께 또 하나의 인도로서 인도 문명의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했던 곳이 간다라라고 하겠습니다. 여기는 나름대로 다른 문자와 언어의 정체성이 있었고, 이들은 밖에서 들어온 문화에 대해 훨씬 개방적이었죠. 헬레니즘 문화유산이 있었기 때문에 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게 간다라 불상이라는 서양 고전 양식을 가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원후 400~500년경이 되면 이 지역의 간다리라는 말, 카로슈티라는 문자, 서양 고전 미술 양식이 다 자취를 감춥니다. 대신 인도 본토에서 흥기한 고전 산스크리트어, 브라흐미 문자, 인도 특유의 미술 양식이 이 지역으로 올라옵니다. 헤게모니 경쟁에서 서북쪽의 인도가 패하고, 드디어 갠지스 강 중류의 인도가 승리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 문명을 형성하게 된 거죠.

불교 미술의 기원, 간다라

간다라 미술은 조형적으로 아주 다양합니다. 불상도 아주 다양한 얼굴이 있습니다. 한 가지 주류로만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여러 요소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헬레니즘 양식과 아주 흡사한 것도 있고, 로마와 연관된 것도 있고, 이란계도 있고, 북쪽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결과 간다라에서 불교 미술의 여러 유형이 창안된 거지요. 그런 점에서는 불교 미술의 원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후대 인도 본토의 불교 미술과 동아시아의 불교 미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상이 만들어진 건 사람들이 부처를 인간 모습으로 보려는 열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다라에서 나온 불상들을 보면, 서양 미술처럼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정형이 없었어요. 특정 형상의 얼굴이 아니라 몇 가지 유형(type)을 전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후대 인도에, 또 동아시아 중국으로 전해졌지요.

기원후 7세기쯤 인도의 불교도들에게 제일 유명하던 곳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라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불상이 가장 유명했어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데, 그때 불상이 유명해서 이곳에 참배했던 당나라 사람들이 그 불상을 그림으로 모사해서 가져갔다고 해요. 그런 것이 우리나라까지 전해져서 석굴암 불상 같은 것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교류

저는 원래 19세기 후반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때가 근대적 지식이 형성되는 시기인데, 이때 불교 미술에 관한 지식도 간다라의 불교 미술을 토대로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이게 제 책 표지에 쓴 사진인데 한 사원에서 아주 많은 불상이 발굴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유적에 관해 알려진 것은 이런 사진 몇 장뿐이에요.

1896년 로리얀 탕가이에서 발굴된 다양한 불상들

사실 인도에서 동서 교류는 간다라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해로를 통해서도 상당한 교류가 있었어요. 남인도의 안드라 지역에도 상당한 규모로 교류가 있었습니다. 인도 동남부에서도 많은 로마 화폐들이 발견된 적이 있고요. 이쪽 조각에도 서방이 영향을 줬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쓰던 항아리 모양도 갖고 온 게 보입니다.

우리는 동서 교류를 이야기할 때 흔히 서에서 동으로의 영향을 주로 언급합니다. 간다라 미술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에서 서로 간 영향은 매우 단편적인 사례들만이 알려졌습니다. 그게 간다라뿐만 아니라 중국 장안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가 한번은 장안에 관해 강의하면서, 당나라 문화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설명하는데, 어떤 분이 “왜 동서 교류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것만 이야기하느냐”고 하시더군요. 정확히 핵심을 찌른 질문이었어요.

이런 편향은 대체로 그동안 연구가 서에서 동으로 가는 것에 집중돼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근대기 이후 문명 교류에 대한 연구가 주로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이뤄진 데서 기인한 거지요. 그만큼 동에서 서로 바라보는 연구는 미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유럽 형성기의 아시아 영향이 새 연구 과제

그런 점에서 최근 서양 고전철학의 피로니즘(Pyrrhonism)에 대한 연구가 관심을 끕니다. 피로니즘이란 헬레니즘 시대 초기에 피론이라는 철학자를 상징적으로 내세우면서 지중해 세계에 등장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올해 ‘Greek Buddha(그리스의 부처)’라는 책도 출간됐는데, 피로니즘이 분명히 인도 불교도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을 거라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쪽에 대해 비로소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책도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쪽의 연구가 더 많이 이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는 아시아 시대가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속에서 이런 동과 서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또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과제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서양 문명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면서 아시아의 특수성을 설명하려 하고, ‘아시아의 형성에서 서양(Europe in the making of Asia)’이라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둬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서양 문명의 형성에서 아시아의 역할, 또 아시아의 시각에서 서양 문명을 어떻게 보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럽 형성 과정에서 아시아의 역할(Asia in the making of Europe)’입니다. 이제는 우리 눈으로 서양의 것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고 우리가 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작업이 21세기의 중요한 작업이 될 거라고 봅니다.

