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한 애플의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선 '애플 뮤직' 같은 신규 서비스가 줄줄이 발표됐다. 그러나 이 행사에서 세간의 관심을 끈 또 다른 요소가 있었다. 기조연설자 10명 중 2명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던 애플의 세계개발자회의(WWDC)가 올해는 이례적으로 여성 임원 2명이 첫날 기조연설 무대에 차례로 올라 화제가 됐다. ‘애플페이’를 소개한 제니퍼 베일리(오른쪽) 부사장과 새로운 ‘뉴스’ 앱을 발표한 수잔 프레스콧(왼쪽) 부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현지 언론은 “애플이 더욱 성공적인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과 소수자에게 문호를 더 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애플이 1983년부터 열고 있는 WWDC의 기조연설은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를 비롯해 대부분 남성 몫이었다. 외부 인사를 빼면 기조연설에 나선 애플의 여성 임직원은 2009년의 스테파니 모건이 거의 유일했다. 그나마도 모건은 당시 남성 동료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올해는 달랐다. 인터넷 서비스 담당 제니퍼 베일리 부사장과 제품 마케팅 담당 수잔 프레스콧 부사장이 차례로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베일리 부사장은 간편 결제 서비스 '애플페이'의 확대 전략을 설명했고, 프레스콧은 새로 만든 뉴스 앱을 소개했다. 미국의 IT 전문 매체 '와이어드(Wired)'는 이날 기조연설 무대를 두고 "(남녀차별 완화라는 점에서) 애플이 좀 더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인텔이 만든 ‘다양성 펀드’의 운용 책임자인 리사 램버트 부사장. 그 자신도 미국 경제계에서 소수인 아프리카계 여성이다.

실리콘밸리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여성 존중'의 바람이다.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던 여성들의 기여를 제대로 평가하고, 그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자는 움직임이다. 실리콘밸리는 세상을 바꾸는 혁신과 창의의 산실로 유명하지만, 첨단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남녀차별 관행이 뿌리가 깊다. '기업학' 분야 명문인 밥스 칼리지의 2014년 보고서에 따르면, 벤처캐피털의 투자를 받은 현지 기업 중 여성 임원이 있는 기업은 전체의 15%에 불과했다. 여성이 CEO를 맡은 기업에 대한 투자액은 전체의 3% 선에 그쳤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유명 벤처캐피털이 '남녀차별'을 이유로 줄줄이 소송을 당했다. 미국벤처캐피털협회가 더 많은 여성 경영자와 여직원이 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을 정도다. 기존 산업의 고정관념을 파괴해온 실리콘밸리 내부에선 정작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여성들의 성취를 가로막아온 셈이다.

실제로 애플의 경우 전체 직원의 70%가 남성이다. 특히 엔지니어 부문은 문턱이 더욱 높아서 여성의 비율은 다른 부문에 비해 크게 낮은 20%다. IT 전문매체인 테크크런치는 "애플의 헬스 앱에 여성 건강의 중요한 지표인 임신·생리주기를 체크하는 기능이 누락됐던 것도 남성 위주 개발 문화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애플은 올 WWDC에서 이 같은 기능을 추가한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였다.

애플이 변화를 선보인 다음 날,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인 인텔은 더 원대한 여성 친화 정책을 발표했다. 여성과 사회적 소수 계층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에 1억2500만달러(약 1390억원)를 투자하는 것을 목표로 '인텔 캐피털 다양성 펀드'를 출범시킨 것이다. 브라이언 크루자니크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올해 초 "인텔을 포함한 산업계의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2020년까지 5년간 3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약속을 실천해가는 것이다.

인텔은 이 펀드의 운영책임자로 아프리카계 여성 임원인 리사 램버트 부사장을 임명했다. 펀드의 투자 대상은 창업자나 CEO가 여성이거나, 최고경영자가 남성이라도 그에게 보고할 권한을 지닌 여성 임원이 최소 3명 이상인 벤처기업이다. 램버트 부사장은 "실리콘밸리의 문제는 자신들의 폐쇄적인 네트워크 안에서만 인재를 찾고 끼리끼리 투자를 해온 것"이라며 "모두가 그래왔다"고 일갈했다. 인텔은 "이미 100개 이상의 투자 후보자를 찾았다"고 밝혔다.

반면 창업 초기부터 '여성 중용' 철학으로 주목을 받은 IT 기업도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로 성장한 중국의 알리바바가 그 경우다. 알리바바의 CEO인 마윈은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알리바바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여성을 많이 채용했다는 점"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그는 "알리바바는 전체 직원의 49%, 경영진의 35%가 여성"이라고 소개하면서 "남자는 회의장에서 서로 경쟁하고 싸우지만 여성끼리 토론하면 매우 논리적이고 편안하게 대화가 이뤄진다"고 말했다.