제가 이제까지 공부하고 학생들 가르치면서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비단 간다라미술뿐만 아니라 미술사학, 또는 인문학 연구에서 어떻게 서양인들과 서양어의 헤게모니를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지난 20~30년간 제 가장 큰 주제였음을 몇 년 전부터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런 방향에서 어떤 식으로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가, 제게 남은 시간 동안의 과제일 것 같습니다. 이걸로 마칩니다.

-간다라 미술에 사람들이 왜 매료되는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교수님은 왜 간다라 미술을 연구하게 됐지요?

저는 간다라 미술에 매료된 건 아니구요, (웃음) 원래 저는 불교미술에서 인도와 중국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쓰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어려운 문제죠. 인도와 동아시아 관계에서 불교의 인식과 번역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미술의 문제와 어떻게 상응하는 변화를 보일까 그런 걸 쓰고 싶었어요. 박사 학위 논문은 들어가서 나오기 쉬운 걸 써야 하는데, 자칫 진짜로 거기 들어갔으면 못 나올 뻔했죠. (웃음)

제가 대학원 과정에 있을 때 세미나에서 불상의 기원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인도의 민족주의적 학자인 쿠마라스와미라는 사람의 글들을 집중적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또 그 사람이 일종의 맞수로 생각했던 푸셰의 글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 대해 글을 쓰게 됐는데, 제 지도 교수가 그걸 보더니 제게 간다라 미술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습니다. 그게 발단이었어요. 거창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제 지도교수는 인도미술 전문가였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을 함께 공부한다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했고, 인도만 하되 간다라가 좋지 않겠느냐고 권한 거죠. 저는 간다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주로 간다라에 대해 글을 써 왔습니다만, 간다라 전문가라기보다는 기원전후부터 300~400년의 인도 불교 미술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주로 하는 건 인도와 지중해 세계나 서양과의 외부 관계가 아니고, 영어로 말하자면 ‘internal operation’, 내부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연구합니다. 그걸 불교사와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이 제가 주로 쓰는 글의 주제입니다. 그 밖에 간다라 미술의 시각적 특징이라든가, 그 연장으로 감식에 대한 문제 같은 것도 다루고 있습니다.

간다라 불상 연구에서 큰 문제 중 하나는 가짜가 엄청나게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써보려는 글이 요즘 국제 경매에 나오는 가짜들에 관한 거예요. 소장자나 미술상들 생각하면 좀 위험하긴 하지만, 동료가 한번 써보라고 해서 말이지요. 더 큰 문제는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이 새로운 위조를 시도하면서 그 작품이 연구자의 논문에까지 소개되는 경우예요. 그래서 제가 이 문제는 써야겠다 싶은 거지요.

-간다라 미술이 우리나라 불상에는 별 영향을 안 줬다고 말씀하셨는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다 영향을 줬다고 나옵니다. 제가 역사 교사인데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요?

모든 말이 그렇듯이 간다라라는 말이나 어휘에 우리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지요. 마치 간다라에 뭔가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해요. 그러면 불교 미술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같고.(웃음)

불상을 처음 만든 곳은 간다라라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거기에서 여러 유형이 창안됐어요. 손을 뺨에 대는 반가사유상이라든가. 그 점에서는 간다라가 불교 미술의 원류라고 할 수 있고, 모든 불상이 간다라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영향’이라고 할 때는 어느 정도 직접적인 연관성이 분명하게 있을 때 그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연관성이라고 한다면 간다라보다는 직접적으로 당나라 불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불상은 간다라가 아닌 갠지스 중류의 불교 미술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불상이 간다라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헬레니즘, 그러니까 그리스인들이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영웅을 형상화한 것이 영향을 줘서 처음으로 불교에서 불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인가요?

아쇼카의 전설적인 전기가 있어요. 거기에 우파굽타라는 승려가 나옵니다. 부처가 죽은 뒤에 법을 전한 사람인데, 어느 날 설법을 하는데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이 있어요. 마왕이 변한 거였어요. 마왕이 자꾸 방해하니까 우파굽타가 시체 셋을 갖다 붙여요. 뱀과 개, 사람. 마왕은 그것이 안 떨어지니까 여러 신한테 사정을 하다가 결국 우파굽타한테 갑니다.

우파굽타가 이런 이야길 합니다. 나는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싶은데 본 적이 없다. 너는 보지 않았느냐. 그러니 부처님 형상으로 한 번만 바꿔 나타나 봐라. 그러면 시체를 떼줄 거라고 했어요. 그러자 마왕이 "내가 변하더라도 절대 나한테 절을 하면 안 된다"고 당부를 해요.

하지만 우파굽타가 그 변한 모습을 보고선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고 말아요. 마왕이 이래서 되겠느냐 하니까, 우파굽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실 너한테 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한테 절한 거다. 사람들이 흙이나 금속이나 나무로 불상을 만들지만, 사실은 거기에 절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한테 절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 이야기가 왜 거기에 나오는지 생각해 봤어요. 그건 부처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그 형상은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게 될 만한 힘을 갖게 된다는 거죠.

그런 열망이 있음에도, 여러 불교 경전에서는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합니다. 형상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해요. 후대 불교에서 많이 읽은 금강경에서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가 석가모니 부처는 신체적인 특징으로서, 즉 가시적인 몸으로서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이걸 다 극복하고 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거지요. 부처를 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간다라 쪽은 그걸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그리스 사람들이 들어와서 신전도 만들고 화폐에 조각도 하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불상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에 비해 인도 본토에서 간다라와 비슷한 시기에 처음 불상을 만든 마투라에서는 부처상을 만들면서도 ‘부처’가 아닌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절에 가는 여성을 보살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부처가 되기 전에 보살이라고 불렸어요. 그러다가 마투라에서도 간다라식 불상을 도입하면서 그때부터 비로소 부처라고 불렀어요.

간다라 사람들은 불상 제작을 더 편하고(casual)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불상을 보는 태도 역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간다라 불상은 우리처럼 불당에 모셔서 부처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덕, 복을 얻기 위해 만든 거였어요. 절하기 위해 한 곳에 모셔둔 것이 아니라, 봉헌된 많은 불상을 쇼윈도 같은 감들에 넣어 줄지어 세웠다는 말이지요.

불상으로 부처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사람들이 해결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불상 안에 사리, 부처의 유골을 넣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부처를 특별하게 만들고, 그저 돌덩이가 아닌 부처를 대신하는 존재로 만드는 거지요.

-요즘 인문학에 대해 일반인의 관심이 높은데요. 혼자 외롭게 공부를 하시면서 일반인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거라는 신념이나 믿음 같은 게 있나요? 인문학을 하려는 일반인에게 어떤 도움의 말씀을 해줄 수 있으신지요?

글쎄요, 요즘은 인문학이 힐링을 해주고 위로를 해준다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만. 일반 대중에게 교양을 높여 주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는 인문학도 있겠지요. 제가 하는 인문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학자 중에는 500명이 읽을 책을 쓰는 사람도 있고, 5만명이 읽을 책을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은 500명이 읽을 좋은 책이 많이 있어야, 그런 책을 토대로 해서 5만명이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쓰는 일도 가능하겠지요.

저는 우리 인문학에 좀 부족한 것이 세계적으로 지식 창출의 최전선에 서서 500명이 읽을 책을 쓴다는 각오로 치열하게 연구하는 전문가적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 되기보다 우선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저는 500명이 읽을 좋은 책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런 종류의 인문학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정교한 의자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는 장인의 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의자를 아주 정확히 만들기 위해서 애쓰지요.

인문학에도 흥행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요. 외롭지 않으냐고 하셨는데, 저는 제가 쓰는 글들을 통해 세계의 불교학자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제가 다루는 시대는 불교사적으로 매우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변화가 많이 일어난 시기입니다. 많은 문제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루하거나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뭐랄까, 인문학의 결론은 고정된 게 아니거든요. 인문학자들의 글은 내러티브가 중요하고, 해석이 결코 고정된 것이 될 수가 없어요. 결론을 이 지점에서 내릴 수 있고 저 지점에서 내릴 수도 있습니다. 많은 것이 유동적입니다.

저 자신도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시시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보는 시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죠. 이번에 제가 쓴 논문 하나는 한 10년쯤 전에 쓴 걸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전과는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그러고는 독자들에게 어느 쪽이 맞을지 판단해 보라고 썼어요.

국제 학계의 동료는 제가 오래전에 쓴 어떤 글에 대해 지금도 같은 생각인지 물어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어떤 문제를 보고 답하는 데는 여러 지점이 있는데, 나는 내가 가진 지점이 유용할 것 같아서 그 지점을 계속 추구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구도 게임과 같은 면이 있지요.

제 결론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념을 지니기보다, 세계를 보는 우리 시각과 생각의 유동성을 염두에 두다 보니 저의 학문적 세계는 흥미롭지만 단단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점이랄까요. 아무래도 불변의 신념에 차서 회의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어떤 것을 계속 끌고 가는 원동력에서 어려운 점은 있겠지요. 이상입니다. 긴 이야기를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주형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2년부터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간다라 미술 전문가다. 버클리대 누마타 불교학 초빙교수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한국어 저서로 ‘간다라 미술’(2003년 초판, 2015년 개정판), ‘아프가니스탄, 잃어버린 문명’(2004), ‘인도의 불교 미술’(2006) 등이 있다. 영문 저서도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